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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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동의 우주와 시학 그리고 감동
양자역학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이나 모든 우주만물의 기본요소는 같은 원자들이고 이들 원자들은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들은 근원적으로 안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불안정한 것들이어서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며 안정된 상태를 도모하고자 영원히 이합집산, 천지조화를 계속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우주만물의 존재원리를 파동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만물의 근본이 파동이듯이 시의 근본원리도 파동이다. 시가 산문과 다른 결정적인 특징은 리듬, 즉 파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부터 일반문장을 산문(散文, prose), 시를 운문(韻文, verse)이라 했다. 여기서 운문의 운(韻)자는 ‘울림 운’ 떨림과 여운의 뜻으로 시의 근본은 떨림의 문장이라는 말이다.
물론 시를 당초 운문이라 한 것은 시의 특성인 말소리의 음성적 특징이 일정한 규칙의 파동, 즉 떨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떨림의 방법을 서양에서는 율격(metre), 한시에서는 압운(押韻), 우리의 고대시가에서는 자수율이나 음보율이라는 소리의 규칙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고대시가의 율격이나 압운을 종합적으로 운율(韻律)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시의 파동성은 일정한 소리의 반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나 의미의 반복도 있기에 넓은 의미로 현대시학에서는 율동(律動), 즉 규칙적인 움직임이라는 뜻으로 모두 리듬(rhythem)이라고 한다.
떨림의 대표적인 양식에는 음악이 있다. 음악은 전적으로 음(音)을 재료로 하여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시도 언어를 재료로 하여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고 언어도 따지고 보면 소리를 수단으로 하는 의미체계인 만큼 시도 일상의 언어보다는 보다 강한 울림을 주는 형식의 구조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들이 부닥쳐 나는 진동이다. 악기의 경우 음원이 진동하면 음원과 맞닿아 있는 공기분자들이 진동하며 파동이 되어 소리로 전달된다. 인간의 음성도 목의 성대가 떨면 공기와 부닥쳐 파동이 일어나고 그 파동의 고저장단 강약에 따라 천의 목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빛도 떨림이고 원자도 떨림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떨림도 전기와 자기의 상반된 에너지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물질이나 빛이나 음악이나 시나 모두가 그 원천은 이질적인 파동들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떨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데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나 음악이나 시가의 생성원리가 같은 파동의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의 떨림이 불규칙할 때는 불쾌감을 주지만 일정한 규칙, 즉 소리의 길고 짧음, 높고 낮음, 강하고 약함이 일정한 하모니를 유지하면서 서로 어울려 진동할 때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리듬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이처럼 강하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감동적인 울림, 즉 소리나 감정의 파동을 잘 조정하여 마음을 잘 움직이게 하는 재주를 예술이라 하고 이러한 작업을 잘하는 재주꾼을 예술가 시인 음악가 등으로 호칭한다. 따라서 음악가나 시인이란 일상적인 소리와 달리 감동적인 울림을 주는 형식의 소리, 즉 리듬을 창조적으로 잘 구사하는 특별한 재주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놀라운 인류문명사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자연(nature)을 개척하여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문명(culture)이라 하고 그 대표적인 것이 과학기술이고 예술이라 하겠는데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과거 고전물리학에서는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을 과학기술이라 했고 이는 상상적인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양자과학시대 정보통신 과학기술자란 우주만물, 즉 물질의 기본인 원자들의 파동을 잘 이해하고 그 파동을 창조적으로 잘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당초부터 우주만물의 파동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파동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해온 시학과 이제는 만남이 가능하게 되었고, 과학과 시학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목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만물이 파동이듯이 인류문명의 다양한 변화발전도 결국은 모두 파동놀이가 된다는 말이 된다. 왜 파동인가, 파동은 모든 생성 변화의 에너지 즉 힘이고 생명이고 발전 변화 창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한편 파동은 나누어질 때 더 감동적이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갖가지 모양과 색깔이 다른 만물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발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바로 파동은 다양하게 적절히 나눌 때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빛을 파동이라 했는데 만일 빛이 똑같은 파장을 가진 파동뿐이었다면 이 우주는 어찌 되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광선이라는 파장이 다른 빨주노초파남보의 다양한 색깔의 빛을 만들어 인간들과 공유하면서 우주만물의 형상을 구분하고 그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통해 미적인 감동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이는 소리의 경우도 그렇다. 모든 소리는 음악이 아니고 모든 말소리는 시가 아니다. 음악은 소리 중에 가청할 만한 음파. 그중에서도 듣기 좋은 음파를 설정하고 이를 다시 고저장단 강약으로 세분하여 가장 감동적인 음파놀이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도레미파솔라시 7음계, 동양에서는 궁상각치우 5음계를 단위로 높낮이를 조정하고, 길이는 2, 3, 4박 등 박자로 나누고 이들을 오선지에 악보를 만들고 이 악보에 따라 목소리로 악기로 새로운 파동을 일으키면 마침내 인간이 창조한 감동적인 음악이 된다.
그렇다면 말소리인 문학, 그중에서도 시가문학의 리듬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 말소리도 파동인 만큼 그 파동이 듣기 좋은 감동의 파동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빛의 파동을 가시광선으로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누고 음악가가 소리의 파동을 도레미파솔라시 등의 음계로 나누어 감동적인 파동 만들기를 하듯이 시인은 긴 산문 문장을 연을 가르고 행을 가르고 과거에는 2음보 3음보 4음보, 또는 3·4조 7·5조 등의 규칙적인 글자 수를 정하여 반복함으로 음악적인 리듬감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의미, 문맥, 음절, 어절, 구두점,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하여 감동적인 리듬을 구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물주 하나님이 빛이라는 파동 중에 가시광선을 나누고 만물을 다양한 색깔로 드러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즐기듯이, 음악가는 소리라는 파동 중 가청의 파동을 고르고 그중에도 듣기 좋은 파동을 다시 고저장단 강약으로 잘 디자인하여 감동적인 소리를 만들 듯이, 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인 리듬을 위하여 언어의 파동을 행갈이 연갈이 음수율 음보율, 의미, 문맥, 음절, 어절, 구두점, 이미지 등 다양한 언어적 요소들로 나누어 창작하게 되는 것이다.
2. 강한 감동과 시학의 혼란상
이처럼 시학에서 시의 존재성, 또는 시의 특성을 말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입장은 시는 산문과 달리 운문이라는 것, 즉 산문이 토의적인 문장이라면 시는 소리의 울림이나 떨림, 감동(感動)을 중시하는 문장이다 했고. 그래서 시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시학(Poetics)』에서 “시란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로부터 지금까지 왜 사람들은 일반적인 말소리를 일부러 잘라서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즐기는 것인가. 리듬을 만들어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음악의 경우도 그렇다. 음악도 소리를 나누고 이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리듬을 만들어 이들 즐기고 있는데 시나 음악 등의 이러한 리듬 놀이는 도대체 왜 하는 것인가 하는 리듬 놀이의 근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그 이유를 그동안의 시학이나 음악이나 예술에서는 떨림, 즉 감동(感動)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시가 산문보다 더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리듬을 만들어 즐긴다고 한 것이다. 감동(感動)이란 말을 문자로만 보면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 일반 언어도 가능하다. 일반 언어로도 정서 환기, 즉 감동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나 음악이나 예술에서 말하는 감동을 영어에서는 감명(impression), 흥분(excitement), 선정(sensation) 이런 단어에서 보듯이 좀 더 깊은 인상을 받는 것, 흥분할 정도로 놀라는 것, 세상을 들끓게 하는 등의 깊은 인상을 주는 충격 흥분 놀람 격렬함을 갖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시의 기능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도 했다. 카타르시스란 의학적으로는 설사란 뜻이다. 비극시의 기능은 주인공들의 비참한 운명의 이야기를 통해 청중이 연민과 공포라는 충격을 받고 마음의 정화를 갖게 된다는 말인데 요즘말로 하면 강한 충격에 의한 스트레스 해소다.
이처럼 시의 기능이나 리듬의 기능에서 가장 중시한 원칙은 강한 감동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현대의 시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전통이 되었다. 현대시학에서도 시의 구성원리를 긴장, 일탈, 낯설음 등의 용어로 설명하는데 리처즈는 은유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간의 상호충돌, 테이트는 시의 구성을 텐션(tension), 휠라이트는 은유를 투쟁을 통한 긴장,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 랜섬은 형이상학적 기상(metaphysical conceit), 쉬클로프스키는 시어의 낯설음 또는 일탈 등으로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주장들도 용어만 다를 뿐, 시의 본질은 결국 모두 강렬한 충격의 감정, 즉 강하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양자과학을 접하면서 문학이나 시의 존재 이유를 무조건 강한 감동이라고만 생각하는 인식태도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감동의 진의를 살펴보자. 감동이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물이 드러내는 파동과 파동끼리 만나서 나타나는 다양한 혼합감정이다. 감동은 어떤 장면, 이야기, 행동 등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리거나 울림을 느끼는 감정인데 폴켈트는 감동은 미적 대상에 의해 우리의 생명감정이 억압되고 약화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것에 의해 생명감정이 신선하게 고양되는 경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감동에는 쾌감과 불쾌감이 혼합된 양가의 심리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감동은 아름다움이나 기쁨이나 만족과 흥분과 행복의 감정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추악하고 잔인하고 원통하고 불쾌한 감정도 있는 두 얼굴이란 말이 된다.
그래서 강한 감동이란 말의 두 얼굴은 문학에서도 크게 두 얼굴로 양극화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조적으로 보면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또는 형식주의와 역사주의가 그것이다. 낭만주의는 강한 감동의 표현을 밝은 하늘의 세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긍정적인 감동이고, 사실주의는 모순된 땅의 세계를 통해 부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감동이다. 반면 형식주의는 문학이란 언어의 구성체인 만큼 언어의 요소들을 적절히 재구성하여 놀라운 감동을 들어내고자 하는 것이고 역사주의는 문학은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도구인 만큼 인간의 선과 악, 의와 불의에 대한 참상을 참혹한 감동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업주의에서는 강한 감동을 지나친 호기심으로 이용하고 정치주의에서는 권력쟁취를 위한 대중선동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문학이나 시에서 강한 감동을 드러내는 방법이 양분되는 것은 감동이란 용어의 이중성에도 있지만 이는 과거 철학이나 사상의 기본적인 구조가 하늘과 땅, 선과 악, 물질과 정신, 육신과 정신 등 모든 것을 이분하고 대결하는 이원론이 그 중심이었기에 문학이나 시에서도 강한 감동을 드러내는 방법에 이런 이분법의 차별과 대결이 지배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시는 물론 모든 분야가 보다 강렬한 충격 요법이어야 보다 효과적이라는 이 격한 감동의 강박관념 때문에 형식주의에서는 시가 보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낯설게 만들기가 되어야 한다면서 기존의 어법을 파괴하는 일탈의 방식을 시도하는데 그 극단적인 경우로 초현실주의 시, 실험시, 아방가르드적인 극도의 난해시 등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주의에서는 인간역사를 지나치게 서열화 계급화로 보고 서로가 투쟁하는 증오와 타도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극단적인 참여시 정치시 이념시 선동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1)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징이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조향, 「바다의 층계」에서
(2)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개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
——김남주, 「다 쓴 시」
시는 강한 감동의 표현이라지만 인용한 두 시는 너무나 극단적이고 대조적이다. (1)의 시는 형식주의 계열로 소위 초현실주의 시인데 전화 도중 생소한 외래어나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의 배열을 통해 비논리적인 자유어를 실험하겠다는 시인데 도대체 독자와 소통이 안 되는 시다. 이 시에서 강한 감동이란 난해성 생소성의 충격적 감정밖에 없다. (2)의 시는 역사주의계열로 참여시 민중시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강한 감동이란 비속어와 증오와 적개심과 편견의 강한 감정뿐이다. “대창에 찔린 개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 도대체 시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물론 그동안의 시가 모두 이런 극단적인 충격을 감동이라 생각하고 이런 유형의 시를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와 예술의 목적을 강한 감동이라 하고 감동의 의미를 보다 강한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해석을 하는 한, 보다 신기하고 기발한 것, 또는 부정적이고 잔인하고 추악한 것을 감동적이고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창조 행위라고 생각하는 한, 이런 극단적인 일탈이나 적개심을 조장하는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시의 근본을 강한 충격이나 충동으로 보는 일부 실험시나 이념시의 파행은 단지 시인 몇 사람 또는 몇몇 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시인들마저 집단적으로 양분되어 우리 문단의 경우는 아예 보수 진보, 좌파 우파란 정치적 이념적 색깔을 가진 집단으로 발전하여 서로가 발작적인 광기를 보이며 대립과 갈등까지 하고 있는데 이쯤 되면 이는 다양성의 자유로운 창조적 감동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패거리 감정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는 운문이다. 운문은 떨림의 문학이다. 시의 떨림은 강한 감동이다. 그런데 강한 감동이라고 하니까 극단적인 충격이나 일탈이나 적개심 혐오감 같은 감정까지 동원하고 집단화까지 하는 이 강한 감동주의 시학의 파행이 과연 시가 운문이고 떨림이라고 하는 근본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강한 감동을 내세워 계속 극단적인 일탈이나 대결이나 투쟁을 하는 것이 문학이나 시의 정도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반드시 특히 한국시단에서 극복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기도 하다.
3. 시는 감동인가 공명공감인가
물론 기존의 사상이나 이념의 프레임(frame)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역사적 순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세계를 주도해온 플라톤 이래 이원론이 아직도 건재하고 다윈의 진화론이나 약육강식의 적자생존론도 있고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도 있고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도 있고 자본주의의 무한경쟁도 있으니 시학에서 감동의 해석이 극단적인 충동이나 투쟁일 수 있고 좌파와 우파로 양극화되는 것도 당연한 순리고 다양성이란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문학이 패를 갈라 경쟁을 하고 감동을 무슨 기발한 충동질로 확대 해석하여 일탈 전복 투쟁 광기 등의 구호를 내걸고 경쟁적으로 극단을 치닫는 이 시학의 혼란상이 진정 문학의 길이고 시의 길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의 근본이 강한 감동 즉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충동행위라고 하는데 이런 강한 감동 작용이 정말 오늘날 양자과학이 보여주고 있는 우주의 근본이치에 맞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실 양자과학에서 보면 최근까지 인간들이 조작한 각종 이념 사상 이데올로기라는 것들은 모두 고전과학시대나 행세했던 낡은 몽상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미개한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미망에 얽매어 이전투구하는 현실 속에서 극단적인 강한 감동론의 파행이 모두를 파멸로 이끌지 모른다는 막다른 지점에서 평생 시학을 탐구해 온 필자는 우주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되는 양자역학이란 정말 경천동지할 새로운 우주의 이치를 만나면서 기존의 인문학은 물론 기존의 시학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립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파동의 우주와 파동의 시학』이란 대 주제를 설정하고 양자역학의 원리와 시학을 비교분석하면서 최근 시학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중에 문학의 목적이나 기능, 시의 목적이나 기능 그리고 시를 구성하는 리듬이나 메타포의 존재이유 그 궁극적인 존재이유는 이제 강한 감동이 아니라, 그런 격한 감동을 넘어 오히려 공명 공감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분명해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고전물리학 시대에는 물질과 정신을 나누고 육신과 영혼을 나누고 선과 악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나누고 우주와 인간을 나누는 이분법이나 이원주의가 중심사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시적으로 보면 만물은 저마다 독자성을 가진 개체로 보였고 크고 작게 보였고 무겁고 가볍게 보였으며 태양계의 운동을 보니 질서정연한 순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양자역학으로 밝혀진 우주의 근본은 인간이나 물질이나 하늘에 무수한 별이나 심지어는 인간의 세포나 정신이나 감정이나 모두가 92개의 원자들이 다양하게 연결된 양자 얽힘의 매트릭스, 즉 그 물망 같은 연결체라는 것이며 이들은 전자기파라는 에너지 즉 파동을 방출하여 서로가 결합하거나 충돌하면서 이웃 원자들과 결합하여 분자를 만들고 물질을 만드는데 그들의 목표는 모두가 공명(共鳴)이라는 이상적인 짝 맞춤의 결합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양자과학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주만물은 모두 파동이다. 그런데 이들 파동은 저마다 구성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고유한 파장이나 주파수가 다르고 그래서 고유한 모양이나 색깔이나 성질이 있는 개별적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우주만물은 서로 다른 주파수를 발동하고 서로 충돌하며 사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주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파동치며 몸을 흔들어대는 것은 자신의 파장이나 주파수와 맞는 짝을 찾기 위해서다. 같은 파장이나 주파수끼리 만나는 상태를 물리학에서는 보강간섭(補强干涉)이라 하는데 이리되면 같은 파장과 주파수의 겹친 만큼 그 힘 또한 배가된다. 이런 현상을 과학에서는 공명(共鳴)이라 한다. 반면 파장이나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들이 만나면 충돌과 파괴가 일어나 오히려 에너지들이 모두 상쇄된다. 이를 상쇄간섭(相殺干涉)이라 한다. 그래서 모든 원자들은 보강간섭의 공명 상태를 꿈꾼다.
왜 원자들은 둘 이상이 합쳐서 공생 공명하고자 그렇게 파동치며 몸을 떠는가. 원자들도 홀로 있으면 이들도 외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옥텟 규칙(octet rule)이란 것이 있다. 원자의 최외곽 전자들은 8개로 채워져야 안전한데 어느 원자도 최외곽의 전자들은 8개가 아니다. 놀라운 조물주의 창조섭리다. 이에 전자들은 8개를 채우고자 다른 원자들과 결합하여 안정을 취하고자 모두가 온몸을 흔들며 파동친다. 이렇게 모든 원자들은 조건이 맞는 다른 원자들과 짝을 채워 공존하기를 원한다. 공명상태가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생존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모두 개성이 다르다. 그런데 그중에 뜻이 맞고 마음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게 천생연분이고 단짝이고 연인이고 지기지우고 동지다. 그런데 물질이나 인간이나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니 딱 맞는 주파수끼리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인간이나 원자나 주파수가 맞는 짝을 찾아 헤매는 것이 공통의 운명이다. 안 되면 짝이 맞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왜 딱 맞는 짝이어야 하나. 짝이 맞아야 힘이 배가되어 엔돌핀이 나와 생기가 나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살맛이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물의 기본인 원자나 인간이나 모든 만물은 딱 맞는 최고의 공명상태가 꿈이고 그래서 공명 공감은 원자나 만물이나 인간이나 시학이 끝내 이룩해야 할 마지막 목표가 된다.
4. 감동의 시학에서 공명 공감의 시학으로
그렇다면 시학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시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가. 그 좋아한다는 감정의 진의가 무엇인가.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동안 전통적인 시학에서는 이를 강한 감동(感動)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시나 음악을 좋아하는 진의가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는 정도뿐인가. 정말 연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만나면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는 것이 전부인가. 그보다는 시라는 언어의 주파수와 음악이라는 소리의 주파수가 내가 좋아하는 주파수와 딱 맞기 때문이 아닌가. 애인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와 나와 몸과 마음과 뜻이 딱 맞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말이나, 주파수가 서로 잘 맞는다는 말이나, 몸과 마음과 뜻이 딱 맞는다는 말은 모두 오늘날 과학이 말하는 공명상태라는 말과 같은 원리가 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좋아한다는 이 감정을 기존의 시학에서는 주로 강한 감동이라 했다. 여기서 공명(共鳴)과 감동(感動)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서 감동이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특히 시나 예술에서는 보다 깊은 마음의 움직임, 보다 큰 마음의 움직임이라 했는데 이를 양자과학적으로 말하면 보다 강한 파동과 파동들의 충돌 현상이란 말이 된다.
원자나 언어나 시나 모두 파동이기에 이 우주공간에서는 일단 발동된 파동은 다른 파동들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충돌의 양상은 강대강 강대약 약대약이 될 것이고 논리적으로 보면 강대강이 가장 강한 감동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강대강의 강한 파동의 충돌은 일종의 흥분상태다. 흥분상태는 만족감도 있지만 울분 증오 광란도 있다. 이러한 격한 감동의 과열은 건강한 엔돌핀이 아니라 마약중독 같은 도파민의 과잉으로 파괴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나 목적이 이런 울분 원망 증오 같은 광기도 가능하다는 집착이 이념주의 상업주의 실험주의 등에서 계속 오용되고 있다. 그래서 작금의 시단엔 증오의 시 선동의 시 괴팍한 난해시 저질시 같은 황당한 시적 파행들이 시는 보다 강한 감동이란 이유로 활보하면서 시의 근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나 예술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감동이란 미명하에 온갖 선동 자기도취 안하무인의 파행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같은 논리다.
그런데 원자들이 언제나 떨면서 다른 원자들과 접촉하는 것은 단지 둘이 부딪쳐 순간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동(感動), 즉, 일시적 충돌이나 흥분, 바로 상쇄간섭의 분열과 파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수많은 주파수의 파동들 중에 딱 맞는 주파수를 만나 강한 시너지효과를 내는 보강간섭의 공명(共鳴) 상태, 바로 함께 어울려 함께 울며 함께 떨며 함께 춤추며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가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화학(化學, chemistry)인데 이는 원래 ‘함께 주조하다’라는 뜻이며 그러기에 과학에서는 화학과 공명을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도 수많은 인간들과 부딪치는 과정에 그래도 그중 몸과 마음과 뜻이 딱 맞는 짝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며 행여 맞지 않으면 서로 주파수가 맞도록 노력하면서라도 마침내 둘이 하나가 되어 함께 동행하며 함께 행복을 나누며 살고자 하는 이치와 같다. 이는 시학의 원리도 같은 이치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존의 시학에서 시의 목적과 기능을 강한 감동(感動)이란 말로 한정하는 데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시는 강한 충동이나 흥분이나 자기도취나 환각이나 극단적인 경쟁이나 대결이 아니라, 아니 그런 감정을 넘어 같은 감정의 주파수를 만나 함께 울고 함께 떠는, 공명(共鳴), 공감(共感)의 상태, 화학의 상태, 둘이 하나가 되는 일심동체(一心同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그리하여 시인 작품 독자가 더불어 얼싸안고 춤을 추며 영혼의 자유로운 해탈과 구원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는 강한 감동이라는 이유로 극단적인 혼돈을 야기하는 그런 감동의 시학론에서 이제는 공명 공감의 시학론으로 대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이번 양자역학과 시학을 비교 연구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놀라운 시학의 도요 우주만물의 도요 인생의 도가 된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부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인용한 두 시는 모두 김춘수의 작품이다. 전자인 「처용단장」은 이른바 무의미의 시인데 이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유발하는 미묘한 감각적 심상을 시도한 충격의 시다. 내용을 보면 여름에 죽은 물새가 겨울에 울고 있다. 겨울에 비가 온다. 바다가 없는 해안선에 한 사나이가 죽은 바다를 들고 온다는 것이다. 모두 정상적인 언술이 아니다. 생소하고 낯선 충격의 언어유희다. 이해 불가한 난해시다. 그러니 함께 울고 함께 떠는 공명 공감의 시가 아니라 시인 혼자 흥분하고 혼자 떠는 시너지효과가 없는 자가 충동적 감동의 시다.
그런데 작품 「꽃」은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 애송시다. 이 시가 성공한 핵심은 무엇일까. 기존 평자들은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갈망이라 했다. 자기 존재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양자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1연은 누구와의 관계나 관심이 없을 때는 비확정적 존재 바로 파동상태의 불안한 존재란 말이 된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가 그것이다. 사실 모든 만물은 파동이다. 왜 홀로 떠는가. 외롭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비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정한 원자의 파동들은 자기와 짝이 될 주파수가 맞는 이웃 원자들을 찾고자 손을 흔드는 것이다. 2연은 이 욕망의 성취를 잘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이는 그에 대한 관심 관찰 상상을 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기서 꽃이 되었다는 말은 파동이 입자가 되었다는 양자역학의 관찰자효과와 같은 원리다. 비확정적 존재가 확정적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산소와 수소가 합하여 물이 된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된 것이다. 바로 함께 울고 함께 떨며 함께 춤출 수 있는 꽃의 상태, 공명(共鳴) 공감(共感)의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만물은 파동의 주파수를 맞추어 최고의 공명 공감 상태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3연의 간절한 절규가 그것이다. 그러니 김춘수의 「꽃」은 기발한 충동을 시도한 「처용단장」의 감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우주만물의 이상적인 생존 원리인 공명(共鳴) 공감(共感)의 진리를 잘 드러내고 있기에 모두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좋아하는 시, 국민 애송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춘수의 「꽃」을 보면 진짜 시가 무엇인지, 시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존재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는 시학이 가야 할 바른길이 분명하게 보인다. 시나 예술이 창조한 특별한 리듬이나 이미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우주만물의 파동들이 그렇듯이 그저 생소한 격정적인 또는 일방적인 파동들의 일시적인 충격이나 흥분이나 열광이나 투쟁이나 선동과 같은 격한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동의 파동을 넘어서 마침내는 둘이 하나가 되고 변화되고 새롭게 거듭나는 바로 꽃으로 승화되는 공명 공감의 행복한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학문이나 인생의 존재 이유나 목적은 강한 감동이란 이유로 충격이나 흥분이나 광기나 발광의 악순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격한 감동을 넘어 함께 떨며 어우러지는 공명 공감의 경지, 종교적으로 말하면 절대자와 하나가 된 충만함이나 법열의 경지, 그래서 영혼까지 치유되고 구원받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와 우주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