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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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늘 소리 없이 왔다.
4월 중순, 창밖의 앞산은 어느 날 갑자기 연둣빛 옷을 입고 있었다. 겨우내 마른 가지들만 흔들리던 산이 어린 잎을 달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계절은 사람의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연둣빛이 이틀 만에 짙은 초록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자연은 늘 그렇게 쉼 없이 자기 시간을 살아간다. 나는 그 빠른 생명의 흐름이 좋아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산책길을 나섰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산기슭 아래 넓은 밭에 이르렀을 때였다. 밭주인 부부가 허리를 굽힌 채 모종을 심고 있었다. 검게 젖은 흙에서는 봄 냄새가 났고, 바람은 갓 심긴 어린잎들을 조심스레 흔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고추 모종이 좀 남았는데 여기 밭에 심어보실래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텃밭에 푸성귀 몇 가지를 심어보고 싶던 참이었다. 아주머니는 문도 없는 낡은 농기구 창고 옆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은 비닐까지 씌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풀이 자라지 못하게 마대도 깔려 있었다. 생각보다 정성스러운 밭이었다.
고추 모종 열두 포기와 상추, 토마토 모종까지 건네주며 아주머니는 창고 안의 비닐끈과 지지대도 함께 내주었다.
“가끔 고라니가 내려오니까 단도리는 잘하셔야 해요.”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이 이렇게 오래 마음속에 남게 될 줄은 몰랐다.
봄날의 햇살은 따뜻했고, 심어놓은 모종들은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작은 잎 하나가 자라는 모습에도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흙은 정직해서 물을 주는 만큼 푸르러졌고, 바람은 어린 줄기들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밭에 한번 와보셔야겠어요.”
급히 내려가 본 밭은 어수선했다. 고추 모종과 상추는 모두 잘린 채 밑동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웃음이 났다. 바로 옆 주인집 밭은 평화롭게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는데, 유독 내 밭만 그렇게 초토화되어 있었다. 자동차 소음이 끊이지 않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숲에 숨어 살던 고라니가 밤사이 내려와 사람의 농작물을 몰래 먹고 갔다는 사실이 어쩐지 우습고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고라니는 왜 사람이 심은 농작물을 먹어야만 했을까. 산은 점점 좁아지고, 숲은 사람들의 길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밭을 넓히는 동안, 고라니의 먹이는 조금씩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배가 고파 내려왔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피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밑동만 남은 상추를 바라보면서도 이상하게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해 먹었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해질녘이면 괜히 밭에 오래 머물곤 했다. 혹시라도 그 고라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어느 저녁, 숲에 어둠이 내려앉고 바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때였다. 창고 쪽에서 무언가 느껴져 조용히 바라보니, 어둠 속에 푸른 눈동자 네 개가 떠 있었다. 아이들 구슬만 한 맑은 눈이었다. 그 눈은 놀란 듯하면서도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살고 있었던 주인처럼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문 없는 농기구 창고는 오래전부터 아무도 모르게 고라니의 집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 후로 나는 감자와 고구마를 창고 안에 슬며시 넣어두곤 했다. 가을에 말려둔 무청도 가져다 놓았다. 녀석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날 보면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삼 년 동안 한 밭에서 계절을 나누며 살아갔다.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이처럼.
그리고 겨울이 왔다. 한 해의 끝자락, 눈 내리는 밤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술에 취한 나그네 하나가 비틀거리며 어둠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쓸쓸한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에서 우리는 큰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다. 녀석은 도로 가장자리에 쓰러져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숨은 가쁘게 떨리고 있었고, 눈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우리는 급히 구청에 신고하려 했지만 이미 트럭 한 대가 도착해 고라니를 싣고 떠나갔다. 눈발 속에서 트럭의 불빛만 멀어져 갔다.
며칠 뒤 밭주인 아저씨가 조용히 말했다.
“암컷 한 마리가 자꾸 산자락이랑 밭 주변을 헤매더라고요. 짝을 찾는 것 같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죽음은 떠난 쪽보다 남겨진 쪽에게 더 긴 겨울을 남긴다. 나는 그날 오래도록 창고 옆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봄이면 몰래 내려와 상추를 잘라 먹고, 어둠 속에서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작은 생명. 사람과 짐승이 서로의 경계를 넘지 못한 채 같은 계절을 건너왔다는 사실이 문득 슬프고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봄이 오면 나는 가끔 그 밭을 떠올린다. 연둣빛이 초록으로 짙어지던 산과, 밑동만 남은 상추, 그리고 문 없는 창고 속 푸른 눈동자를. 어쩌면 자연은 늘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나가며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땅도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