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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꿈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순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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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꿈을 안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새벽 한강을 건넜던 때가 어 제 같은데 60년의 세월이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70대 후반이 되었다.
기차는 밤새 힘차게 달려 서울역에 내렸는데 새벽 안개가 자욱했던 생각이 난다. 서울역에서 돈암동까지 다니는 전차에서 내려 미아리 고 개를 지나 다시 산 쪽으로 한참 올랐다. 산기슭에 게딱지 집같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집 중 하나인 외사촌 오빠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낯선 서울살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밤이면 밤잠을 설쳐 가며 두레박질로 물을 길어 밥을 해 먹으며 학교 에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일 주일에 한 번씩 일기 검사를 해서 나의 생활이 가감 없이 선생님께 전 달되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으로부터 격려도 받았다. 지금 이나마도 글문을 서성이는 것은 선생님의 영향이 컸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가정교사와 신문 배달도 하였고, 정릉 산에 있는 집에서 산 아 래에 살던 단짝 친구와 낙산 언덕과 삼선교 산 아래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 다니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성북구에 문인들이 많았는지 박목월 시인과 김동리 소설가와 손소희 소설가가 학교에 다녀간 적이 있다. 그 후 고2 때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새벽’이란 제목으로 글짓기대회를 했는데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안타 까움을 주제로 썼다. 최우수상을 타야 했는데 그 상은 고3 선배에게 주 고 나는 1등상을 주었다는 말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루는 어머니 친구가 우리 집에 다녀갔는데 어머니께 내가 하는 고 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는 이야기가 전달되었고, 그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곧바로 초등학교 1학년인 남동생과 2학년 여동생을 남겨두고 막냇동생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보면 어머니는 참 무모하 고 단순했다. 다 큰 딸 고생하는 게 뭐가 그리 안타깝다고 어린아이 둘 을 남겨 두고 나를 따라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나는 두고두고 동생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그 이듬해 내가 두 동생 을 데리고 올 때까지 어린 아이 둘이 사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 면 지금도 가슴이 짠하다. 그때는 서울만 가면 저절로 살길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반도 없이 서울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일이 원인이 되어서 큰 남동생은 어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환갑 도 되기 전에 어머니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내가 공무원이 되자 어머니는 춤을 너울너울 추셨다. 그 후 내가 결 혼해서 큰아들을 낳고 나서도 어머니는 한동안 가게를 했다. 첫아들을 낳아 두 달간 산후조리가 끝난 후 출근하기 시작하자 열세 살짜리 아기 보는 아이를 구해 주었다. 서너 달이 지날 무렵 누군가의 꼬임에 빠졌 는지 그 아이는 내가 퇴근할 때쯤 아기를 재워 놓고 집을 나갔다. 그래 도 아기에게 피해 주지 않은 게 얼마나 고맙던지. 
그때부터 우리는 친정 식구와 함께 살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자 가 결혼해서 친정 식구와 함께 사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오래지 않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친정어머니는 시누이 시동생 4남매를 거느린 시어머니는 네가 모시고 나는 내 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시어 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와 함께 살아봐야 식모밖에 더하겠느냐면서 나의 청을 거절하셨다.
그 후 막냇시동생이 결혼해서 그들과 함께 사시던 어머니는 나중에 는 나에게 너에게 해준 것이 없어서 너의 집에 가지 못했다고 후회를 하시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큰시누이와 함께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께 오고 싶은 때 아무 때나 오시라고 내가 만들어 드 린 우리 집 대문 열쇠가 어머니의 지갑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경제 능력 없이 술만 마시면 살림을 부수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질렸 는지 어머니는 나에게 결혼할 사람까지 정해 주면서, 사람도 사귀지 못 하게 했다. 선을 본 지 3개월 만에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후 30년 동안 맞벌이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1985년에 과천 종합청사로 전출 가서 1999년에 정년을 8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 15년을 장위동에서 과천까지 출퇴근하면서 아이들을 키워냈 다.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가난한 집 종부로 사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정년퇴직하면 나를 옆에 태우고 가고 싶은 곳 데리고 다니겠다 는 남편의 말만 믿고 기다렸으나 그이가 정년퇴직 후, 7년을 중학교 배 움터 지킴이로 더 근무하다 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기도 시간이 모자랐는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8순을 넘기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 후 남편이 집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고 나도 자연히 남편과 함께 발이 묶이게 되니 안타깝고 좋은 시절을 기다리고만 살아온 게 허무할 때도 있다. 노후에는 함께 가고 싶은 곳 다니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 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됐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 들이 바르게 자라서 제 길들을 가서 큰아들이 장손 밑으로 삼둥이를 낳 았고, 작은아들이 딸 하나를, 막내딸이 남매를 더해 손자 손녀가 일곱 이나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더군다나 남이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는 바람에 우리 집 은 손이 귀한 집이었는데, 우리 대에서 삼둥이가 태어났다고 며느리 공 을 시고모님은 나에게 돌리셨다. 아는 사람은 나보고 삼둥이 손자들 장 가가는 것까지는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위로를 해 주기도 한다.
심장 질환을 앓는 남편이 9년 전에 심장에 스텐트를 여섯 개나 박더 니 3년 전부터 코로나까지 심하게 앓느라 하루하루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 올해 초에 스텐트 하나를 추가한 후 이제는 숨이 차고 밤이면 식 은땀을 흘리며 심하게 앓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 때 꿈은 어디로 갔는지 지치고 힘들다가도 삼둥이를 생각하면 그 애들이 나의 푸른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 다. 그래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인지 요새같이 자식들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세상에 삼 남매가 결혼해서 자식들도 두고 열 심히 살고 있으니 위안이 된다.
나이가 들면서 반가운 소식보다는 근심되는 소식이 더 많다. 하여 전 화 걸기도 힘들고 오는 전화 받기도 겁난다. 또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어린 손자손녀가 얼마나 어여쁜지, 하는 짓마다 예뻐서 품 에 안고 꼭 깨물어 주고 싶다. 젊어서는 내 자식들도 제대로 쳐다볼 새 가 없더니 나이가 들면서 손자손녀뿐 아니라 처음 본 애들도 그들 나름 대로 너무나 귀엽고 예뻐서 그들과 웃음을 나누고 말을 걸고 싶어진다
큰아들네 집에 손주가 넷이나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이들이 더 귀엾 고 사랑스럽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밥만 먹으면 두 손을 합장하고 고맙 다고 인사를 한다. 그럴 때 그에게 마주 보며 두 손을 합장한다.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켜 미안해하는 남편이 짠하다. 인생 의 푸른 꿈이 별건가. 사는 날까지 지금처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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