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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이의 일상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성열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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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하루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아 매일매일이 길고 무료하기만 한데, 해 질 무렵 돌이켜보면 어떻게 하루해가 지났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가 길게 느껴지지 않도록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느지막이 일어난다. 물론 중간에 자다 깨는 일이 잦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늦게 깨어나서도 바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누워 한 30분가량 꼼지락 운동을 한다. 꼼지락 운동이란 게 내가 붙인 말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강 정보에 따라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잠자리에서 하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각 신체 부위에 대한 건식 마사지도 포함된다.
이렇게 꼼지락 운동이 끝나면 모닝커피 한 잔이 당기게 된다. 노년에 커피는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줄이기로 작심을 했지만 모닝커피만큼은 어쩔 수 없어 하루 딱 한 잔만 하기로 한 거다. 이렇게 천천히 볼일 다 보고 일어나게 되면 자연스레 아침 식사 시간도 늦어지고, 산책하고 운동하는 시간도 늦춰지게 된다. 사실 이는 이렇게 해서라도 길고 긴 하루해를 줄이려고 하는 마음에서 하는 짓이다.
아내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양치질부터 먼저 한다. 커피 마시기 전 입 안에 청량감을 주기 위해서기도 하고, 밤새 세균이 득실거린다는 입 안을 청결히 하고 난 후에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해서이기도 하다. 매사에 건강과 연계해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그게 꼭 맞아서라기보다 그런 데라도 기대고 싶은 허한 마음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또 건강을 위한다는 것도 오래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받지 않고 편안히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건강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것이 노년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아닐까 싶다.
내 발소리에 아내가 그제서야 주섬주섬 일어난다. 옛날 같으면야 아침 바쁜 시간에 이런 일들은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지만 매사가 멈추어 선 듯 천천히 흘러가는 노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쯤해서 나는 부엌으로 간다. 그리고 커피 봉사를 하기 위해 커피잔에 라떼 한 봉씩을 털어 넣고 물을 끓인다. 이런 봉사라도 해야 하루 삼식이 하는 미안함을 그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사실 이런 마음 씀씀이도 나이가 제법 들고 난 후에야 갖게 된 것이다. 아내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주변을 객관적으로 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자세가 자연스레 나를 평화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렇게 늦게나마 철이 든 덕분에 누리게 된 마음의 평화가 바로 또 다른 노년의 일상으로 전개되는 게 아닌가 스스로 공치사하며 산다.
어쨌든 늙은이의 일상은 느리지만 상황에 따라 편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평소와는 좀 다른 일이 생겼다. 커피포트 물이 끓어 잔에 물을 부으려고 돌아서는 순간, 창밖으로 누런 황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화들짝 놀랐다. 대명천지에 어찌 용이 나타날 수 있으랴 싶어서다.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살펴본다. 그랬더니 뜰에 서 있는 제법 굵은 소나무 둥치가 누런 색깔로 빛나며 하늘을 향해 가지를 힘껏 뻗치고 있었다. 다른 소나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직 그 소나무 뒤틀어진 가지 아래 부분만이 누렇게 빛이 나고 있는 거다. 마치도 황룡이 승천하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순간 ‘아,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하는 기대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아내를 서둘러 부른다.
“어머나, 어떻게 저렇게 색깔이 변했지?”
아내도 놀라 소리를 지른다. 어쨌든 놀라움 속에서도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와 바람만큼은 더욱 굳건해진다. 그러면서도 전후좌우를 세세히 살펴본다.
“저게 소나무 보굿에 핀 이끼가 겨울철이라 누렇게 변한 걸 우리가 이때까지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아내에게 말한다.
“글쎄,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나는 가까이서 확인하기 위해 잠옷 바람으로 나선다. 뜰에 나서자마자 진기한 장면을 남기기 위해 휴대폰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데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위치를 바꾸는데 그에 따라 누런 색깔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번뜩 빛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맞다! 빛 조화 때문에 그렇구나. 이제 막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른 태양의 강렬한 붉은 햇살이 우리 집 유리창에 반사되어 하필 S자로 굽어진 소나무 둥치에만 비춰지니까 황룡처럼 보였던 거구나.’
한참을 신기한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옛날 중·고교 시절에 했음직한 실험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하지만 살아보니 세상만사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일만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황룡이 되었든 그냥 반사된 빛이 되었든 기적 같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소망만을 빌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기대와 바람은 나이 들면서 자신의 한계를 몸으로 느끼고 천우신조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아닐는지.
한낮이 지나 뜰을 거닌다. 걷는 거라도 하지 않으면 무위(無爲)의 하루가 될 것 같은 마음에서 하는 짓거리이다. 매사가 새로운 시도보다는 늘상 해오던 것만 하게 되는 노년의 일상. 매사에 건강과 연계해서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는 일상. 또 어떤 좋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목을 메게 되는 일상. 이런 것들이 내가 처한 노년의 일상이 아니랴 싶다. 어쨌든 늙은이 일상은 느릿느릿 자기 편한 대로 흘러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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