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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기다림처럼 첫문장을 기다렸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박미경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이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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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아, 미경아. 겁에 질린 건넌방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등학교 4학년, 나의 여름방학 일기 첫 대목이다. 개학 후 수업시간
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세우고 일기를 칭찬하시던 장면은 내 생의 신화 적 순간일지 모른다.
그날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고 놀란 아주머니가 혼자 있던 나를 확인 하느라 혼비백산하던 날의 일기를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도둑을 잡았 는지 어떤 물건을 훔쳐갔는지 이후의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선생님이 읽어 준 이 첫 문장이 수십 년이 지났어도 또렷이 생각나는 것은 신기 한 일이다.
일과를 나열하는 여느 초등생들의 일기와는 달리 그날 있었던 특별 한 일을 택해 긴장감 있는 한마디로 시작한 첫 문장은 수필 작법에서도 매우 요긴한 팁이고 보면 어린 날의 내 무의식엔 제법 문학의 기교가 깃들어 있던 걸까.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일종의 신탁처럼 내 가슴에 서 자라고 있었다.
8남매의 막내인 나는 오빠가 다섯이었다. 나이 차가 많아 오빠들과 함께 놀던 추억이 없지만 문학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젊은 날 세상을 떠난 넷째오빠로부터 비롯되었다.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로 어두운 다 락방에서 무언가 읽고 또 쓰던 고등학생. 창가에 비밀처럼 쌓여 있던 『현대문학』을 그곳에서 처음 보았고, 오빠가 노트에 깨알처럼 적어 놓 은 글들을 몰래 읽곤 했다. 그러나 오빠와 문학의 인연은 오래 가지 못 했다.
궁핍한 삶과 대학 실패,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책임감은 오빠를 다른 삶으로 몰고 갔다. 법전과 씨름하며 공무원이 됐으나 무언가를 펼쳐보 지도 못하고 서른 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돌 지난 아들과 젊은 아 내, 이룰 수 없는 꿈인 문학을 지상에 남겨둔 채. 그때 나는 대학 1학년 문예창작과 학생이었다.
오빠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책장 한구석에 바랜 문학지 몇 권과 습작 노트를 발견했을 때, 올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방 속에 넣었다. 오빠 의 숨겨진 꿈은 내가 간직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소 설을 써보기 시작했다.
최인훈, 정현종, 김병익, 홍신선 등 문단의 큰 스승 밑에서 문학 공부 를 했으나 당시에는 그분들의 거대한 그늘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청춘 의 열정과 불안한 미래의 통과의례를 치르며 문학의 언저리에서 방황 했던 시절이었다.
작가 박범신은 문학을‘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했던가. 프 랑소와즈 사강은‘문학이란 모든 것이다. 최상의 것이며 가장 나쁜 것 이며 운명적인 것’이라 했다. 쓴다는 것에 대한 찬란한 광증이야말로 나의 스무 살을 걸 만한 무엇이라고 여겼다. 맹렬한 창작에의 욕망, 삶 의 진수 같은 것에 눈뜨고 싶던 열망으로 밤이면 일어나 책상 앞에 앉 았다.
그런데 나는 졸업작품으로 썼던 1인칭 단편이 문예지의 선(選)에오르지 못하자 모 여성지의 수기 모집에 투고, 당선함으로써 교수님께 더 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 드렸다. 순전히 스무 살의 객기로 이루어진 사 건 이후로 소설은 내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졸업 후 당시 문학도들을 많이 배출했던 학생지 학원(學園)출판사에 입사시험을 치렀다. 경쟁률도 만만치 않았고 필기와 실기, 면접에 이르 는 3차 관문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여 의기양양했지만 입사 후 회식 자리에서 놀라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나의 상식 필기 점수는 40점이었다. 60점 이하는 무조건 불합격임에 도 불구하고 작문 실기에서는 유일하게 심사의원 전원의 최고점을 받 은 문제적 인물이 있었으니 붙이냐 마느냐 오랜 회의 끝에 살아남은 주 인공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학원출판사 주간이었던 권오운 시인의 안 경 너머 날카로운 눈총을 받으며 더욱 분발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옮긴 직장은 여학생(女學生) 잡지사였다. 여학생사 기자 출 신인 전설의 이름—— 김수현, 양인자, 강석경 들의 후배라는 자부심에 들떠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며 날아다녔다. 삼청동 다람쥐라는 별명을 얻은 시절이기도 하다. 잡지사의 일은 나와 잘 맞았다. 주로 인터뷰를 맡았는데 각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풀 어내는 작업이 무척 재미있었다.
기획안과 편집회의, 철야, D-day, 쫑파티 여전히 향수를 일으키는 단 어들과 함께 한 세월은 열애의 달콤함만을 느끼기엔 지루한 시간이었 던 걸까. 남들의 얘기를 지치도록 쓰면서,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이야 기를 하고 싶었다. 일기로는 부족했던 고백들, 내면에 쌓여 있던 어떤 앙금과 상처, 고통과 사랑, 행복과 불행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그 렇게 만난 것이 수필이다.
결혼 후 편안해진 일상과 감성으로 주부백일장에 나가 수필을 썼고 운이 좋게도 장원을 받는 바람에 수필에 대한 나의 오해는 깊어졌다.
적당한 통속성과 감성, 손가락 끝으로 쓸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수필 공부를 시작하면서 윤오영, 피천득, 김태길, 이양하,
김소운 등 그들이 이룩해 놓은 수필의 세계에 일상의 장식처럼 안주하 려 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1993년『월간문학』의 등단을 거쳐 ‘수필가’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잠시 황홀했다. 폭우 속에서 만난 남편과의 인연을 소재로 썼고, 김병권·유혜자 선생님이 심사를 해주 셨다.
수필 문단에서 30대 후반의 등단은 매우 젊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필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관념적이거나 관조의 미 를 강조한 전통 수필, 감성으로만 일관한 서정 수필을 구시대적으로 받 아들였다. 권위적이거나 신변잡기거나 한 수필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뜻을 같이했던 지연희, 김수자, 김경실, 권남희 등 수필계 선배들과‘5인 에세이’라는 동인 수필지를 기획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작가들이 정치 현실을 고민하던『창조』『백조』『폐허』등 의 동인지 활동을 되새김하면서 수필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 함이었다. 몇 차례 지속되지는 못했으나「고백」이란 테마 수필로 엮어 인간 본성을 탐색했던 시도가 기억에 남는다.
잡지사에서 인터뷰 기사를 쓸 때 인터뷰이의 스토리를 듣고 나면 가 장 인상적이고 압축된 한 단어가 떠오를 때가 많다. 보통 그것이 기사 의 제목이 되곤 하는데 나는 그 경험을 수필에 도입하여 내 수필 주제 를 요약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도 인상적인 첫 문장을 이끌어 내는 데 오랜 시간과 공을 들였다.
이 글의 모두에 밝힌 초등학교 4학년 일기의 첫 대목처럼 첫 문장은 수필을 쓰는 내내 나를 지배했다. 첫 문장은 송곳의 끝과 같아서 첫 부 분에서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면 페이지는 넘어간다. 때로 자 극적이거나 선정적 문장이라도 문학적 형상화로 무장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발표한 작품 뒤에는 늘 감각적이란 평이 뒤따랐 다. 좋은 의미도 있을 것이고 나쁜 의미도 있을 것이다.
2003년 한국문인협회에서 제정한 제1회‘월간문학동리상’의수필부 문에 수필가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반숙자 선생이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모두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듬해 제 2회 수상자에 내 이름이 불려졌을 때는 (사실 나 자신도 무척 놀랐다) 축하 와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등단 10년 차의‘감각파’수필가에게 주긴 너무 큰 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상의 대상은 원로뿐 아니라 신 인을 포함한 기성 작가 모두가 포함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 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수상으로 인해 수필에 대해 빚을 질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필에 몰두하지 못했다. 문학지 편집장을 거치면서도 내 수필보다는 인터뷰 글을 많이 썼다. 지연희 발행인의 배려로『문파 문학』에 10년간‘박미경의 예술탐방’을 연재하고 이어‘작가가 좋아하 는작가’를 2년 정도 쓰다가 결국엔 손을 들었다. 글쓰기의 스트레스에 서 벗어나 이제는 읽는 즐거움만을 누리자 마음 먹었다. 탱자탱자 실컷 놀면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도 문우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 한쪽은 숙제 안 한 아이처럼 불안했다.
“매일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라고 할 수 없다.”그 말이 죽비처럼 내 뒷통수에 내리친다.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나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 수필이었다. 다정 한 문우들의 부추김으로‘데일리한국 월요수필공간’에 다시, 수필을 쓰고 있다.
어쩌랴.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수필마당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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