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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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문외한인 나는 가끔 미술작품에서 진하게 문학을 느낄 때가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내 눈에 하릴없는 문학작품이다. 대상 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경산수화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르다. 진경 산수화의 화폭에는 무한한 이미지가 숨쉬고 있다.
남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눈에 띄는 대목들을 창작 노트에 꾸역꾸역 옮겨 적는 습관은 오래 되었다. 그들의 설득력 있는 지혜와 발견을 내 안에 잡아두려는 심사였다. 많은 작가, 철학가, 사상가의 생각들로 채 워져 있는 노트지만 알고보면 단순하다. 내가 알고 싶고 듣고 싶은 것 만 옮겼다.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종이 운동장이다. “우리의 눈은 벌 거벗은 감관이 아니다. 자신이 보려는 것을 본다. 세계는 나의 시야 밖 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누군가의 말도 옮겨 적었다.
지천명을 한참 넘어 수필창작을 시작할 때였다. 인문학에 대한 배움 의 허기가 갑자기 심해졌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 사람이 무엇인지 몰라 허둥대기는 나이 들수록 더해지는 것 같았다. 동서양의 인문학 고 전강의실을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오늘의 포스 트모더니즘까지, 그리고 동양의 유학과 노장사상을 주마간산으로 지나왔다. 박물관의 전시품 구경하듯 겅중겅중 스쳐 가는 시간들이었기에, 나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무정차 통과하기도 했을 것 이다.
공맹(孔孟)의 유학은 선명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삶에서 체험하 는 일상적 세계였다. 반면 노자의『도덕경』은 인식의 대상이라기 보다 상상으로 짚어보는 이미지의 세계였다. 자연이라고 부르든 도(道)라고 부르든, 노자는 유가에서와 같은 명료성으로 말하지 않는다. 『도덕경』 의 언어는 모호했다. 애매모호성 앞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모 아들인 창작노트 안에 노자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성주의에 기울어진 삶은 젊은 이들의 것만은 아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고 했던가. 언제부터인가 창 작노트의 두께를 키우는 일에 신명이 나지 않는다. 30년 수필창작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내가 빌려온 남들의 생각이 모두 판에 박은 듯 나와 똑같았다.
공맹의 선명성보다는 노자의 습명성(襲明性)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것 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길은 길에 연해 있다지만 똑같은 길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몸담고 살아온 지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해체 철학의 해체정신이 이처럼 피부로 스며든 경험은 없었다. 나이 팔십 넘 어 겪는 이 변화는 만일 내가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났더라면 경험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의식의 변화는 의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성주 의에 갇혀 있던 내가 어느 순간 생각의 틀을 빠져나오는 데에는 시절인 연이 없지는 않았다. 동양철학자가 아닌 서양철학자 한 분의 노자강의 였다. “노자의 자연이 인간 행복의 근원임을 25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야 인식되기 시작하니 인간이란 얼마나 늦된 동 물인가”라고 탄식하는 서양철학자의 회오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일편단심 이성주의에 갇혀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죽비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이성적 질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 니다. 질서란 인간의 요구적 개념일 뿐 자연의 영역이 아니잖은가. 매 순간 본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본능이 곧 본성 인 동물은 겪지 않는 갈등이다. 지킬과 하이드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항상 공존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적 상황이다. 목적론적이고 이성적 인 유학에 비해, 노자의 도학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태어났다. 노 자철학을 실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역설로 들리지 않는다. 『도덕경』은 현학(玄學)이 아니라 사실학이라는 주장이 어색하지 않다. 노자의 자연 은 문화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문화를 자연 속에서 해체할 뿐이다.
‘밝음을 천으로 싸서 밝음의 광도를 줄인다’는 습명의 도는 기실 예 술이 추구하는 창작기법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선명보다는 습명에서, 사경산수화보다는 진경산수화에서 더욱 진한 예술을 느끼는지 노자에 게서 그 답을 얻고 있는 것이다. 어둡지 않으면서 어둠과 밝음 양쪽을 다 외면하지 않는 빛. 명암의 이중성을 동시에 담고있는 새벽빛 미명 (微明)이 노자의 습명이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명암의 이분법적 이성으로는 분별할 수 없는 애매모호 성이 자연이다. 그리스 플라톤 이후의 이성철학을 바닥부터 해체한 오 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노자와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자연이 인간의 영혼을 거쳐 나오면 예술이 된다”는 잠언은 가장 짧은 예술론이다.
삶에서도, 창작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밝은 빛 아래서 명료하게 표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표현이 명료할수록 소통이 효과적이라고 믿었 다. 그것이 얼마나 불분명한 표현이 될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밝 기만 한 이성주의의 인문학에서 배움을 멈추지 않고, 노자의 애매모호 한 습명의 도가 나타날 때까지 고전인문학 교실을 떠나지 않은 것은 내 인생에서 잘한 일 중 하나였다. 내 영혼의 시선이 이토록 진경산수화에 꽂히는 노경(老境)은 예측하지 못했던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