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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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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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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공포물은 좋 아했다. 특별히 뭐가 어떻게 좋다는 것은 없었다. 그냥 막 연한 느낌이었다. 그 음습하고, 괴기스럽고, 절망적인 무 언가에 의해 인간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질 때 내 가 느끼는 것,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 존재가 얼마나 흉물스러운 악귀이건 간에 인간은 결국 죽으면 그뿐이었다. 어차피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언젠간 모두 죽을 텐데 새삼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해야 할 필요 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서로 만나게 됐는지, 어떻 게 부부가 되었으며, 어떻게 나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산재로 돌아가시 고, 어머니는 무슨 이상한 종교에 빠져서 나를 버렸다.
이때나 그때나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부모가 태어나라고 해서 태어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몸이 버티지 못하면 먼지처럼 죽는 것이 다. 어찌 됐든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나는 죽음 따 위가 두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혼자서도 바로 친척 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회사조차 도산하고, 허름한 반지하에서 그냥 빈둥 거리며 살고 있었다. 새로 일을 구해보려 해도 나처럼 유명 대학이나 번지르르한 자격증 같은 것 없이 그냥 시키는 일만 죽도록 반복하다가 어느새 서른이 넘어버린 자를 받아주는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소위 딸배라고 불리는 배달일이었다. 하지만 거 기서도 1년 정도 일하다가 사고가 나버렸다.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 달 정도 소식이 끊기면, 병원 신세거나, 혹은 아예 죽었 다고 생각하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었고, 이걸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운 좋게 생명에 지장까지는 없었지만, 병원비로 그 동안 배달일로 번 돈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수술을 받고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나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냥 가 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다 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 흐름 따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 없이, 필사적으로 살아왔구나 하고 혼자 납득했다. 어쩌면 나는 자기 자신도 알게 모르게 지쳐버리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가슴 속 감 정에 어떤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도 꼭 납덩이를 삼킨 듯 무거웠다. 그러 다가 잊을 만하면 가슴이 병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숨이 미친 듯이 가빴다. 그럴 때면 나는 억지로 자기 목을 졸랐다.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가 되면 그제야 손을 뗐다. 그러면 호흡이 조금 진정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인지 악몽인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아예 실신 지경에 이르면 그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면 당연히 꿈을 꿔도 악몽을 꿀 수밖에 없었다. 악몽 속에서 도대체 몇 번을 더 죽어야 이 숨통이 진짜로 끊어지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어야만 했다.
혹시나 내가 어떤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입원 중에 따로 검사받아 보기도 했는데 별 특별한 문제는 없는 걸로 나왔다. 그 결과를 받자마자 알 수 없는 공허한 감정이 나를 덮쳤고, 입가에서 헛 숨이 새어 나오면서 입꼬리가 휘어졌다.
입술은 냉소로 일그러지고, 가슴 속은 쥐 죽은 듯 적막했다. 사람들 은 내게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둥,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나 뭐라나 흔해빠진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정신과 약을 권했다. 하지만 거 절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치료를 원하던 사람이 갑자 기 또 왜 처방을 거절하느냐고 물어왔다. 내 시선은 개미처럼 바닥을 기었다.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번 스스로 추슬러 보겠다는 말을 끝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 말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함이 서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음습한 반지하에서 꾸는 악 몽은 병실과는 또 달랐다. 꿈이 다 똑같은 꿈이지 다를 게 뭐가 있냐고 한다면, 글쎄, 스스로조차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 위화감 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 한쪽은, 여기서 눈을 감으면 다시는 일어 나지 못하는, 그 상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소름 끼치는 예감을 받는다면 이쪽은 오히려 죽음을 갈망하게 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나 를후벼파는것같았다.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갑자기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 지났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마구 경련이 일 었다. 눈이 너무 따가워져서 도저히 계속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방에서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애초에 눈을 떠서 뭐 하는가, 이제 일 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버거웠다. 온종일을 극심한 고통 속 에서 실신했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수명이 1 년씩은 계속 깎여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몸에는 이상이 없다 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뭐 때문에 이토록 나를 고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천장에 맴을 돌았다.
시체가 되어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썩어가는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 다. 고독사라고, 정말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아니, 죽을 위기 따위 는 이제껏 몇 번이나 겪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나를 키우 던 어머니는 생활고에 못 이겨 집을 나갔다. 웬 쪽지만 한 장 남아있었 다. ‘죄는 씻을 수 있어. 미안해. 미안해’라고 쓰여 있었다.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를 들끓던 그 수많은 고통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 다. 이게 답이구나 하는 찌릿한 감각에 지긋이 웃었다. 진짜 웃음인지 아니면 냉소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내 정신 은 깨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체처럼 눈을 뜰 수도 없고, 몸을 옴짝달 싹할 수조차 없었다. 이윽고 발끝에서부터 무슨 거머리 같은 것이 바글 거리며 기어 올라오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 리가 깨질 듯 쑤셨다. 악몽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눌림인가 싶기도 했다.
점차 그 거머리 같은 것들은 하체를 타고 올라와 가슴팍까지 밀고 들 어왔다. 그대로 안면을 지나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 순간 뇌리에 번개 가 번뜩이고 정신이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처럼 아찔했다. 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말로만 듣던 저승인가도 싶 었지만 내 등을 흠뻑 적시는 식은땀이 아직 내게 살아있다는 실감을 주 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신기했다. 심장의 맥박이 점차 죽어가고 식은땀 을 흘리던 피부가 싸늘하게 식어갈 때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 인적인 힘이 순간 내 가슴을 찔렀다. 그제야 나는 눈을 떴다.
대충 얼굴에 물칠을 하고, 아무 옷이나 걸쳐 입은 뒤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정오 햇살이 더 따사롭게 느껴졌다. 괜히 막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살아있다고 누군가에게 강하게 주장하려는 듯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실어 넣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하늘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만 황 홀감 같은 것은 아니고 달리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런 부유감이었다. 만약 내가 어느 높은 곳에서 투신이라도 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 까 싶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다가 순간 아, 하고 내 가슴 에 대못처럼 박히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란 왜 살아가는 것일까.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죽지 못해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 것이 정말 합당한가. 살아 가는 것이 하나의 인간 본능이라고 한다면 동시에 죽음 또한 본능의 영 역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내가 허공에 던진 것인지, 아니면 이 허공이 내게 던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질문이 구역질이 날 정도 로 역겹고 저열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내가 어떻게 죽든, 그 것만큼은 한 존재의 덧없는 자유가 아닐까 하고 가슴 속으로 속삭였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나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이 삶은 빈 틈없이 짜여 있었다. 운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니 그냥 명 자만 빼서 운이라고만 해두자. 내게 세상이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도박판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왜 사고를 당하셨을까.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이상한 곳에 빠져버렸지. 아니, 더 이상 내게 그런 것 따위 중요치 않았다. 그런 상 황에서 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어떡해서든 살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마치 그 선택을 비웃는 듯 아버지처럼 사고를 당해 땅바닥을 뒹굴었다.
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르겠다. 차에 치여 허공에 몸이 던져 지는 순간 나는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이가 탄생하는 듯한 아득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분명 해방감이 아닌 모종의 회상감이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 나는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소리 로 울었을까. 애초에 제대로 울기라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머릿속에 있는 기억 중에 가장 첫 기억은 무엇일지 궁금해졌 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왜인지 내 뺨 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러는 것인 가 생각해 보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란 것은 마지막 그 순간에 다다르면 오직 기억만 남는구나 싶 은 것이 자조스러울 뿐이었다. 냉소라고 표현하기에도 그다지 냉랭하지 않은, 뭔가 또 다른 형태로 뒤틀려져 버린 어떤 음산한 감정이 등골을 타고 지나갔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눈앞에 시야가 신기루를 보는 듯 멍해졌다. 어쩌면 이 아슬함이야말로 공포라고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나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채 입술을 물어뜯으며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웬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기에는 더 이 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핏줄이 잔뜩 선 채 돌출된 눈, 어두운 안색, 헌 걸레짝처럼 너저분한 장 발과 수염, 환자가 혼자 살아가는 반지하 특유의 썩은 내가 밴 옷, 축 처진 어깨와 후들거리는 다리가 눈길만 스쳐도 불길한 기운이 옮아버릴 것 같았다.
한번 지금 내 행색을 봐버리니 갑자기 주변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했 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 한 명 한 명씩은 내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날 선 눈빛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중 어느 한 명과는 아예 눈 이 마주쳤는데, 명백하게 공포에 질린 듯한 반응을 보이며 황급히 가던 길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말라붙다 못해 다 부르터버린 입술을 일부로 더 뜯어냈다. 피가 났 다. 비릿한 냄새가 코에 뻗쳤다. 그 피를 핥았다.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감각이었다.
그 와중에 기침은 계속 나오고,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이 쑤셔지는 듯 한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죽을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좋았다. 의식의 흐 름이 여기까지 왔을 때는 나도 내 정신이 이미 넘어서는 안 되는 지점 을 넘어섰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한복판에서 덩그러니 서서 혼자 웃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그저 입꼬리 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그러는데 갑자기 막연하게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딱히 영화가 아 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공포라는 감정 자체에 갈증이 났다. 하지만 높은 곳에 올라간다거나, 물에 빠진다거나 하는 생리적인 공포를 말하 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느낌은 일종의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 게 이유가 직관적인 감정은 오히려 금방 무덤덤해지기 때문에 공허함 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나는 숨을 쉬고 싶었다. 좀 더 깊이 숨을, 그러 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이 공기부터 바꿀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적당한 영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로 가자고 생각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이 녀석은 또 뭐야라는 속내를 은연적으로 드러내는 직원의 싸늘한 눈빛을 무시하며 방을 빌렸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대 여 시간은 계속 흐를 텐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탈진하듯이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점차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 를 내저으며 문득 이 방이 그 썩어빠진 반지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 았다.
맞다. 여기는 영화 방이었다. 적당한 난방과 푹신한 침대, 어디까지 나 평범한 영화 방이지만 내가 원래 있던 곳에 비하면 뭐든 감지덕지였 다. 내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번졌다. 기쁨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 는 그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 가슴에는 그저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찾아 틀었다. 사람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 일까. 무덤덤하게 공포영화를 보는데 한 등장인물이 악귀의 공포를 못 이기고 자살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순간 뇌리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두 려운 무언가를 해결한 것이 참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진짜 악귀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음에도 방 안이 묘하게 적막하게 느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다가 머리채를 치고 마구 흔들었 다. 의아하게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 한구석 쪽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단 순히 아까 나온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밀려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고개를 내저으며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에서는 계속 사람이 죽어 나 갔다. 하지만 막상 집중해서 보니 딱히 새로운 것도 없었다. 내가 매일 밤 꾸는 악몽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그냥 그런가 싶기도 했다.
요 일주일간은 그저 이 반복이었다. 깨어 있을 때는 공포영화나 소설 을 보고, 잠이 들 때는 또 그 끔찍한 악몽에 괴로워하다가 실신해 버렸 다.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럴 거 왜 굳이 잠이 들려 고 침상에 몸을 누이는 거지, 그렇게 나는 무슨 망령처럼 새벽을 쟤 방 에서 혼자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의지도 생기도 없었다. 가만 보면 자신이 어떻게 아직도 팔 다리가 움직이고 있는지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신은 나날이 흐릿해 지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손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떨 때는 열 이 펄펄 끓다 가도 갑자기 확 식어 버려서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동상이 라도 걸린 듯 가렵고 따가웠다.
그러던 중 영화관에서 틀어준 상영 전 광고로 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당장 코인 매매로 당신의 꿈을 이루라며 광고 모델인 한 여배우가 무척이나 희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꿈이라고 하니 회사 다니던 때 우연히 보았던 한 신문 기사가 떠올랐 다. 정부가 코인을 규제하겠다고 하니 한창 신나게 코인 매매를 하던 사람들이 왜 자신들의 꿈을 뺏어가는가, 나라가 자신들의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글이 실려 있었다.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영화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그 꿈이라는 한 글자만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새삼 내가 평소에 꾸던 악몽과는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뭐라 답을 찾기도 전에 갑자기 몸에 닭살이 돋 았다. 뒤에서 알 수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일 오 전 영화관에서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말은 즉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난 이 음습하고 불길한 위화감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냥 기 분 탓이었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기에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갈수록 몸이 이상해지 고 있었다. 점점 사지에 경련이 일기 시작하고 손발 끝이 쥐가 난 듯 따 끔거렸다.
견디다 못한 나는 영화 도중에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집 안 이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웃을 일 따위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폭소 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른 무엇이 악귀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끝없는 악몽의 원인도 그럭저럭 납득 이 됐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나는 원래 실신하듯 잠이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또 악몽을 꾸었다. 오랜 생활고와 아버지가 없는 고독감에 완전히 정신이 마모되어 버린 어머니가 나타났다. 나는 꿈의 내용을 잊으려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눈앞이 핑 돌았다. 새벽이라서 주변이 어둡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점 점 사물의 형태가 눈에 잡히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 상태에서 나는 컴 퓨터를 켜고 코인 매매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다. 태어나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내 본 적 없는 내가 하다 하다 이런 도박 질에 손을 댄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 몸과 정 신 상태로써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문제까지도, 결국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꿈이 있는 사람만의 영역이지 않을까. 그 렇게 생각하는 지금도 나는 딱히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조차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발악할 뿐이었다.
그 증거로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지금 내 몸에 들끓고 있는 어떤 괴 로움도 이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곧 설치가 끝났다. 내가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매매가 시작되었다. 아니, 꿈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꿈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머릿 속에는 양봉이냐 음봉이냐 하는 어디서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밖에 없 었다. 나머지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매매를 할 뿐이었다.
코인 매매는 주식과는 달리 24시간 내내 열렸다. 그 말은 즉 나도 온 종일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보면서 수백수천 번의 클릭질을 했다는 것 이다. 처음 3일간은 30%에 가까운 손실을 보았다. 다음 10일간은 그 손 실대에서 횡보하다가, 얼만큼 더 시간이 지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이익이 쌓여나갔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게 내 몸은 더 야위어졌고, 눈도, 침침한 건 둘째 치고라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눈물이 계속 흘렀다. 어떨 때는 코피가 터지고 또 어떨 때는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끼니는 거의 물만 마시면서 버티고 그러다 지쳐 쓰러져도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몸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내 돈은 더 불 어났다. 도대체 이 사람 몸통만 한 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죽음을 두 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수를 친 사람은 시세가 떨어지는 것 을 두려워하고, 매도를 친 사람은 시세가 오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 지만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토바이 배달도 그랬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불의의 사 고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피하려고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사고를 당했다. 왠지 그 순간 느 꼈던 부유감이 그립게 느껴졌다. 그것은 돈을 얼마나 지불할지라도 얻 을 수 없을 어느 덧없고 섬뜩한 감정이었다.
나는 내 돈이 열 배로 불어난 시점에서 그냥 멍하게 그 숫자를 바라 보았다. 무언가가 내 가슴 정 가운데를 스쳐 지나간 것만 같았는데 도 대체 무슨 느낌인지는 형언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돈이 얼마나 있든 상관없었다. 달리 쓰고 싶은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돈을 벌었지? 돈이 문제가 아니 라 이 그림 놀이를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누가 그랬었다. 이 프로그 램 세상 속에는 인간으로서 꿈을 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했었다.
이 부분까지 상념이 일그러지자 나는 컴퓨터를 들어서 그대로 던져버 렸다. 한 번 던진 것으로는 별로 부서지지 않았기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 지 계속 내던졌다. 그렇게 바닥이 기계에 파편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 꼬락서니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그들처럼 국가를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만큼 거창한 꿈을 꾸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그런 데 나에게는 그 정도 바람조차 과분하다는 의미인지 돈을 10배나 불렸 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 은 갈수록 광기마저 느껴지는 끔찍한 음조로 뒤틀렸다. 차라리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누구 말마따나 나도 돈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면 좋겠다.
내 모든 걸 바칠 테니 나에게 꿈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 오. 돈을 10배가 아니라 100배를 불리면 알게 되는 겁니까. 만약 그렇 게 했는데도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알고 있다. 돈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말도 하지 않고 의지도 없다. 기도해 봤자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망념일 뿐이었다.
체념도, 절망도 아닌 어떤 음산한 감정이 숨통을 조여왔다. 코인 매매에 열중하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겨울의 추위가 한꺼번에 나를 덮 쳤다. 하지만 몸이 추워서 자연스럽게 마음까지도 얼어붙는 것인지, 아 니면 마음에서부터 먼저 시작된 추위가 이 계절과 맞물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컵라면 하나를 꺼냈다. 물을 데운 다음 컵에 부었다. 그리고 기 다렸다. 사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멍하니 있고 싶었을 뿐이고, 그러기 위해서 적당히 아무 이유나 갖다 붙일 따름이었 다. 소리 하나 없는 깜깜한 방에서 홀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있 다가 곧 컵라면 뚜껑을 벗겼다. 면을 저은 뒤 한 젓가락 먹었다. 다음은 국물을 마셨다. 몸이 살짝 따뜻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오랜만에 제대로 배가 차는 음식을 입에 넣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된 것인지, 이 컵에서 모락모락 올라오 는 김에 정신이 몽롱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라면을 버리 고 다시 자리에 앉아 책상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어떤 의미도 없이 그 상태로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마구 훑었다. 가 뜩이나 방이 어두웠는데, 내 팔짱 안은 더 어두웠다. 그 어둑함을 느끼 며 내 입가는 냉소로 일그러졌다.
눈을 감았다. 눈을 뜨나 마나 장님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 어두웠다. 실제로 코인 매매에 쏟아부은 1개월 반 정도에 시감이 많이 안 좋아졌 다. 이대로라면 정말 안경을 맞춰야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간 번 돈 으로 사면 될까 싶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컴퓨터를 새로 사거나 피시방이라도 들려야 했다. 왠지 헛웃음 밖에 안 나오는 무슨 싸구려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내 살갗에는 더 이상 감각이 없었고, 마치 자기 자신이 어느 커다란 화면 속에 담긴 하나의 영상처럼 느껴졌다. 움직이기는 하지만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끔찍한 망념의 덩어리였다.
그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무슨 말을 혼자 마구 중얼거리다가 목이 너 무 아프고 기침이 나와서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내 눈앞 에 누군가가 아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영락없이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만은 달랐다. 거의 입가가 찢어질 정도로 호쾌하게 웃고 있지만 모순적이게도 오직 음울함만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것도 눈이 한 번 깜빡하는 찰나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수 초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모르는 것이 더 현실에 부합한 상태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모두가 꿈을 꾸며 살아간다. 나는 그만뒀지만 지금도 코인 바닥에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돈을 걸고 그것을 위해 사투 를 펼치고 있다. 아니길 바랐지만, 나는 그 종류가 조금 다른 듯했다. 나에게 꿈이란 끔찍한 악몽이었고, 방금과 같은 영문 모를 망상일 뿐이 었다. 만약 그들에게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한 가지 묻고 싶었다. 당신 들은 지금 무슨 풍경을 그리고 있는 거냐고,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을 내버려 가면서까지 열중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나의 바로 옆집에서 누군가가 자살했다고 한다. 이름 이‘서’자로 끝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급하게 들락날락했고, 그 광경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코인 매매에 실 패해서 스스로 숨을 끊었다는 듯했다. 나만 몰랐을 뿐이지 이 주변에서 는 영끌족이라는 별명으로 꽤 유명했던 모양이다. 잘 나갈 때는 돈을 수십 배나 돌리면서 심지어 가족들 돈까지 맡아서 운용했다는 거 같다.
원래는 이런 가난한 동네가 아니라 으리으리한 집과 차에 흥청망청 한 삶을 살며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매매가 손실을 거 듭하더니 걷잡을 수 없게 돼버려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영끌 족이라는 별명답게 세상에 안 빌린 돈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내게는 그 호기심을 파고들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악몽을 꾸고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망상을 본다. 더 이상 따로 영화를 볼 필요도 없었다. 공포가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내 얼마 남지 않은 여력을 빨아먹으면서 점점 더 불어났다. 애초에 나는 왜 이렇게 공포라는 감정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것도 아니고 그 렇다고 삶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내가 생각해도 말의 앞뒤가 안 맞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순간에 얼굴에서 표 정이 사라졌다.
불안과 광기로 떨리는 눈과 입술, 그리고 추위로 덜덜거리는 턱, 갑자 기 내게 코인 매매를 가르쳐 주었던 그 여배우가 떠올랐고, 그 환상에 빠져 감각이 무덤덤해졌다.
그녀는 화면을 보고 있는 이를 향해 꿈을 이루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 고 있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는지 아니면 일그러질 대로 일 그러진 나에게는 통용이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미소가 너무 나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더욱 서글펐다. 이제 그녀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다. 괴롭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나 혼자만의 망상일 뿐이니까. 그녀는 그저 카메라를 보며 일을 한 것 뿐이고 나는 우연히 그 영상을 보게 됐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꿈을 얘 기해주었지만, 거기에는 사실 꿈도,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도 없었다.
악몽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더 끔찍했 다. 그렇게 현실에 눈을 뜨면 거기에는 귀신보다 더 흉측하게 말라비틀 어진 한 남자가 있었다.
도대체 이 고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만약 내 몸속에 악성 종양이 있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데 마취 없이 생살 을 절개하고 뼈를 긁어내야 한다면 그 행위를 우리는 과연 치료라고 할 수 있을까. 병으로 죽기 전에 쇼크로 죽는다면 결과적으로 차이는 없는 데, 어쨌든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본인의 몫이었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생살을 찢는 쪽으로 살아왔고 어쩌 면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역겨운 공포는 단순 껍질에 불과하고 아직 내가 모르는 알맹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게 후회라는 마음이 들만한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나는 마치 그 질문에 대답을 얻으려고 하는 듯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코인 매매 때문에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 고 거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 풍광이 눈에 담긴 순간 나도 모 르게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하고 웃었다. 지금 내 얼굴을 거울로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만이 아쉬웠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쓰고 걸음을 내디뎠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리가 마치 한 폭의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에 발 자국이 찍혀있었다. 이 발자국이 다시 눈에 파묻히려면 몇 시간이 더 흘러야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때 동안 눈이 계속 내리긴 할지 더많이내릴수도있고얼마못가그칠수도있어서결국두고봐야아 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이 겨울도 끝나고 봄 이 온다. 그때는 눈 자체가 다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것에서 아름다움 을 느낄지 슬픔을 느낄지는 본인의 자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다만 속도를 조 금 늦췄다. 눈이 밟히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눈발이, 걷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조금 굵어졌 다. 그 때문인지 주변이 아까보다 약간 고즈넉해진 느낌이 들었다. 가 슴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렸다. 순간 추위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무척이나 따뜻한 감정이 포개졌다. 영화관의 난방과는 또 다른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함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것 하나 없는 데 갑자기 마음만 이렇게 유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체온은 떨어 지고 옷에 달라붙은 눈은 마를 새 없이 쌓여갔다. 하지만 털고 싶지 않 았다.
배도 고프고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 다. 그거면 됐다. 더 바라는 거 따위 없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기 침이 나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땅거미 가 졌다. 아름다웠다. 웃고 싶었지만 더 이상 한번 웃음 지을 힘조차 남 아 있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자 흘러가자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저 하늘과 같이 내 정신도 가리워지고 있었다. 그 아지랑이의 틈새로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와 나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다정히 손을 맞잡고 걷고 있었다. 절대 이 두 손 놓지 말자고 서로 굳게 약속했 었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원망하기 도 하고 어쩔 도리가 없는 나를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부터 우리 사랑을 잊기로 했었다. 지금도 그녀는 내 마음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남아있는 옛사랑이었다.
어느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사람은 존 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있다고 치는 것뿐,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거짓을 거듭했다. 있지도 않은 첫 만남, 첫 키스, 같이 웃고 울고 하던 밤하늘에 별자리와 같은 시절을 멋대로 망상하면서 나는 계속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 강의 웬 대교 한복판에 있었다.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새까만 어둠과 다리를 수놓는 인 공 불빛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아직도 눈은 내리고 있었는데 나는 혹 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내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이 피식 웃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 내리는 날 바라보는 이 넓은 강 의 풍경은 적어도 내가 이 삶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 었다. 그거면 됐다. 알고 싶은 것은 그게 다였다. 역시 미련은 없었다. 난간에 찰싹 달라붙어서 좀 더 느긋하게 이 풍경을 지켜보았다.
물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그 소리 를 더 잘 느끼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았다. 서서히 내 몸이 어딘가 알 수 없는 저 너머를 향해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 들고, 입술 사이에서 새 하얗게 입김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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