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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에 물들어 가는 꿈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학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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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에 동네 공원을 찾는다. 으늑한 뜨락에는 오늘따라 지나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아 휑하기만 하다. 무시로 지나는 실바람만 스르륵 다가와 말없이 옷깃을 스치고 간다. 눈에 보이는 정경이 마치 사진 속 장면처럼 고요 속에 머물러 있다. 흐르던 시간마저도 흠칫 멈춰선 듯하다.
공원 의자에 기대앉아 망연히 건너편을 바라본다. 때마침 떨어져 가는 해님이 얼굴을 붉히며 저어하듯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다. 뭇 새들도 옹기종기 모여들어 하루가 아쉬운 양 소란스레 합창하는 동안, 서녘은 온통 감색으로 물들어 그윽한 한 폭 풍경화를 마무리하고 있다. 불꽃처럼 번지는 낙조를 바라보노라니 내 안에 숨죽이고 있던 온갖 사연도 묶여 있던 매듭을 풀어 제치고, 하나둘 허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때로 잊기도 하고 묵혀두던 기억조차 어느새 노을빛에 젖어들어 꿈결 같은 긴 여정을 떠난다. 인생 계절이 깊어 갈수록 마음밭은 푸석푸석 윤기를 잃고, 적적한 기운만이 감도는 요즈음이다. 그래서일까. 살아온 갈피마다 쌓인 응어리가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 희미해진 지난날 흔적을 들춰낸다.
한참 방황하던 대학 초년 시절에 친구 자취방을 찾아갔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우연찮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울대학교 교양 국어를 집어 들었다. 뒤적거리다가 번쩍 눈에 꽂히는 글 하나와 만났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지은 「진주」라는 단편이다. 숨 쉴 겨를 없이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글을 대하면서 느꼈던 전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허기로 갈팡질팡하던 내 의식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살을 만난 듯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한 소년이 연상인 소녀를 열렬히 사랑한다. 거듭된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못내 소년을 거부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극심한 실의에 빠져 버린 소년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창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녀 역시 솟구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못내 소년을 따라 죽는다.’
마치 신화 같은 사랑 이야기이자, 마르셀 프루스트다운 심미주의 미학이 숨어 있다. 정작 내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 건 작가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결미이다.
“인생은 소년처럼 살려는 것이 아니라, 소녀처럼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순간, 청소년 시절부터 눈앞 현실과 친화하지 못하고 무시로 흔들리던 내 모습을 떠올렸었다. 보이는 세상은 온통 무가치하고 살 만한 가치조차 없다는 피폐한 의식이 스멀스멀 자라나 등을 돌리고 지냈다. 걷잡을 수 없는 방황으로 번지자, 결국 고통스러운 수렁에서 벗어나고자 책 속에 파묻혔다. 그 당시 출판사마다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세계문학전집에 매달렸다.
문학사에 이름을 새긴 숱한 작가와 만났다.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은 빛나는 작품도 찾았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쓴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은 그야말로 가슴 떨리게 하는 감동으로 이끌었다. 지금까지도 그 잔영이 짙게 깔려 있다.
또한 기진할 때마다 도피하듯 음악에도 빠져들었다. 오묘하기 그지없는 음률에 몸을 맡기고, 막힘없는 먼 우주로 자유여행을 떠났다. 애처로운 인생 노정에서 고뇌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고 시린 마음도 달랬다. 그토록 한쪽으로만 치우치다 보니 갈수록 세상일과 친화하지 못하고 내 안으로만 숙어 들었다. 이게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서슬 시퍼런 세상이 가로막는 도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고3이 되어 대입과 직면하자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탈진했다. 어렵사리 학교를 마치고 강원도 깊디깊은 산골에 몸을 숨겼다. 하늘만 동그마니 열려 있는 그곳에서 옹이 진 마음을 추슬렀다. 거듭된 성찰과 자각을 통하여, 인생을 살아가자면 이겨내야 하는 아픈 현실이 있다는 사실도 몸소 깨달았다. 격리된 시간 속에서 등졌던 세상과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큰가도 깨우쳤다.
해질녘 석양빛에 곱다랗게 물든 하늘가를 바라보며, 꿈꾸듯 지나쳤던 젊은 날을 아스라이 눈앞에 그려본다. 손쓸 사이도 없이 훌쩍 기울어 버린 인생 계절을 돌아보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그리움이 스며든다. 삶은 삶대로, 꿈은 꿈대로 달리 존재하는 게 아니리라. 마치 동전처럼 앞과 뒤가 붙어 있는 한 몸일 뿐이다. 그 시절에 나는 그런 사실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쪽 길로만 내달렸다.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 뒤안길을 더듬는 동안, 깊숙이 숨겨두었던 보석함을 열어본 듯한 희열을 느낀다. 예까지 와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소년처럼 살려는 의지보다는 소녀와도 같이 주변을 늘 꿈꾸듯 맴돌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거센 파고에 흔들리면서도, 실은 영원을 향한 바람처럼 가슴 한편에 새겼던 꿈길을 걸어온 셈이다.
모든 흐름이 그러하듯 누가 하라 해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어쩌면 내게는 이런 기질이 태생적으로 주어졌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청소년기를 보내며 우울한 감성까지 파고들자, 주체할 수 없는 꿈결을 헤매는 가운데 늘 정신적인 목마름을 느끼지 않았었나 싶다.
마지막 여광이 사그라들자 새털같이 가볍게 땅거미가 내린다. 비어 있는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어둠을 가만히 쥐어 본다. 아무런 무게나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하듯 삶과 추억도 그저 꿈처럼 흔적 없이 스러져 갈 뿐이리라.
미력하나마 이제는 게을렀던 글 작업에 흩뿌려졌던 마음을 단단히 모아야겠다. 잔가지들을 거두고 알짬만을 모아 그윽한 메아리처럼 울림이 가득한 글을 지어야 한다. 그 일에 힘을 쏟고 애젊던 시절이 남긴 상흔까지 다독이며, 꿈꾸던 발걸음을 마저 내딛고 싶은 심정 가득하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여백이 저토록 곱디고운 노을빛으로 한껏 물들어 가길 진정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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