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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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오토바이는 빗물이 차오르는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궂은 날씨 탓인지 4차선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배달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자는 헬맷을 쓴 머리를 단호하게 저어댔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남자는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저만치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에 입주를 끝낸 신축 아파트다. 알짜부자들과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산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남자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진입로에는 무인자동시스템 부스를 중심으로 두 대의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왼쪽에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량을 통제하는 차단기가, 오른쪽에는 지상용 차량의 진입을 막는 차단기가 있다. 이곳 단지에는 지상주차장이 없다. 따라서 입주민들의 자가용은 모두 지하주차장을 이용한다. 진입로의 오른쪽에 설치된 차단기는 불가피하게 지상을 이용해야 하는 차량에게만 통행을 허락한다. 이삿짐센터의 탑차와 사다리차, 화물차 같은 것들.
배달 라이더들의 오토바이도 지상용 차단기를 통과할 수 없다.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규칙을 어기는 라이더들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안의 운행이 허용된 화물트럭이 지상용 차단기를 통과하기라도 할라치면 그 틈을 타서 쌩하니 지나가는 식이다. 지상이 아무래도 편하고 시간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자도 같은 이유로 차단기 앞에 멈춰 있다.
평소에는 철옹성처럼 굳게 내려져 있던 차단기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양쪽 모두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남자는 장애물이 사라진 양쪽 통로를 갈등 어린 눈으로 번갈아 봤다. 그 순간에도 비는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우비 모자를 썼지만 무용지물이다. 남자는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고글 너머로 615동을 건너다보았다. 오른쪽 차단기의 바로 뒤쪽, 진입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이다. 배달음식을 시킨 사람은 5층에 산다. 라이더에게 있어 시간은 돈이다. 남자는 재빨리 주위를 살핀 뒤 오른쪽 진입로를 쏜살같이 통과했다.
끼익! 615동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배달 봉투를 꺼내 공동출입문 앞의 계단을 단숨에 올라갔다. 세대를 호출하자 문이 열렸다. 우비 아래로 빗물을 뚝뚝 흘려가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그것이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안나. 반짝이는 보석리본이 앞코에 장식된 분홍구두. 수천만 원이 넘는다는 여자아이용 명품구두가 엘리베이터 사이의 벽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대박! 이게 왜 여기 있지?”
배달하는 것도 잊고 안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명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남자였지만 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던 구두인지라 안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유럽의 유명 디자이너가 죽은 손녀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했고, 그 손녀의 이름을 따서 구두의 이름도 ‘안나’라고 지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스타의 어린 딸이 안나를 신고 있는 사진이 파파라치에 의해 공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외국 왕실의 공주까지 착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주님의 구두’로 불리며 어린 소녀들의 로망으로 자리 잡았다. 남자의 딸도 예외는 아니어서 TV에 안나가 나올 때마다 떼를 쓰곤 했다.
“저거 사줘, 응? 나랑 이름도 똑같잖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남자의 아버지가 손녀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안나 신은 애들 무지 많단 말이야! 나도 사줘! 사달란 말이야아아!”
딸 안나는 졸졸 쫓아다니며 졸라댔다. 높은 인기를 증명하듯 정교하게 위조한 가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품의 디자인을 조잡하게 따라 한 저가의 모방품도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남자는 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멀쩡한 신발이 이미 여러 켤레였고, 딸이 유행에 휩쓸리는 게 싫었다. 가짜는 가짜일 뿐, 이라는 생각도 확고했다.
“이건 진짠가?”
남자는 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남자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이곳 지하주차장의 차들은 외제차 일색이었다. 게다가 이름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드라마 한 회의 출연료가 몇 억이라던가. 그런 재력이라면 정품 안나의 가격쯤 하찮게 여길 것도 같다. 무엇보다 분홍구두가 풍기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 남자는 정품이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 비싼 걸 왜 여기 두고 갔지?”
중얼거리다 말고 남자는 후다닥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언젠가 각종 범죄를 다룬 TV 프로그램에서 ‘점유이탈물횡령죄’에 대해 나온 적이 있었다. 남의 물건을 주운 사람이 주인에게 반환하지 않고 자기가 가져가면 범죄가 된다는 거였다. 하기야 사방에 CCTV가 깔려 있다. 주운 사람의 행적을 쫓는 건 예삿일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함부로 줍지 않았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유실물을 보면 외면하거나 불길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 지나쳤다. 오늘도 모른 척 지나가면 되는 거다. 남자는 얼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제는 그날따라 615동으로의 배달이 많았다는 점이다. 고장 난 차단기도 남자를 유혹했다. 지상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때마다 남자의 시선은 안나에게로 향했다. 배달을 끝내고 1층으로 내려와 보면 어김없이 안나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저씨.”
남자는 통제실로 가서 유리창을 두드렸다.
“분홍구두가 615동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요.”
그 구두가 다름 아닌 ‘안나’라고 덧붙이려는 찰나였다.
“그냥 두세요. 찾아가겠죠.”
통제실 안의 사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덧붙였다. 남자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왜 지하주차장을 이용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배달 콜이 떴다. 아파트 단지 앞의 편의점이다. 배달지는 615동 1004호. 코앞에서 호출하는데 마다하기란 어려웠다. 편의점으로 가서 물건을 픽업하면서도, 엘리베이터 숫자판의 붉은 글씨가 빠르게 변하는 걸 올려다보면서도, 1004호 앞에서 배달 완료 인증을 하면서도, 남자는 안나를 생각했다.
“CCTV만 없으면 딱인데….”
무심코 혼잣말을 하던 남자는 주먹으로 헬맷을 쿵 하고 세게 쳤다.
“정신 차려! 범죄자가 되고 싶냐?”
마음을 다잡으며 10층 복도의 창문을 막 지나치려는 찰나, 우르릉, 쾅! 엄청난 굉음에 이어 푸른 섬광이 창문 밖에서 번쩍했다. 뒤이어 사방이 캄캄해졌다. 인근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진 듯했고, 그 여파로 일대가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남자는 암흑으로 변한 복도 한가운데 서서 안나를 떠올렸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켰다. 검은 복도 바닥에 푸른빛 한 줄기가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쳤다. 불빛에 의지해 비상구 문을 열고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갔다.
안나는 처음 발견했던 모습 그대로 거기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암전이 된 무대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여배우처럼, 남자가 비친 핸드폰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남자는 안나를 신주단지 모시듯 양손으로 조심조심 감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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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가족은 빌라의 꼭대기 층에 살고 있다. 오래된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가 없다. 5층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올라왔더니 숨이 찼다. 딸을 재우기 위해 작은방으로 들어갔던 아내가 식탁으로 걸어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먹고 있어? 나 기다리는 중이야?”
식탁 한가운데에는 김치전과 막걸리가 놓여 있다. 출출할 남편을 위해 귀가 시간에 맞춰 아내가 준비한 야식이다.
“할 말 있어. 이리 와서 앉아 봐.”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김치전이 놓인 접시와 술잔을 식탁 구석으로 밀었다. 아내가 의자에 앉자 배달조끼의 주머니에서 분홍구두를 꺼냈다. 비어 있는 식탁 가운데의 자리에 안나를 내려놓았다.
“당신, 이 구두 알지?”
남자가 물었다.
“알지. 웬 거야?”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연이 있어.”
남자는 저간의 일들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다고 가져오면 어떡해.”
타박하는 아내에게 남자는 변명조로 말했다.
“팔아서 보증금에 보태려고 했지.”
전세사기를 당한 뒤 재개발지역의 빌라로 이사를 왔다. 설상가상 남자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고 있을 무렵, 철거 예정일을 통보받았다. 천만다행 작은 평수의 임대아파트에 당첨되었지만 입주 차례가 오려면 2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세 식구가 머물 집을 마련해야 한다.
남자는 잔기지 떡집의 아르바이트와 배달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떡집은 근무시간이 새벽 6시부터 오전 11시까지였다. 수백 개의 떡판을 일일이 손으로 옮겨 찜통에서 쪄냈다. 손가락에 무리가 되었는지 관절이 부어올랐고 굽힐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일했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은 뒤 배달 일을 하러 다시 나갔다.
전업주부였던 아내도 식당에 나가고 있다. 딸의 등교를 챙긴 다음 곧장 식당으로 갔다가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 딸은 자주 친구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미술학원과 발레학원에 다니고 싶어 했고, 친구가 가진 건 자신도 갖고 싶어 했다. 안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마다 남자는 “로또가 되면”이라는 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런데 안나가 그의 손에 들어온 거였다.
“이렇게 비싼 신발을 어떻게 팔아?”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근에 내놔야지.”
남자의 대답에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증서가 없잖아.”
“보증서?”
남자는 눈을 껌뻑거렸다.
“귀금속도 보증서가 있는데 이런 명품이 보증서가 없겠어? 당근에 올려봐. 정품 보증서 있냐고 당장 물어볼 걸?”
아차, 싶었다. 남자는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는 아내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신고하자.”
아내는 자신의 핸드폰을 남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습득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금을 받을 수 있대.”
유실물법 제4조에 의해서라고 했다. 아내는 인터넷에서 찾은 글의 한 지점을 손가락 끝으로 콕콕 두드렸다.
“이거 봐. ‘물건 가액의 5퍼센트에서 20퍼센트 범위 내에서’라고 분명히 적혀 있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돈은 얼마일까?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리다 말고 남자는 으아, 하고 탄식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왜 그래?”
아내가 물었다.
“점유물 이탈….”
남자는 구겨진 얼굴로 안나를 보았다. 습득물을 바로 신고했을 때나 사례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뇌리를 치고 지나간 거였다.
“현장에서 바로 신고를 안 하고 집으로 가져왔으니 사례금은커녕 범죄자로 몰릴 거야.”
“그럼 이제 어쩌지?”
“기다려 봐.”
남자는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기사를 한참 동안 검색했다. 남자가 안나를 습득한 아파트에서 구두를 분실했다는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정전으로 CCTV는 먹통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순 없다.
“경찰서에 물어봐야 하나?”
“주인이 신고했는지 알아보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가 접수됐으면 어떡할 건데?”
“모르겠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안나의 주인이 정말로 버린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만 뇌리에 가득할 뿐이었다.
“일단 샤워하고 와. 김치전 데워 놓을게.”
남자는 일어나 조끼를 벗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고 거실을 지나쳤다. 문 앞의 발 매트 위에 속옷까지 벗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좁은 욕실에는 누렇게 변색되고 쩍쩍 금이 가 있는 변기와 세면대가 서로 닿을 듯 붙어 있다. 샤워기의 수압은 너무 약해서 물이 쫄쫄 나온다. 게다가 불을 켜도 화장실은 너무 어둡다. 집주인은 할로겐 등을 천장에 설치해 두었다. 크기가 작은 램프 달랑 하나였다. 집주인에게 등을 교체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손도 대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뜩이나 조명이 약한데 화장실의 타일까지 짙은 청록색과 보라색이어서 몇 배나 어둡고 음습해 보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욕실에 창문이 없다는 점이다. 어둡고 축축한 욕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자면 관에 갇힌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유령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딸 안나는 욕실을 무서워했다. 혼자서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고, 씻을 때도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남자와 그의 아내는 밝은 욕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발 버린 물건이게 해주세요.”
남자는 아주 오랜만에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있고, 안나를 팔아 몸값을 챙길 수 있다. 거기에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대출까지 받으면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근데 정품이 아닐 수도 있잖아.”
방으로 들어가 세탁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다시 앉았을 때, 아내가 데운 김치전을 식탁으로 옮겨 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시리얼 넘버 같은 게 있긴 하던데….”
“그런 게 있었어?”
남자는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고 안나를 들어 구두 안쪽을 살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러네. 여기 있네.”
개미 크기만 한 숫자들이 옅은 분홍색 가죽에 가지런히 찍혀 있다.
“그거 있다고 진짜라는 보장은 없어. 요즘은 진짜 같은 짝퉁도 많으니까.”
아내는 전세사기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끔 모조품 지갑이나 백을 사들였는데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된통 당한 뒤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정품인지 알아보려면 백화점 매장으로 가져가서 물어보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긴 해.”
아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내일은 배달 쉴게. 떡집 알바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올 테니까 당신도 시간 맞춰 봐. 같이 백화점 가보자고.”
“알았어.”
그나마 아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켰다.
“적당히 마셔. 내일 새벽에 못 일어날라.”
아내가 제지했다. 남자는 반쯤 남은 막걸리 통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어설프게 마신 술 때문일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식당 일이 힘들었는지 아내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낮게 코를 골았다. 아내가 깰까 봐 뒤척이지도 못한 채 차렷 자세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차라리 냉장고에 남겨둔 막걸리를 모조리 마셔버릴까. 이불을 살짝 들추려는 순간, 끼익 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로 딸 안나는 밤에 혼자서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요의가 느껴질 때마다 부부를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화장실로 데려갔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딸의 방에 요강을 두겠다고 했더니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요강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화장실이 밖에 있던 예전에는 깜깜한 밤에 요강을 사용했다고 알려주었다. 딸아이는 질색하며 싫다고 거부했다. 잠들기 몇 시간 전부터 물 종류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니 딸아이가 낸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둑인가. 식탁에 놔둔 안나가 떠올랐다. 어떻게 알고 왔지? 의문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긴장했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침대 밖으로 내려섰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협탁에 올려둔 스탠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보리색 갓스탠드는 어른 팔뚝 길이의 몸체가 묵직한 원목으로 되어 있다. 필라멘트가 나가서 전구를 교체하려면 갓을 분리해야 한다. 남자는 벽의 콘센트에서 코드를 뺀 뒤 혹시 몰라 전구도 제거했다. 침입한 강도에게 오히려 역고소를 당한 이야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패널들은 정당방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침을 튀기며 말해주었다. 남자는 스탠드의 몸통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방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것과 동시였다.
“꼼짝 마!”
스탠드를 치켜든 채 소리치며 거실로 튀어나갔다.
“아빠….”
원피스 잠옷 차림의 딸 안나였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거실 한가운데서 움찔 놀라 남자를 돌아봤다. 혹시 딸이 요의를 느낄 때를 대비해서 거실 등을 늘 켜놓았다. 아무리 물을 안 마셔도 소변이 마려울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딸은 부부의 방으로 달려오지 않고 거실에 서 있었다.
“안나야, 거기서 뭐 해?”
남자는 치켜들었던 스탠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목이 말라서 깼는데….”
딸 안나가 식탁을 가리켰다.
“안나가 저기 있었어. 내 선물이야? 나한테 딱 맞아!”
그러고 보니 딸이 분홍구두를 신고 있다.
“아빠, 고맙습니다!”
딸은 신난 얼굴로 콩콩콩 거실을 뛰어다녔다.
“안 돼!”
남자는 딸에게 달려가 억지로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강제로 안나를 벗겼다.
“싫어! 내놔! 내 거야!”
딸 안나는 발버둥을 치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건 네 거 아냐!”
남자는 화난 얼굴로 구두 밑창을 꼼꼼히 살폈다. 러그 위에서 뛴 덕분인지 딱히 흠집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일어나 수납장으로 가서 맨 위 선반에 안나를 올려놓았다. 딸이 의자를 밟고 올라서도 손이 닿지 않을 높이였다.
“아빠, 미워!”
딸 안나가 원망스럽게 남자를 노려보고는 으앙, 울음을 터트리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아내가 갑작스런 소란에 잠이 깨어 나왔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편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안나는 왜 울어?”
“안나가 저거 못 건드리게 해.”
남자는 수납장의 안나를 가리킨 뒤 침실로 돌아갔다. 술을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3
다음 날, 남자는 여느 때처럼 새벽 5시에 혼자 일어나 조용히 씻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딸의 방으로 갔다. 아이의 뺨에 뽀뽀를 해주고 출근하는 건 남자의 오래된 습관이다. 가장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일종의 의식이랄까.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남자는 딸의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사과했다. 아빠라는 사람이 비싼 구두에 눈이 뒤집혀 어린 딸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서 밤새 뒤척였다. 전세사기만 안 당했어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사기꾼이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과거를 생각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당장 닥친 현실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했다.
“아빠 다녀올게. 오늘 하루 재밌게 지내.”
남자는 자는 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고 방을 나왔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수납장 앞에 서서 안나를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제발 네가 진짜이기를, 부디 제값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새 집으로 이사할 그날을 위해 지금의 피곤함과 딸을 향한 미안함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남자는 뻑뻑한 눈자위를 문지르며 떡집으로 향했다.
잔기지 떡집은 새벽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해마다 이맘때면 주문이 몰리는 편이라고 했다. 당장 모레가 어린이날이다. 며칠 뒤에는 어버이날이고, 스승의 날과 부처님 오신 날까지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행사의 달이다. 그래서인지 사전예약 주문까지 꽉꽉 찼다고 했다. 한입에 먹기 좋은 잔기지 떡은 답례품으로 인기가 있었다. 늙은 사장 부부는 힘들다고 툴툴대면서도 입이 귀에 걸렸다. 떡집에는 네 명의 여자 직원이 더 있었는데 그들 역시 표정이 밝았다. 깔깔 웃어대며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왜?”
“정전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갇혔지 뭐야.”
포장을 담당한 여자들이 쉬지 않고 손을 놀리며 주고받는 대화가 남자의 귀에까지 건너왔다.
“자기네는 비상발전기가 없나 보구나. 우린 신축 아파트라서 그런지 전기 들어올 때까지 안 멈추고 계속 운행하더라.”
“우리 아파트도 비상전원이 있는데 정전 때는 잠깐 중단됐다나 봐.”
“그럼 CCTV도 다 꺼지는 건가?”
여자들의 수다를 흘려듣던 남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카메라가 작동한대. 비상전원인가 그런 게 있다던 걸.”
그렇다면 그 아파트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남자는 초조하게 휴식시간을 기다렸다. 화상의 위험 때문에 근무 중에는 핸드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9시 정각이 되자마자 벽에 걸어둔 외투로 달려갔다. 배달기사가 안나를 가져갔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정말 버려진 걸까. 왠지 마음이 놓였다.
드디어 11시가 되었을 때, 늙은 사장 부부가 점심을 먹고 가라고 붙잡았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여자 사장이 포장에 들어가지 못한 못난이 떡을 한 묶음 챙겨주었다. 인심 좋은 떡집에서 일하는 덕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남자는 잘 먹겠다고 인사한 뒤 가게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부아앙, 총알처럼 튀어나간 오토바이는 바람처럼 달려 재건축 구역으로 진입했다. 큼직한 붉은 글씨들이 휘갈기듯 적혀 있는 골목들을 지나쳤다. 철거를 앞둔 빌라촌은 유령도시처럼 스산했다. 대부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나가고 남은 가구는 몇 세대 되지 않는다. 남자가 사는 빌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전에는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어 하루가 멀다 하고 골목이 시끄러웠는데 요즘은 건물 앞이 휭하니 비어 있다.
남자는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일단 떡집에서 얻어 온 못난이 떡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샤워를 해야지. 뜨거운 열기와 수증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계속 움직이며 떡을 찌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한여름에는 한증막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남자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여름까지 일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보증금에 맞추다 보면 이곳이 아닌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지끈거렸다.
“우선 지금 할 일만 생각하자.”
남자는 현관문을 열면서 어떤 외출복을 입을지 고민했다. 백화점의 명품매장이 아니던가. 후줄근한 차림은 안 된다. 무시당하지 않도록 갖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남자는 슈트 정장을 떠올리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저절로 시선이 수납장 쪽으로 향했다.
“헉!”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거기 있어야 할 안나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심장이 벌렁거렸고 얼굴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
“진정해. 안나 엄마가 잘 치워뒀을 거야.”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신발을 벗었다. 못난이 떡을 식탁에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응, 여보. 집에 왔어? 나도 막 나가려는 참이었어.”
식당의 소음 때문에 아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안나는 어디 있어?”
남자는 핸드폰을 귀에 찰싹 붙이고 큰 소리로 물었다.
“안나? 우리 딸? 학교에 있지.”
“아니, 구두 말이야! 수납장에 없어!”
“아, 그거. 안나가 등교하기 전에 잠깐 보고 싶다고 졸라대서 꺼내줬어. 식탁 찾아 봐. 거기 있을 거야.”
하지만 식탁 어디에도 안나는 없었다.
“설마 안나가 학교에 가져갔나…?”
아내가 당황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뭐?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좀 말해 봐!”
남자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내는 졸라대는 딸을 달래느라 평소보다 출근 준비가 늦었다고 말했다. 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딸을 혼자 거실에 둔 채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는 거였다. 화장하는 엄마를 힐끔거리며 안나를 재빨리 가방 속에 숨기는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내는 혹여 지각이라도 할까 봐 허둥댔을 테고, 식탁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을 테다.
“어쩐지 학교 가는 내내 실실 웃더라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에게 남자는 명령조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전화 그만 끊고 곧장 안나 학교로 와! 나도 거기로 갈 테니까!”
남자는 작업복 차림으로 튀어나갔다. 오토바이는 두고 가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으로 가려면 오토바이보다는 택시를 타고 가는 편이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았다.
딸 안나가 공부하는 4학년 교실은 초등학교의 후문 쪽 건물에 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었다. 남자와 그의 아내는 바리게이트로 막아 놓은 후문 뒤에서 열심히 딸을 찾았다. 후문을 지키는 봉사자 할머니에게 잠깐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단호히 거절당했다. 사전에 학교와 약속이 된 학부모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전에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여자아이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경찰이 출동했다. 학교 인근의 CCTV를 모조리 확인해봤더니 범인은 70대 노인이었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몸이 아파 조퇴하는 여자아이를 뒤따라갔고, 골목길이 나오자 여자아이를 덮쳤다. 여자아이는 끌려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고, 노인은 달아났다.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 한 학부모의 학교 내 출입을 제지해왔던 학교는 미수로 끝난 그 사건 이후로 방문자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봉사자 할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보라고 말했다. 수업 중에는 핸드폰 사용이 불가하지만 점심시간에는 가능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해봤죠. 안 받아요.”
남자와 그의 아내가 후문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였다.
“또 해봐. 이번엔 받을지도 모르잖아.”
아내가 재촉했다.
“내 번호 떠서 더 안 받는지도 몰라. 당신이 걸어 봐.”
남자가 말했다. 어젯밤 일로 아빠에게 토라져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아빠한테 혼날 짓을 한 게 무서워서 피하고 있는 중이겠지.
“안 혼낼 테니까 전화 받으라고 문자 먼저 보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한 떼의 여자애들이 와아,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몰려갔다. 문득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남자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 딸 안나가 분홍구두 안나를 신고 여자애들 틈에서 깔깔 웃고 있었다. 당당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구두를 들어 보이며. 그 모습을 본 순간, 남자는 이성을 잃었다. 앞을 막아서는 봉사자 할머니를 밀쳐 내고 한달음에 딸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어젯밤 거실에서 그랬듯이 딸을 그 자리에 거칠게 주저앉혔다.
“이건 네 거 아니라고 했지!”
남자는 안나를 우악스럽게 벗겨냈다. 일찍 찾아온 더위 탓에 딸은 양말 없이 샌들을 신고 다녔다. 딸은 드러난 맨발을 조막손으로 가렸다. 곁에 몰려 서 있던 아이들이 딸을 손가락질하며 웅성거렸다. 딸은 홍시처럼 빨개진 얼굴을 무릎 사이에 푹 파묻었다.
“여보! 무슨 짓이야!”
어느 틈에 달려온 아내가 남자를 난폭하게 밀쳤다. 어깨를 격하게 들썩이며 울고 있는 딸을 안아 일으킨 아내가 남자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댔다.
“백화점은 당신 혼자 가. 나는 안나 데리고 집으로 갈 거야.”
4
‘돈이 중요해.’
명품매장으로 향하는 내내 남자는 생각했다.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남자는 믿었다. 친구들 앞에서 딸이 받은 수모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사는 가야 한다. 이참에 다른 학교로 전학하면 해결될 일이다. 아이들이야 워낙 금방 잊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리 심란한 걸까. 뭔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명품매장 안에는 묘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검은색 정장의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깍듯한 태도였으나 여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걸 깜빡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저어….”
남자는 주눅 든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왠지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초라한 기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이 구두요. 정품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남자는 쭈뼛쭈뼛 안나를 내밀었다. 올백머리의 여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정중히 받아들자 곁에 서 있던 다른 여자가 매장 한쪽에 놓인 소파로 남자를 안내했다. 잠시 뒤, 카운터 뒤편으로 들어갔던 올백머리 여자가 안나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고객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는 남자에게 안나를 건네며 여자가 말했다.
“저희는 모든 제품에 고유 시리얼 넘버가 있어요. 본사 데이터베이스와 연동되어 있어서 시리얼 넘버만으로 제작한 시기나 수선 정보까지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 제품의 시리얼 넘버는 미등록된 걸로 나오네요.”
“짝퉁이란 말인가요?”
남자의 얼굴이 귓불까지 빨개졌다.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정중한 그 태도가 남자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남자는 도망치듯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딸 안나의 맨발이 떠올랐다. 실망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아내도 생각났다. 남자는 손에 든 안나를 내려다봤다.
“이게 뭐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놓친 게 뭔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남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화점 앞의 사거리를 달리던 차량이 일제히 멈추는 게 보였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동시에 보행이 가능한 초록색이었다. 네 방향의 사람들이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려면 오른쪽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바로 앞의 횡단보도 너머에는 경찰서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남자는 횡단보도 턱의 안쪽에 우두커니 서서 양방향을 한동안 갈마봤다.
삑삑삑, 삑삑삑….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초록불이 깜빡거리더니 남은 시간이 숫자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더 늦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남자는 흰색 선이 선명한 횡단보도 안으로 힘껏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