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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삼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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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군 대현면 장생포리 205번지. 지금은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동, 나는 이곳에서 1942년 장생포우체국 직원이던 김해김씨 아버지 김용준, 경주김씨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때라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고 바닷가에는 일본 가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여관도 있고 요정도 많았다.
봄철부터 가을까지 장생포항은 고래잡이로 시끌벅적했고, 돈과 고래고기 냄새가 가득했으며, 선술집에서는 밤새도록 남정네들과 작부들의 노래 가락이 흘러나와 장생포 바다를 수놓았다. 우리 집은 고래를 삶는 집이라 방 여섯 칸과 마루, 집 마당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마대에 돈을 넣어놓고 베개 삼아 누워 자거나 옆사람과 인생사를 도란도란하는 동안 밤은 깊어갔다. 나도 옆에 누워 상인들의 얘기를 듣다가 스르르 꿈길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장생포항 저 멀리 방어진 어귀에서 고래 잡고 들어온다는 고동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면 나는 그대로 부두로 달려나가고 상인들도 너도나도 일어나 부두로 몰려나오면서 돈 들어 있는 마대를 메고 허겁지겁 나오다가 넘어지곤 야단법석이었다. 장생포 사람들은 집에 보관 중이던 대형 고래 해체 긴 칼을 들고 이집 저집에서 바쁜 걸음으로 부두로 집결하고 동네 농악대의 농악 소리는 높아만 갔다.
먼동이 틀 무렵 대형 참고래를 옆구리에 찬 고랫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뚜∼ 뚜∼ 고동 소리를 내면서 장생포 주민들의 환호를 받고, 고랫배 앞쪽 고래총 작살 앞에 우뚝 선 개선장군 박 포수가 손을 들어 답례한다.
해체장에 양육된 고래는 1시간 만에 해체되고 생고기는 울산, 부산, 대구로 팔려나가고 삶을 고기는 우리 집 대형 가마솥에 들어가 상인들이 직접 장작을 밤새워 지펴서 삶아내어 간이 위판장에 진열해 놓았다. 나는 동네 꼬마들과 삶은 고래고기를 얻어먹고 신이 나서 바닷가에서 노래 부르고는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 꿈길을 걷는다.
우리 집에서 고래를 삶을 때 상인들에게 장작값과 가마솥 5개를 사용한 사용료를 받았고 방값은 받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울산 시내 태화강가의 내황마을에서 1906년 전마선에 살림도구를 싣고 할머니와 태화강을 따라 장생포 포구에 자리 잡고 고래사업을 시작한 제1호 고래사업가이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떠나고 남겨둔 포경회사와 포경선은 한국인 손으로 넘어왔으며, 고래는 계속해서 많이 잡혔고, 1950년 6·25가 터지자 부산, 울산, 대구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인민군 손에 들어가니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로 장생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최해용 씨가 구룡포에서 고기잡이배를 이끌고 피난 와서 우리 집 부두에 정박해 그때부터 포항이 수복될 때까지 한 달 보름 정도 우리 집에서 살았다. 대부분 피난 오면서 맨몸으로 왔기에 모두 가난했다. 허기진 배를 고래고기로 채웠다. 잠은 노숙하거나 고래 창고에서 기거했다. 초등학생 3학년인 나에게도 피난민 친구도 생겼고 고향 이야기도 잘 들었는데 이북 웅기, 원산, 함흥에서 온 피난민 아이들도 있었고 피난 오다가 누이나 동생을 잃어버린 아이들도 있었다.
장생포초등학교는 군인들에게 비워주고 그때부터 산과 들을 떠돌면서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가 비가 오면 흠뻑 맞고 가까운 동네 아무 집이나 들어가 비를 피했다.
집주인은 고구마를 삶아 선생님과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고 전쟁 나간 남편 걱정에 죽고 싶다면서 이놈에 전쟁 언제 끝나노? 하면서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에서 활동하던 신파극단들이 후방으로 떠돌다가 장생포까지 들어와서 고래창고에서 임시무대를 만들어 신파극을 공연했다. 소도구, 대도구, 의상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초대권을 갖다 주고 임시로 빌려서 입고 연기를 했다.
막내삼촌은 배우들과 친해서 연극 연습하는 데 들락날락하더니 배역을 하나 얻어 출연하면서 앞으로 배우가 되겠다고 호기를 부리다가 신파극단이 떠나자 함께 보따리 싸 들고 떠나 그 길로 신파배우가 되었다.
낙동강과 형산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하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북진하자 피난민들도 대부분 떠나고 이북이 고향인 피난민들은 선뜻 떠나지 못했다.
그 가운데는 몸이 약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향 가도 먹을 것도 없는 아이들은 장생포에서 살았다. 피난민 소년과 소녀들 중에는 80이 넘게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친구들도 많다.
친구 중에 ‘송영부’라는 목소리 좋은 아이가 있었는데 우리와 장생포초등학교 같은 반에서 졸업하고 휴전되자 고향 가서 연세대를 졸업하고 MBC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고 이름을 송재익이라고 개명한 뒤에 스포츠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렸다.
내 고향이라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나폴리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장생포항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마을 뒤 천지산에서 바라보이는 파란 물결, 돛단배, 포경선, 항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용잠반도, 흰갈매기, 바다 위에 뛰어오른 숭어 떼, 이들을 뒤쫓는 바다오리 떼, 멸치잡이배,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고향 산천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웅장하고 무섭게만 보이는 대형 공장들이 즐비하게 둘러싸고 있다.
아! 그 옛날 나폴리보다 아름답던 내 고향 장생포항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그 비린내 나는 신파연극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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