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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심경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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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까워진 새벽, 안개가 산자락 아래 얕게 깔리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둔덕 위, 쪽밭과 살림집을 품은 공방은 희미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실바람에 쪽대가 길게 흔들렸다.
안개 속에서 정아는 쪽잎 사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쪽의 밑동을 움켜쥐고 낫을 그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벤 쪽이 가지런히 누웠다. 쪽을 베는 일은 해가 뜨기 전에 끝내야 했다. 이 시간이라야 쪽빛이 잎에 머문다. 햇빛을 만나면 빛은 공기 속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오늘은 더울 듯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올해 니람 생산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끝이었다. 다른 해보다 쪽이 잘 자라 생산이 많았다. 앞으로 돋을 새순은 씨를 받아야 했다.
저만치서 남편 석오가 외발수레에 쪽을 옮겨 담고 있었다. 소나무 꼭대기에서 직박구리 한 마리가 요란하게 울었다. 낫질하던 손이 잠시 멈췄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썰물인지 바닷물이 잔물결을 남기며 밀려가고 있었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던 그녀였지만, 어젯밤은 유난히 뒤척였다. 낮에 차를 많이 마신 탓일까, 옷을 주문하러 온 손님 때문이었을까. 손놀림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베어야 할 쪽이 아직 삼분의 일이 남았다.
낫날에 스친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방울처럼 맺혀 벤 자리 위로 떨어졌다. 정아는 왼쪽 중지를 입에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손가락에 맺힌 피를 보자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희윤과 머리채를 잡고 엉켜 싸우던 날이 있었다. 정아가 공들여 손질한 교복을 희윤이 먼저 입고 나가자, 희윤의 데생 스케치북을 아궁이에 던져버렸다. 부엌은 난장판이 되었고, 깨진 사기그릇에 손을 베었다. 자기 손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면서 정아의 눈에 빛이 일었다.
어제 만난 손님이 희윤을 닮아서였을까. 그래서 오늘, 하필 이 새벽에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희윤은 정아의 한 살 위 언니였다. 작업 속도가 더뎌지자, 석오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남은 쪽을 베어냈다. 어느새 쪽은 항아리 옆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옷을 주문한 이는 정아 또래의 중년 여성이었다. 가을 동창 모임에 입을 옷이라 했다. 그 손님은 처음부터 마음이 가지 않았다. 진한 화장에 잘록한 A라인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서 정아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개 수수한 차림의 후덕한 이들이었다. 반면 그녀는 입술과 눈매를 짙게 그려 넣어 날렵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는 어렸을 적 윤이가 세상에 맞서던 그 공격적인 눈빛과 닮았다. 숨겨진 욕망까지 정아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런 손님이 정아는 불편했다.
“제가 만드는 옷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알아요. 그래도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어요. 내년이면 사위를 볼 테니까요.”
지인의 소개로 멀리서 온 손님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지난여름, 그녀가 골랐던 원단은 가을 하늘처럼 푸른 쪽빛 인조견이었다. 정아는 꼭두서니나 치자 빛으로 물든 면을 권했지만, 손님은 처음부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허리를 강조하기보다 겨드랑이 아래로 풍성하게 떨어지는 원피스를 권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은 첫 옷을 찾아 입고, 거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가을 동창 모임에 입을 두 번째 옷으로 귀한 실크를 주문했다. 이번에도 정아가 권한 것은 감물로 염색한 면 원단이었다. 손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아의 옷은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천연 염색의 결을 알아보는 이들은 꾸준히 찾아왔다.

 

벤 쪽을 항아리에 눌러 담고 물을 부었다. 이제부터 발효의 시간이 필요했다. 잎 사이 고인 물에서 엷은 무지갯빛이 스쳤다. 항아리 위에 누름돌을 놓으며 손끝에 서늘한 물기를 느꼈다. 이틀에서 사흘은 그대로 두어야 했다. 앙금이 가라앉으면 짙은 남색 니람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다시 말려 가루로 갈무리하기까지는 손이 많이 갔다. 여린 풀잎에서 푸른빛을 길어 올리는 일이 정아는 좋았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 내년이면 사위를 본다.’
그녀의 말이 묘하게 귓가에 남았다. 화려한 화장과 잘록한 허리선으로 자신을 무장한 여자가, 왜 하필 정아의 투박하고 풍성한 옷을 선택했을까.
정아는 젖은 손을 닦으며 마당 너머 초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님에게 처음 입혔던 인조견의 빛깔과 닮았다. 윤이를 닮은 그 손님이 남색 실크 옷을 입고 동창 모임에 나설 때쯤이면, 그 하늘도 더 깊어져 있을 터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쪽빛 옷감 안에서 조금은 순해질 수 있을까. 정아는 자신이 지은 옷의 바느질 땀 수를 떠올렸다. 화려하진 않지만, 몸을 억지로 가두지 않는 넉넉한 치수가, 그녀의 고단했을 허리를 편안히 감싸주길 바랐다.

 

주문받은 옷을 위해 초벌 염색해 둔 실크를 꺼냈다. 맑은 하늘빛이었다. 손님이 원한 짙은 남색은 한 번 더 물들여야 했다. 정아는 스테인리스 함지박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미리 만들어 둔 니람을 평소보다 진하게 풀고 잿물을 섞자, 표면에 초록빛 막이 피어올랐다. 그 막이 올라와야 색이 들었다. 연한 초록빛의 얇고 투명한 막이 비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신기하다.
어느 틈에 석오가 천을 마주 들어 염액 속으로 풀어 넣었다. 정아는 재빨리 그 천을 양손가락으로 빠르게 접어 물속에 잠갔다. 잠긴 천이 물 밖으로 나오면 얼룩이 생겼다. 함지박 안에 가는 주름 잡힌 천이 개켜 놓은 듯 얌전하게 놓였다. 뒤집어 같은 방법으로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지막에는 양손바닥을 펴서 꾹꾹 눌렀다. 손바닥과 손톱 밑까지 파랗게 물이 들었다. 고무장갑을 끼면 손이 색을 느끼지 못하는 듯 숨이 막혔다.
초록 잎에서 깊은 바다색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색은 한 번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 완고함이 윤을 닮았다. 한여름 손님이 입었던 인조견 옷이 가볍고 바람 같았다면, 이번에 주문한 실크는 묵직한 가을 심연의 빛이어야 했다.
천연 염색은 여러 차례 거듭 물들여야 색이 진가를 발휘한다. 게다가 실크는 솔기를 세 번 접어 박는 깨끼 기법으로 바느질해야 옷 선이 곱다. 손질과 관리도 까다롭다. 손세탁 후 풀을 먹이고 다림질해야 하는 고급 의복이었다. 과연 그녀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정아는 걱정했다. 옷은 결국 주인을 닮는 법이다. 옷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건넬 때마다 그런 보살핌을 부탁했다. 그래야 공력 들인 옷의 품격과 수명이 유지된다.
한 번 담근 염액을 비우고 두 번째 염액을 풀었다. 같은 방법으로 색을 먹였다. 천을 재빨리 뒤집어 가만히 내리눌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기를 눌러 걷어낸 뒤, 공기 중에 힘껏 흔들었다. 염액 속에서 건져 올린 실크는 잠시 연한 연두색이었다. 정아가 두 팔을 들어 천을 털어낼 때마다, 공기가 닿는 찰나, 연두빛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짙은 남색이 차올랐다. 잎이 품고 있던 숨결이 마침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석오와 천을 마주 잡고 흔드는 사이, 공기 속에 숨어 있던 검푸른 빛이 천의 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석오와 정아의 얼굴에 푸른 물이 튀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다. 웃는 동안 무겁게 내리누르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풀렸다. 색이란 억지로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안에 깃든 것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정아는 천을 건조대에 널어 말렸다. 길게 널린 천이 바람을 맞고 팽팽해졌다. 바람에 습기가 흠뻑 묻었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정아의 몸도 함께 가라앉았다. 정아는 갑자기 풀썩 주저앉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소파에 뉘었다. 후드득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온몸이 무지근했다. 속이 뜨겁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비 내리는 풍경을 내다봤다.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젖어 있던 사물들이 햇볕에 몸을 말렸다. 창문을 열고 햇살이 마당에 퍼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한 냄새가 코를 둘렀다. 쪽을 앉힌 항아리 곁으로 갔다. 정아 가슴께에 닿을 만큼 큰 항아리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냄새의 범인은 가운데 항아리였다.
항아리에 앉힌 쪽물은 으레 냄새가 난다. 풀을 베어 눌러 담을 때의 풋내와 며칠 지나 숨이 고여 오를 때의 시큰한 기운이 섞인다. 그 냄새로 정아는 물의 속을 읽어왔다. 오늘은 어느 만큼 색이 우러났는지, 아직 손을 대도 될지를 코끝으로 먼저 알았다.
가까이 가자 낯선 기운이 먼저 올라왔다.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이 먼저 물러났다. 익어 가는 냄새가 아니라, 안에서 먼저 풀어진 냄새였다. 더위에 눌린 풀 더미가 오래 방치되었을 때 나는 냄새와 닮았다. 시큼함 끝에 단단히 맺히는 기운이 없었다. 정아는 누름돌을 비켜 두고 막대기로 천천히 저었다. 거품이 둔하게 갈라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푸른 기색이 비칠 자리에서 탁한 막이 하얀 거품과 함께 떠올랐다. 한 번 더 저어 보았지만 물은 힘없이 돌아앉았다.
올해는 쪽이 유난히 잘되었다. 벤 양이 많아 항아리를 서둘러 채웠고, 물을 넉넉히 잡는 대신 숨이 빠듯했다. 며칠째 더위가 눌러앉아 밤에도 식지 않았다. 어디서 기운이 틀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냄새는, 기다리면 깊어지는 냄새가 아니었다. 손을 잠시 담갔다가 곧 빼냈다. 미지근했다. 살아 있는 물은 손끝을 밀어내는데, 이 물은 잡히지 않았다. 흐물거리는 감촉이 오래 남았다. 석오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버려야 하는 것은 달랐다. 그 차이를 모르는 척하면 다음 물까지 흔들린다. 항아리를 살짝 세워 두 손으로 밀어 마당 끝으로 굴렸다. 낑낑대며 힘들어하자 석오가 정아를 밀어내고 대신 굴렸다. 항아리가 쉽게 움직였다. 흙이 낮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옆의 다른 항아리와 거리가 멀어졌다.
석오가 항아리를 기울였다. 젖은 흙 위로 탁한 물이 번졌다. 끝내 푸른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구릿한 냄새가 마당에 번졌다. 수도 호스로 물이 번져 가는 곳을 씻어내렸다. 정아가 숨을 가쁘게 쉬었다. 목울대까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짚을 넣어 불을 붙였다. 연기가 항아리 안을 핥듯 스쳤다. 그을음이 벽에 얇게 남았다. 정아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방망이를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둥이를 내려쳤다. 둔한 소리가 울리며 항아리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몸뚱이에 가느다란 금이 번졌다. 한 번 더, 다시 한번. 입이 벌어지듯 항아리가 갈라졌다. 조각이 흙 위로 흩어졌다. 정아는 서서 그 파편을 바라보다가, 옆 항아리로 가 누름돌을 조금 더 깊이 얹었다.
석오가 깨진 파편을 들고 나가 마당 한쪽에 무늬를 새기듯 엎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음에는 흙과 동화되도록 자근자근 밟아 다독였다. 어젯밤 비로 젖어 있던 땅이 단단해졌다.
항아리 세 개가 있던 자리에 가운데가 휑하니 비어 허전해 보였다. 정아는 그 자리에 서서 남은 항아리 두 개를 닦고 또 닦았다. 주위를 청소하고 나자 답답했던 가슴이 내려갔다.

 

도로 쪽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길게 울렸다. 대문에 매단 청동 새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우편함에 넣지 않은 걸 보니 등기였다. 석오가 조심스레 우편물을 건넸다.
“여보, 전시회 초대장이야. 처형이 한국에 왔나 봐.”
봉투에는 서울의 한 갤러리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국의 조지아 오키프, 임희윤 초대전: 회귀.’
어디로 돌아오겠다는 것일까. 정아는 초대장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희윤을 지칭하는 ‘조지아 오키프’를 검색해 보았다. 꽃과 잎을 대담한 색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나 정아가 기억하는 희윤의 그림은 달랐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형상들. 잎인지 바람인지, 혹은 희윤 자신인지 모를 형상들뿐이었다. 정아는 그런 희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환기의 그림은 이해할 것 같아. 그런데 언니, 너의 그림은 도대체 뭘 나타내는지 알 수 없어.’
언젠가 정아 자신이 했던 말이 곱씹어졌다.

 

쪽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정아의 가슴속도 울렁였다. 초대장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대표작인지 푸른색과 붉은색이 엉켜 있는 화폭이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초대장을 구겨 쥐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앙다물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초대장을 집어던졌다. 구겨졌던 종이가 펴졌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엉킨 그림 위에 정아의 푸른 손자국이 남았다. 그 위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었겠지. 초대장이나 보내면서… 마른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젖을 찾던 아이의 울음을 알기나 할까.”
혼잣말을 내뱉으며 거실로 들어선 정아의 시선이 벽 한가운데 걸린 아들 한이의 사진에 머물렀다. 한숨을 후 하고 쉬었다. 막혔던 숨이 고르게 퍼졌다. 플루트를 부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흐뭇하게 사진을 쓰다듬던 그녀가 스위치를 누르자 비제의 <아를의 여인>이 흘러나왔다.
정아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소리는 마루를 지나 온 집안으로 흘러나갔다. 쪽잎에 맺힌 이슬이 파르르 떨었다. 작은 그네가 가늘게 흔들렸다. 지독한 발효 냄새와 손톱 밑의 푸른 때조차 잊었다. 음악이 끝나고 마당의 조개무지와 항아리마저 잠잠히 가라앉았다.
고요 속에 정아가 눈을 떴다.
발걸음도 가볍게 마당으로 나갔다. 항아리 속에서 발효한 쪽잎은 제 속의 것을 다 내어준 채 물러져 있었다. 정아는 맨손으로 휘저었다. 힘없이 풀어진 잎맥이 손가락 사이에서 허물어졌다. 껍질은 남기고 물기만 남았다. 그 질척한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아이의 팔꿈치가 그랬다. 밤이면 긁고 또 긁어 피가 배어 나오던 살결. 하얀 잠옷 소매에 번지던 붉은 자국. 도시의 겨울은 메마르고 차가웠다. 보일러는 밤새 돌았고 창문은 늘 닫혀 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터진 볼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아이는 쉬지 않고 울었다. 목이 쉬었다.
병원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코가 매웠고, 의사는 덤덤하게 ‘만성’이라는 말을 꺼냈다. 연고를 바를 때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간지러워. 따가워.”
작은 등이 들썩일 때마다 부모의 속도 함께 무너졌다. 읍에서 성황이던 한복집은 그해 문을 닫았다. 봄가을이면 예복과 예단 이불로 불을 밝히던 가게였다. 아이의 베개에 핏물이 고이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부모는 지장수로 아이를 씻기고 부드러운 면에 쪽이나 황토를 물들여 입혔다. 도시의 소음이 끊기자 아이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다. 긁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항아리 속에서 삭은 잎을 건져 올리며 정아는 생각했다. 제 몸을 녹여야 빛이 나온다. 겉은 허물어져도 물속에서는 다른 숨이 고인다. 정아는 고개를 들었다. 마당 끝 가마 앞에 석오가 서 있었다. 예전엔 부모님이 서 있던 자리였다.
쪽 염색집에선 석회도 넉넉히 구워두어야 했다. 굴껍질은 밤새 불길을 견뎠다. 가마 문을 열던 날, 희끗한 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질 듯 가벼웠으나 속은 아직 뜨거웠다. 석오는 말없이 그것을 빻았다. 빛은 홀로 태어나지 않았다.
가마의 불이 식은 뒤에도 마당에서는 또 다른 불이 피어올랐다. 볏짚, 콩대, 말린 쪽대잎 묶음에서 연기가 낮게 드리웠다. 불길은 성급하지 않았다. 타고 무너지고 다시 사그라들며, 결국 가벼운 재만 남겼다.
정아는 재를 체에 쳐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었다. 하룻밤 지나자 탁한 것들은 가라앉고, 윗물만 조용히 맑아졌다. 죽은 자리에서 다시 힘이 고였다.
정아는 쪽 껍질 건져낸 항아리에 소석회를 적당히 부었다. 당그레로 천천히 공기를 불어 넣었다. 수면 위로 보랏빛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장인들은 그것을 쪽꽃이라 불렀다.
정아는 그 귀한 꽃이 사그라지지 않게 조심스레 공기를 먹였다. 보랏빛 거품이 천천히 부풀었다. 한참을 저었다. 아침저녁으로 몇 번 더 당그레질을 하면 감색이 깊어질 것이다. 윗물을 따라내자 앙금은 묵처럼 되직하게 가라앉았다.
정아는 항아리 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올해 마지막 니람이 생산된 것이다. 작은 김치통으로 한 통 분량이었다. 뿌듯했다. 올해의 니람 작황이 좋았다. 날씨가 한몫했다. 봄날 날씨가 좋은 날을 가려 수분을 증발시켜 오래 보관할 가루를 만들 것이다. 가끔 먼 지방에서 보관상 불편하다며 쪽 가루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건조장으로 나가 널어놓은 실크를 만졌다. 색이 알맞게 들었다. 정아는 쌀가루를 고운 체에 쳐서 멍울 하나 없이 매끄러운 풀을 정성껏 쑤었다. 부드러운 풀물이 천의 씨줄 날줄 사이사이 속속들이 스미도록 면보자기에 감싼 천 위에 올라섰다. 맨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서늘하고 눅눅한 감촉은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듯했다. 한이가 정아의 다리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파고들던 날들이 떠올랐다. 구부려 다리 사이를 휘저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웃음이 잠깐 스쳤다. 일반 방망이보다 가늘고 긴 명주 다듬이 방망이를 들었다.
똑, 또또똑. 집 안에 가벼운 소리가 흘렀다. 그 박자는 풀피리에서 아코디언을 거쳐 플루트로 이어졌었다. 아들의 호흡과 방망이 소리가 마당의 공기 속에서 겹쳐졌다.
방망이가 천에 닿을 때마다 둔탁하던 울림이 차츰 맑아졌다. 결이 펴지고, 숨이 트이고 빛이 길을 찾았다. 손목으로 반동을 받아내며 정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침내 한 벌을 지어도 모자라지 않을 빛이 천 위에 고였다.
손님의 치수와 옷의 디자인을 적은 종이를 벽에 붙였다. 체형을 머릿속에 그리며 마름질을 시작했다. 티 하나 없이 짙은 남색을 고집한 손님이 떠올랐다. 가위를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천 가장자리 가윗밥이 크게 앉았다. 잠깐 한눈을 팔면 일어나는 실수였다. 그래도 옷을 입을 이를 생각하며 바늘을 들었다.
가끔 천연 염색 수제품의 묘미를 아는 단골은 염색 중 드문드문 생긴 오점조차 좋아했다. 그것을 자신만의 무늬라 여겼다. 가위 날이 실크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졸업 기념 패션쇼가 떠올랐다.
빠른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이 젊음의 빛이었다. 정아는 다른 급우들과 달리 남자 모델 상호를 세웠다. 청남색 슈트에 연청 셔츠. 다른 동기들이 드레스를 펼칠 때, 그녀는 몸의 힘이 드러나는 선을 택했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넘쳤다. 피날레 팡파레가 터졌다. 런웨이 끝에서 상호와 손을 맞잡고 걸어 나왔다. 그 소리 너머에 희윤이 서 있었다. 희윤은 늘 한발 늦게 손을 뻗었다. 정아의 인형을, 먼저 꾼 꿈을, 곁에 선 사람을.
아들을 낳은 지 열흘 후. 희윤은 유학길에 올랐다. 남은 건 부모님과 정아 몫이었다.

 

가위가 또다시 실크를 밀고 나갔다. 실크의 결은 곧게 뻗어 마치 오래 견뎌낸 등처럼 단단했다. 금속 감촉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손님의 어깨와 걸음 속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선을 그었다. 정아는 빛보다 결을 믿었다.
정아는 마름질한 천을 작업대 위에 짝을 맞춰 펼쳤다. 상의 앞판, 뒤판, 오른쪽 소매, 왼쪽 소매. 굵은 실로 시침을 했다.
서울의 의상회사에서 정아는 계절을 숫자로 배웠다. 색은 코드였고, 원단은 단가표에 적혔으며, 작업실엔 먼지가 떠돌았다. 합성섬유를 자를 때마다 가위 끝에서 마찰음이 났다. 형광등 아래 색은 정확했지만 차가웠다.
정아는 목과 팔목 언저리를 긁었다. 허벅지 안쪽이 따끔거렸다. 정아는 일정표에 맞춰 옷을 만들었다. 트렌드는 빠르게 지나갔고, 다음 시즌의 팔레트가 곧바로 덮쳐 왔다. 완성된 샘플은 마네킹에 입혀졌고, 수정 지시가 빨간 펜으로 덧그어졌다. 색은 선명했다. 오래 머물지 않았다.

 

TV 문화 뉴스에 ‘회귀’ 전시가 소개되었다. 블론드빛 머리를 늘어뜨린 희윤이 화면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열흘 만에 떠난 그 얼굴이었다. 이제는 돌아와 색을 던지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하얀 벽에 관람객이 콩주머니를 던지자, 툭 터진 풍선에서 오색 물감이 흘러내렸다. 풍선 위 ‘회귀’라는 글씨가 흐물흐물 번졌다. 조명이 그녀를 둥글게 감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정아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무엇을 터뜨릴까.
TV 맞은편 벽에 걸린 희윤의 플루트 사진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감싼 손과 아이의 숨 고르기. 소리는 보이지 않아도 스며든다.
어머니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색은 배어 남는 것.’
쪽잎이 몸을 녹여 빛을 내듯 요란하지 않아도 남는 시간이 있다고.

 

시침질이 빨라졌다.
손님은 동창회보다 사윗감을 만나는 날이 앞당겨졌다고 했다. 그날 입고 가야 한다고 했다. 굵은 시침실이 촘촘히 얽힌 남색 투피스를 입은 마네킹이 두 팔을 비워 둔 채 서 있었다. 정아는 주문서를 펼쳤다. 목 언저리에 가는 선을 덧그렸다. 갈색 머플러였다. 같은 색 손누빔 가방을 마네킹 팔에 걸었다. 차가운 남색의 혈색 없는 옷을 걸친 마네킹이 사람의 온기를 입었다.
재봉실 문 앞에서 손님이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한번 고였다가 조용히 풀렸다. 입술 색이 옅었다. 손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생쪽물을 구할 수 있을까요?”
“네? 어디에 쓰시게요?”
“사실은 제가 속에 열이 많대요. 그런데 쪽물을 마시면 열이 삭는대요.”
“쪽은 찬 성질이라 여자에게는 별로예요.”
손님은 무안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정아는 회사에서 일할 때 항상 붉게 달아 화끈거리던 얼굴, 손목을 긁던 때가 기억났다. 손님을 위해 쪽물을 주어도 괜찮을까. 망설여졌다. 손님을 대문 앞에서 배웅했다. 손님 차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님을 보낸 뒤 정아는 재봉틀에 앉았다. 시접을 세 번 접어 깨끼로 마감했다.
치마 단과 소매단에 홍시 몇 알을 수놓았다. 비로소 한 벌이 되었다. 다리미로 솔기를 눌러 마지막 손질을 마쳤다. 손님의 옷에 가을이 흠뻑 묻었다. 감색 머플러도 풀을 옅게 먹여 다리미질을 했다. 다리미 발을 받은 머플러에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가방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갈색 가죽가방을 들라고 말했다. 정아는 옷을 고이 접어 포장했다. 쪽물 대신 지장수 한 병도 따로 준비했다.
막 포장이 끝났을 때였다. 마당을 스치는 바람 사이로 플루트 선율이 번졌다.
<아를의 여인>이 낮게 흘렀다. 한이의 전화였다.
“엄마, 임희윤 화가, 이번 ‘회귀’ 전시회 한 분, 이모 맞죠?”
대답 대신 정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년 미국의 전시회에 오프닝 연주를 부탁했어요. 가도 돼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한이의 가쁜 숨결에 정아는 말없이 그 순간을 함께 느꼈다. 해외 초청 연주를 처음으로 받았다는 마음 벅참이 그녀에게도 전해졌다.
정아의 시선이 마당 끝 쪽밭으로 옮겨 갔다. 발그레한 쪽대 꽃봉오리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지던 자리였다.
“정식 초대장을 받고 가렴.”
짧았지만 단호했다.
어린 한이가 열에 들떠 울던 밤이 떠올랐다. 목덜미가 달아올라 손을 대기 어려웠다. 아이는 잠결에도 등을 긁었다. 정아는 쪽물을 보자기에 적셨다. 푸른 기운이 배어든 천을 아이의 등에 올렸다. 처음엔 더 울었다. 이내 숨이 조금 길어졌다. 식은 물이 다시 데워지면, 정아는 다시 적셔 올렸다. 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아침이 되면 아이의 뺨이 한결 옅어졌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정아는 항아리 앞에 서서 이번에도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채 항아리를 씻었다. 차가운 물이 손가락 사이를 흘렀다. 어머니가 황토를 풀어 지장수를 만들던 기억이 스쳤다.
그 물을 한이에게 먹이고, 살갗이 터져 피가 맺히는 등을 씻기던 밤들이었다. 열이 오른 아이가 그네 위에서 말갛게 웃으며 “엄마” 하고 부르던 순간, 쪽물을 들인 옷을 입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작은 등이 햇빛 아래 반질거리던 모습이 겹쳐졌다. 회사를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날도 결국 이 아이 때문이었다.
마당을 돌다 한구석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초대장을 발견했다. ‘회귀’라는 제목이 적힌 종이를 한참 내려다본 뒤, 정아는 그것을 주워 구겨진 자리를 펴고 먼지를 털어냈다. 오래 앞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갤러리 장소가 희윤과 함께 살던 자취집 언저리였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제법 큰 곳이었다.
전화기를 몇 번 눌렀다 껐다. 그리고는 초대장을 항아리 옆 소석회를 담아 둔 나무 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어느 틈에 항아리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석오가 구해다 빈자리를 채워 놓았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종이를 흔들었다. 정아는 작은 돌을 가져와 그 위에 눌러 두고 돌아섰다. 석오가 땅속 깊은 데서 황토를 구해왔다. 새벽에 뒤꼍 샘에서 길어온 물에 황토를 걸러 풀었다. 이 지장수는 목을 많이 쓰는 한이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짙은 감색 슈트를 입고 무대 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한이의 모습이 정아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창고 서랍을 열었다. 차곡차곡 쌓아 둔 원단들 사이에서 오래전에 갈무리해 둔 실크 한 필을 꺼냈다. 특별한 날을 위해 남겨 두었던 천이었다. 함지박에 물을 받아 주물러 흔들자 묵은 기운이 빠져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련을 마쳤다. 어느새 석오가 옆에 와서 정아를 도왔다. 염액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백색의 천이 물을 머금었다.
담그고 건져 올리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하자 천 위에 연초록빛이 떠올랐다. 석오와 천을 맞잡고 털었다. 출렁이며 흔들리는 천 사이를 바람이 드나들었다. 산화했던 색이 돌아와 겹을 이루며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색은 점점 깊어졌다. 연둣빛이 파랑으로 변해 갔다.
마침내 검은 듯한 감색이 천 위에 고였다. 젖은 실크를 건조대에 널자 푸른 물방울이 흙 위로 떨어졌다. 정아는 그 아래 잠시 머물며 바람에 출렁이는 천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쪽밭으로 나가 씨 맺은 쪽대 하나를 꺾어 손에 올렸다. 잘 여문 씨앗이 손금 사이로 굴러내렸다. 몇 알은 흙으로 떨어졌지만 허리를 굽혀 주워 담지 않았다. 발끝으로 흙을 조금 밀어 씨앗 위를 덮었다. 숨이 막히지 않을 만큼 얇게 덮었다.
정아는 손에 남은 씨 몇 알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내년을 위해서인지, 아직 오지 않은 다른 봄을 위해서인지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항아리도, 나무 상자 위에 돌로 눌러 둔 초대장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마주 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터전을 다지는 일임을 정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아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발뒤꿈치에 묻은 흙이 부서져 떨어졌다. 석오가 지는 해를 받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한몸이 되어 움직인 사람. 어떤 종류의 말도 필요 없는 믿음직스런 존재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멀리 앞바다에서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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