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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 산책길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종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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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을 걷는다. 매인 몸이 아니었는데도 모처럼 해방감을 느낀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활력을 충전시켜 주나 보다. 서귀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숙소에서 10분 거리인 쇠소깍을 걸었다. 계곡에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걸으면 숲의 시원한 공기가 온몸 마사지를 해주는 것 같다. 단거리라도 한바탕 달리고 싶은 가쁜한 마음이다.
비교적 잎이 크고 둥근 아열대성 나무, 구멍 뚫린 검은 돌멩이와 쪽물보다 더 짙푸른 쇠소깍의 물빛,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는 효돈천의 끝자락에서 해수와 만난다. 이렇게 담수와 해수가 만난 지점에 생긴 깊은 웅덩이를 쇠소깍이라 한다. 쇠소깍의 쇠는 소를, 소는 연못을 말하며, 깍은 끝이라는 제주 방언이다. 누운 소를 닮은 지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쇠소깍 양쪽 기슭은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지지만 절벽은 기암괴석이 뽐내듯 서 있고, 경사지면에는 윤기 나는 활엽수가 울창하게 우거졌다. 큰 키와 넓적한 잎사귀에 비하여 줄기가 너무 가느다란 나무는 이파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모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유네스코 생물보존구역으로 등재된 지역이다. 쇠소깍에 이어진 해변은 온통 검은 모래 세상이어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옛날 한라산 화산이 폭발할 때에 분출한 용암류는 여기까지 흘러와 쌓였고, 긴 시간 풍화와 파도에 쓸려 기이한 돌이 되었다. 용암이 굳은 현무암은 검게 타 기포가 생기기도 하여 비교적 가볍지만 강도는 낮지 않은 돌이다. 이런 바위와 돌이 물살에 흘러 내려오며 씻기고 깨지면서 독특한 형상을 지니기도 하고 검은 모래가 되기도 했다.

 

산책로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서서 신비를 품은 강물을 바라본다. 두 개의 고체가 충돌하면 깨지고 말지만 액체끼리 부딪치면 하나로 수용되거나 변화한다. 넘실거리며 흐르는 거대한 두 개의 물줄기가 한 곳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장면을 기억한다. 3년 전 답사했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 이야기다.
부딪치는 물줄기는 얼른 봐서 크게 소용돌이치거나 용솟음 같은 것이 없었다.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양 방향의 물가 쪽으로 약 300m 지점까지 역류하는 가는 물줄기를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미세한 역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물밑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상대를 수용하고 변화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쇠소깍의 민물과 바닷물이 부딪치는 장면은 양평 두물머리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쇠소깍의 두 물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역류하는 물결을 직접 보고 싶지만 가까이 갈 수 없다. 접근 금지 구역이라는 표시판이 선명하다. 주변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땅이지만 부석거리는 모래도 섞여 있어서 곧 흐물흐물 내려앉을 것만 같다.
격류의 담수와 거침없는 해수, 두 물결이 부딪친 끝에 형성된 쇠소깍을 생각한다. 원래 같은 듯 다른 성질의 것이 만나면 무엇인가 껄끄러운 것을 풀어 헤쳐야 할 일이 있을 터이다. 때로는 격랑을 몰고 다니지만 도량이 넓은 바닷물은, 모든 것을 휩쓸고 내려오는 장마철 격류나 하염없이 잔잔하게 흐르기만 하는 민물과 끊임없이 만나고 부딪쳐 왔다. 부딪치는 물줄기의 반작용으로 수력은 땅 밑을 파고들어 하천을 흠뻑 파이게 했을 것이다. 한데 결국 그 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언제까지나 부딪치고만 있지는 않는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는 순간에도 한편에서는 이질의 두 물줄기가 서로 융화를 시도하며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한다. 두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갈 때 물은 정화되어 맑고 푸른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하나 된 물은 도도히 흐르는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한다. 쇠소깍 맨땅 숲길은 물론 숲속의 데크 산책로까지 떨어진 낙엽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청결하다. 빽빽이 들어선 해송 사이로 빗자루를 든 환경미화원이 보인다. 커다란 비닐 자루에 쓰레기를 담던 아저씨에게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하자 반백의 아저씨는 얼굴을 활짝 펴고 선하디선한 미소를 보인다. 그 미소가 아침 산책길을 더욱 상쾌하게 해준다. 딱새 두 마리가 딱딱 소리를 내며 꼬리를 위아래로 까닥거리더니 후박나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쉴 사이 없이 퉁겨진다. 이 아침 딱새가 참 신난다.
쇠소깍의 산책로는 그리 길지 않다. 대략 400∼500m쯤 될까? 쉬엄쉬엄 걸어 15분 만에 쇠소깍이 시작되는 다리 위에 섰다. 제주 올레길 제5코스 종점이자 제6코스 시작점이다.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은 잔잔하다. 비가 온 지 오래되어서 효돈촌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결은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바닷물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르지만 격류로 흘러 내려오는 담수와 파도 높은 해수가 부딪쳤을 때는 흙탕물이었을 것이다.
충돌은 흙탕물이 되지만 결국은 투명하고 잔잔한 모습을 띠게 된다. 탁하고 거친 물줄기가 맑고 유순한 형태를 가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 터이다. 허황된 것이라고 외면했던 것들, 도무지 수긍이 되지 않는 날것의 함성도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는 우리의 내면에 흡수되어 곰삭은 게 있을 법하다. 부딪치고 화해하며 새로운 길이 열리기까지는 모름지기 진득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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