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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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흥부설전>을 무대에 올렸다. 전통 판소리 <흥보가>가 고창의 특산물인 복분자를 만나 새롭게 태어난 작품이다. 내용은 기존 흥부전처럼 형제간의 극과 극의 상황을 다룬 ‘선악 형제담’, 제비가 씨앗을 물어다 주는 ‘동물 보은담’, 그리고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무한 재보담’을 새롭게 재해석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전통 판소리의 ‘박씨’가 ‘고창 복분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흥부는 진짜 복분자를 나누어 부자가 되고, 놀부는 가짜 복분자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복분자가 무엇인가, 바로 힘의 상징 아니던가. 진짜 복분자를 마신 흥부의 기운은 ‘오동 북통’에 덧댄 소가죽이 찌지직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진풍경을 자아낸다. 절정의 순간이다. ‘흥’과 ‘복’을 버무린 해학 덕분에 관객들은 울고 웃었고, 공연은 몇 차례 앙코르 무대로 이어졌다.
공연을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 처마 밑 제비가 떠올랐다. 여름이면 제비와 눈맞춤하며 자랐다. 이른 봄에 찾아온 제비는 처마 밑에 집을 지었고, 바지랑대에 의지한 빨랫줄은 제비들의 전용 무대였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합창하던 그 청아한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참새는 훠이훠이 하며 내쫓았어도, 제비만큼은 길조로 여겨 마당에서 주인 행세를 했다.
새끼제비가 부화하면 어미제비 한 쌍은 잠자리 같은 곤충을 잡아 나르느라 분주해졌다. 나는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들판에서 화려한 비행 쇼를 펼치던 제비가 어느새 입에 먹잇감을 물어와 새끼들에게 한입씩 넣어주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마치 할머니가 마실 다녀오시는 길에 허리춤에서 꺼내 주시던 먹거리가 나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제비는 참 고고한 새다. 매년 4월 동남아에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길러서 가을이 되면 미련 없이 떠난다. 살아 있는 곤충만 사냥하고 빨랫줄이나 전선에 앉아 흥겨운 노래를 한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나 땅에는 좀처럼 내려앉지 않는다. 침으로 논흙을 버무려 집을 지을 때만 땅을 밟을 뿐이다. 그 맵시는 언제나 정갈하고, 비를 맞아도 그 자태가 날렵하다. 언제나 둥지는 사람이 사는 집의 처마 밑에 틀어서 쥐나 뱀과 같은 천적을 피하고, 주인집 주변의 해충을 잡아주니 그야말로 상리공생(相利共生)의 표본이다.
고고하게 살아가는 제비가 있는가 하면 인간 세상에는 전혀 다른 제비도 있다. 바로 복부인을 노리는 ‘제비족’ 말이다. 제비족의 어원은 꽤 흥미롭다. 조선시대 ‘잽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본래 소리판에서 북이나 장구를 치는 이를 ‘북잽이’, ‘장구재비’라고 불렀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박자를 맞추고 추임새로 흥을 돋우지만, 이 ‘잽이’의 기분이 틀어지면 ‘엇박자’로 판을 망치기도 했다. 그래서 여성 소리꾼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처럼 여인을 쥐락펴락하며 유혹하는 이들에게 ‘잽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훗날 발음 표기 그대로 ‘제비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로는 그들이 입는 연미복이 제비 꼬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제비족과 실제 제비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예전에 외모에 유독 신경을 쓰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바지 주름이 생길까 봐 버스를 타면 절대 의자에 앉지 않았고, 머리는 가지런하고 구두는 늘 반짝거렸다. 제비는 지지배배 지저귀며 먹이를 사냥하지만, 제비족은 감언이설로 “사모님!”을 연발하며 상대의 지갑을 노린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인생 2막의 나, 어느덧 고희의 나이이니 제비족은 언감생심일 터. 그런데도 ‘노년의 제비 5계’를 세워보려 한다. 먼저 옷에 각을 잡지는 않더라도 드레스 업 해야겠다. ‘사모님’ 같은 군더더기 말보다 말수를 줄여야겠다. 남의 주머니를 노리는 게 아니라 내 지갑을 기쁘게 열어야겠다. 제비처럼 빠르진 못할지라도 부지런히 걷고 움직여야겠다. 마지막으로 해충을 잡아주는 제비처럼 상대에게 상생의 덕담을 건네야겠다.
봄이면 왔다 가을에 미련 없이 떠나는 제비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제비 5계를 마음에 담고 살아보련다. <고창흥부설전>의 이야기처럼 고창 사람으로서 선운산복분자주를 마시며 제비의 자태에 흥부의 마음결을 더하면서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