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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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눈물이라니, 여기서.
살짝 물이 고여서 눈을 깜빡이며 아닌 척했다. 좀 더 지나니 눈가에 촉촉하게 젖어 내린다. 손수건을 꺼낼 수밖에 없다. 주위는 밝지 않았다. 2800여 명이 참석한 홀 정면에 교가가 흘러나오는 화면이 조명을 받고 있을 뿐이다. 옆 친구들은 57년 전에 부르던 노래를 합창하며 옛날로 돌아간 듯하다. 1925년에 우리나라 여학교 중 두 번째로 설립된 경북여자고등학교인 모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어제 전야제에서도 즐겁게 떠들기만 했다. 호텔 컨벤션 센터에서 여러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건성으로 보았다. 몇 년 혹은 몇십 년 만에 만난 동기들, 또 졸업 후 처음 만난 은사(같은 여고 동문이라서)와 서로 늙지 않았다고 놀라고 웃었다. 사진이 만남을 증명하고 세월을 뛰어넘은 얘기들이 테이블을 건너다녔다. 화기애애했다. 어떤 걱정도 할 일도 사라진 밤이 흘렀다.
생애 이런 일은 또 없으리란 생각이 주름진 얼굴들을 불렀다. 온갖 세상사를 겪고 의연해진 모습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졸업생들, 그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도, 100세 선배도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행사인 것은 틀림없다. 나 역시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현장 속에 있고 싶었다. 꽃봉오리 같은 재학생들도 함께 교가를 불렀다. “저 푸른 하늘에 고운 꿈이 서리고 이 좋은 동산에는 슬기가 샘솟는다. 젊은 가슴 품은 뜻을 귀히 가꾸어∼” 노래를 부르는데, 감정의 북받침도 없는데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그머니.
눈을 보호하기 위한 기초눈물도 양파를 썰 때처럼 반사적인 눈물도 아니다. 슬픈 일이나 큰 기쁨이 있는 것도 특별히 감동받은 일도 없는데, 느닷없이 뜬금없이.
좀 전, 모교의 현재 교장이 축사 속에 이런 말을 했다.
“제 어머니가 1952년생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비슷한 연배가 많은 줄 압니다. 제게는 16, 18세 두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꿈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에게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 어딘가에 조금 진동이 왔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중학교 3학년 때, 막내 삼촌이 “니가 제일 여상을 가면 3년 동안 학비를 안 내도 될 거다. 그렇게 할래?” 은근히 부추기는 말을 했다. 당시 삼촌은 연탄공장을 하려고 아버지를 설득하던 참이었다. 나는 내 실력으로 갈 수 있는, 모두가 선호하는 학교를 두고 다른 학교에 간다는 생각을 추호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등록금 낼 때마다 날짜를 넘기기 일쑤여서 집안 형편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 아버지를 믿었다.
“언니는 경북여고 다녔는데, 왜 나더러 여상을 가라고 해요. 싫어요.”
고교 3년 동안 우리 집 가계는 좀 더 내리막길을 걸었다. 내가 대학 갈 무렵, 연탄공장은 문을 닫고, 살던 주택까지 팔아야 했다. 정원의 나무들과 꽃들이 철 따라 색다른 기쁨을 주던, 집보다 마당이 컸던 한옥과 이별하고 마당 없는 상가주택을 세 얻어 이사를 했다. 대학을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에게 입학금 8,000원(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은 수업료가 면제였다)만 해주시면 알아서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르바이트로 과외지도를 하면서 4년을 보냈다. 정확히는 3년 6개월이었다. 고교생부터 초등생까지 남학생 여학생을 가리지 않았다. 가르치는 아이가 성적이 오르면 마음이 편했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학생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다. 1학년 가을, 방송국에 안정된 일자리가 있었는데, 지나친 정의감과 동료의식으로 행동하다가 놓쳤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함 때문이었다. 그때 받은 몸과 마음이 텅 비는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4학년 2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개인 지도 생활을 청산했다. 날개를 단 듯했다. 내가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그땐 열심히 사느라 못 느꼈을까, 지금 보니, 그때의 내가 참 안쓰럽다.
졸업 후 서울에 있는 공립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동생들 학비도 도와줄 수 있었다. 등록금이 싼 사범대학을 갔지만 어릴 때 나는 여판사가 되고 싶었다. 어떨 때는 소설가가 되는 상상도 했다. 사법고시가 쉽지 않은 관문이라는 점이 집안 형편을 고려해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힘든 시절에도 나는 쭉 뻗은 넓은 길을 그렸다.(대학 때, 미래를 점치는 그림그리기가 유행이었다) 내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리리라고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 속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6·25전쟁 발발 26일 만에 태어난 나를 지키려고, 엄마는 친할머니의 피난 가자는 말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엄하셨지만, 내게는 꾸중 한 번 안 하고 항상 지지해 주셨다.
그런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결혼해서 두 아들을 사회의 건실한 일원으로 안착시키고 가정을 이루게 했다. 지금, 판사도 소설가도 되지 못했지만, 수필을 쓰며 나의 일상을 의미화하고, ‘권태숙의 문학카페’란 채널을 운영한다.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과, 진정 어린 친구들 속에서 내 삶은 따뜻하다.
오늘 이 뜻밖의 눈물은 내 삶에 대한 사랑과 모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