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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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붉게 타오르는 해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 시던 그해에도 일찍부터 무더웠고 장맛비가 질퍽거렸다. 장례식 당일 에는 강아지 오줌처럼 질금거리던 비가 다행히 멈추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처럼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와 엷은 구름 속에 얼굴을 숨기며 펄펄 끓고 있던 태양이 만나면서, 불쾌 지수 를 한껏 끌어 올렸던 날이었다.
우리는 아버지 기일에 제사를 지내지도, 따로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 는다. 자녀들 모두 산소에 모여 추도 예배만 드린다. 장남인 우리 부부 를 비롯하여 분당에 살고 있는 아영이 부부, B시의 남동생 용우가 낮 12시쯤이면 충북 음성의 산소에 도착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 시고 고향인 B시로 내려가셔서 혼자 외롭게 살고 계신다. 어머니도 자 식들을 따라 자신이 영면하시게 될, 산소에 와보고 싶어 하시지만 몇 년 전부터 장시간 차 타기가 힘들어 참석하지 못하신다. 우리 식구들은 산소에서 예배를 드린 후, 가까운 전원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같이하며 정담을 나누고는 헤어진다. 설과 추석에는 바쁘지 않은, 우리 부부만 산소를 찾는다. 우리 부부는 이미 경제활동을 마감했다. 나는 사업차 오랫동안 머물렀던 중국에서 완전히 귀국했고 아내도 교사 정년퇴직을 했다.
아버지는 삶처럼 죽음도 아름다우셨다. 살아 계실 때에도 자녀들의 진정한 사표가 되셨으며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털끝만큼의 작은 짐 도 지우지 않으셨다. 기독교 장로이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십여 년 전, 삶의 큰 격랑을 겪으시고 서울로 올라오신 후 하나님께 더욱 의지 하셨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는 신앙심이 한층 더 돈독하신 듯했다. 아 버지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죽음이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듯 평온함까지 보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0여 년이 지나 내가 그때의 아버 지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기일을 맞아,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 습과 돌아가시던, 그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사업체가 있는 중국에서 일시 귀국해 있었다. 그날 도 아버지를 뵈러 가려고 일찍부터 서두르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살고 있던 하계동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원당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였다.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고 신호를 위반해가며 황급히 도착하 였을 때 아버지는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아침부터 의식을 완전히 잃 으셔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몇 번씩이나 불러 보았으나 눈을 뜨지 않으셨다. 물을 떠서 입에 넣어드렸지만, 삼키지 못하여 흘러내리고 만다. 급히 병원으로 모셔야 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설 응급구조대 구급차를 불렀다. 어느 병원으로 모셔야 할까요? 묻 는 구급대원에게 선뜻 대답 못 하자, 그는 아산병원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내가 구급차에 타고 아내가 승용차로 뒤를 따랐다. 구급
차라지만 승합차 뒷좌석 의자를 들어내고 작은 침대와 의자만 놓여있
을 뿐 구급 장비는 보이지 않았다. 차는 사이렌을 울려대며 행주대교를
건너, 올림픽 대로를 따라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대라 올림픽
대로에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지며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이렇게 지체
하다 차 안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 싶어 초조하였지만, 차들은 거북
이처럼 느리게만 움직였다. 마이크로 양보를 부탁해도 비켜주지 않는
차들이 많았다. 사실 꽉 막혀 있는 상태에서 비켜주고 싶어도 마땅히
비킬 곳이 없기는 했다. 얌체처럼 구급차 뒤에 끼어드는 차 때문에 아
내 차와 간격도 벌어졌다. 호송 중에도 몇 번씩 아버지를 부르며 확인
해 봤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다급하게 달려왔으
나 아산병원 응급실은 명절을 코앞에 둔 재래시장처럼 붐볐다. 입구에
서부터 구급차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침대는커녕 복도 바닥에까지 매
트리스를 깔고 누운, 응급 환자들로 넘쳐났다. 아프다고 큰소리를 지르
는 환자, 링거병을 들고 다급히 뛰어가는 간호사, 의사를 부르는 보호
자, 환자와 보호자, 간호사 등이 뒤섞여 병원이라기보다, 무질서한 장
마당이었다. 의사를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보이지도 않았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전쟁터의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이러다 의사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실 것 같아 난감했다. 구급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병원에서는 새로 들어오는 응급 환
자에 대해 관심은커녕, 돌볼 여력이 없어 보였다. 연락을 받고 먼저와
응급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영이 어디로인가 전화를 해보더니, 분당
차병원으로 모시자고 한다. 차병원에 매제가 잘 아는 의사가 있다며 그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망설임 없이 구급차를 돌렸다. 차병원은 응급실
의 침대가 여기저기 비어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매제의 후배라는 40대
중반의 훤칠하고 깔끔한 의사가 미리 연락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로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다 급하게 움직이며 포도당, 지방주사 등의 필요한 응급처치를 차례로 받 으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눈을 뜨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병중이면서도 20여 일 동안 물만 드셨다.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져 의식을 잃으셨고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상태가 되신 것이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수액 한 병이 거의 다 들어갈 즈음, 아버지의 손과 팔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낮잠을 주무시다 깨신 것처럼 가만히 눈 을 뜨셨다. 침대 옆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우리 부부, 아 영을 차례로 쳐다보셨지만 아직은 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나와 아영이“아버지. 아버지”하고 번갈아 부르자 잠시 후 고개를 돌 리며 주위를 살피시더니 이제야 정신이 드신 듯, 이곳이 병원임을 아신 것 같았다. 곧이어 상반신을 일으키려 애쓰시면서“왜 병원으로 데려 왔느냐”며 우리를 나무라셨다. 기진하여 말문을 닫으신 지 열흘도 더 되었는데 의외로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또렷했다. 집으로 가시겠다 고 자꾸만 침대에서 내려오시려 하면서 수액이 들어가고 있는 주사를 빼라고 어린아이처럼 성화셨다. 연하늘색 근무복이 예쁜, 젊은 간호사 가 주사기가 놓여 있는 스테인리스 밧드를 들고 들어오자,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병원 소독약 냄새가 간호사와 함께 물씬 딸려 들어 왔 다. 아버지는 마른 삭정이 같은 팔을 내밀며 미리부터 손사래를 치신 다. 간호사가“할아버지,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고하자깊은골이 파여 진 손으로 환자복을 움켜쥐고 맞지 않겠다고 거부하신다. 간호사 는 당황스러워하며“할아버지가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 라며 어리둥절했다.
간호사는 가족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슨 영문인지 해명해보라는 듯 눈길을 보냈다. 나는 간호사를 금방 이해시키기가 마땅치 않아, 주사 놓기를 계속 시도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마땅한 대답을 듣 지 못한 간호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주사를 맞으셔야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실낱같은 힘을 쏟아 간호사의 팔을 기어이 밀 쳐내셨다.
“할아버지, 그러시면 뭣 하려고 병원에 오셨어요? ”
그래도 들은 척도 않으신다. 간호사는 난감해하며 밧트를 들고 우두 커니 서서 어쩔줄 몰라했다.
“나는 살려고 온 것이 아니다. 죽으려고 왔다.”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할아버지, 병원은 사람 살리는 곳입니다. 이러다 정말 돌아가십니다.” 간호사가 아무리 설득해도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부하셨다. 간호
사는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 의사 선생님을 불 러야겠다며 나가버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식구들이 입을 모아“기왕 병원에 오셨으니 치료를 받자”며 사정사정해도 고개를 흔드셨다. 아버 지는 언제 혼수상태에 빠졌나 싶을 정도로 멀쩡하여, 이제는 말씀도 잘 하신다.
“공장을 짓고 있다더니, 중국에 안 들어가 봐도 괜찮으냐? 언제쯤 완 공되느냐? ”
나에게 물어보셨고 여동생에게도“정 서방 회사에 보내고 왔나? ”하 셨다. 의사가 다시 들어왔다. 방금 나갔던 간호사도 이제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듯, 밧드를 그대로 들고 뒤따라왔다. 의사의 하얀 윗도리에는 ‘의사 최영일’이라는 파란색 이름이 새겨져 있고 아래쪽 포켓에는 볼 펜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의사는 여동생의 설명으로 치료거부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버님,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 지금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눈길을 주지 않으며 들은 척도 않으신다.
“그러시면 뭣 하러 병원에 오셨습니까? ”
화를 내는 척, 큰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충분히 알아들으실만하니 말씀드립니다만 아버님은 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이 결정한다 해도 생명의 가치 는 지켜져야 합니다. 생존하고 있는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은 설사 본 인이나 보호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살인이나 살인방조죄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우리 의사들은 억지로라도 치료를 해야 하는 것입 니다. 저를 감옥에 보내시렵니까? 그렇지 않으시면 저의 말을 따르셔 야합니다.”
의사는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설득하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의사의 말에 대답하셨다.
“나는 이미 치료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 더 내 목숨을 연장시 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신다. 아버 지는 의사와 실랑이하는 것도 힘에 부치시는지 간신히 들어 올린 손으 로 손사래만 치셨다.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모든 치료행위가 쓸데 없는 짓일 뿐이다.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에게 죽지 못하게 여러 가지 검사와 바늘을 찔러대며 귀찮게 구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자 신의 병이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이제는 아무리 치료한다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만 심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아신 다. 아버지는 고통 없이 죽을 권리를 스스로 지키려는 것이었다.
“아버님의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의사 생활 20년에 아버님 같으신 분 은 처음입니다.”
의사도 아버지의 고집을 어쩌지 못해, 이미 응급조치는 해 두었으니 좀 더 두고 보자며 돌아갔다.
간호사가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뽑으려 해도“그것도 할 필요 없다” 하시며 거부하셨다. 혈액검사는 치료가 아니라 건강 상태를 체크 해보 려는 것이라며 어머니와 내가 한참을 설득하자 그제야 귀찮아서 못이 겠다는 듯 헐렁한 환자복 소매에서 앙상해진 팔을 내미신다. 말린 가죽 처럼 탄력이 없어진 피부 속으로 혈관이 깊이 숨어들어 찾기가 힘들었 다. 아버지가 짜증을 부려도 노련한 간호사는 기어이 주사기 가득 새까 만 피를 뽑아갔다. 원주에서 군 복무 중인 나의 큰아들이자 아버지의 장손인, 형서가 외출을 나와 병원을 찾아왔다. 아버지도 여느 할아버지 들처럼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특히 형서가 첫 손자라 태어나서부 터 각별하셨다. 아버지는 손자를 보시고 반가웠던지 오랜만에 환한 얼 굴로“죽기전에한번더볼수있어다행”이라며 형서가 내민 손을 잡 으셨다. “군대 생활은 힘들지 않느냐? 여기까지 뭘 타고 왔느냐? ”등 등을 물어보신다. 아버지는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손자와 같이하 는 시간이 즐거우신 것 같았다. 형서가 귀대해야 할 시간이 되어, 작별 인사를 드리자“부대에 돌아가서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때 휴가 나오너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의식은 거짓말처럼 또렷했다. 음식을 거부하신 지 열흘쯤 후부터는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어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지점 을 넘나들었다. 20일쯤 후부터는 완전 의식을 잃으셨다. 지금은 음식을 조금씩 드실 때와 같은, 완전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시 겠다며 부축해 달라고 하신다. 내가 화장실 변기까지 부축해 드렸다. 집에서도 일어서지 못하셔서 앉아서 엉덩이를 밀고 화장실에 가며, 끝 까지 자존심을 놓지 않으셨다.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와 혈압, 맥박 등 으로 보아 아직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며 식도에 천공이 생길 때까지 당 분간 돌아가시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의사의 말에 돌아가실 때까지 입원이 길어질 것으로 생각하여 아버지를 응급실에서 일반병 실, 1인실로 모셨다.
병실을 옮긴 후 우리 부부와 아영이는 내일 다시 오겠다며 어머니 혼 자만 남겨두고 오후 2시쯤 병원을 나섰다. 당분간 돌아가시지는 않겠 지만 계속 치료를 거부하시면 결국 며칠 못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분당에서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구리를 거쳐 하계동 집에 도착할 때 쯤이었다. 채 한 시간도 못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시 이상해지셨 다”는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
금세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며 급히 차 머리를 돌렸다. 병원에 도착 했을 때, 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스럽게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우리 보기와는 다르게 의사는 예사 잠이 아니라고 했 다. 아무래도 임종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다른 식구들에게도 연락하라고 했다. 그냥 주무시는 것같이 보였으나 혈압, 맥박, 심전도 등 계기판의 수치들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듯했다. 불과 한두 시간 전 까지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나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병원을 나설 때만 해도 의식이 또렷했었다. 몇 시간 동안 의식 을 되찾았을 때가 오히려 비정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몸의 기능이 일시 적으로 정상 회복되었다가 다시 꺼져가던 상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은 마지막 남은 촛농을 전부 태워 불꽃을 만든다. 20여 일 동안 한 숟갈의 미음도 넘기지 않으셔서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 버지가 얼마동안이라도 정상적인 의식을 되찾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생명을 거두어 가기 직전, 세상과 작별 인사라도 나누라는 하나님의 배 려였을까?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식솔들을 보고 떠나시려고 실낱같은 기력을 전부 쏟아, 잠시 정신을 차리신 것일까? 의식을 또렷하게 회복 하여, 하셨던 말씀과 행위들이 꿈속에서 헛것을 본 듯, 기적처럼 느껴졌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돌아가셨다면 가족들도, 특히 사랑 하는 손자도 눈에 담아보지 못하셨을 것이다. B시에 있는 용우에게도, 원당교회 목사님에게도 연락드렸다. 사촌 등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연 락했다. 오후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깊은 잠은 한밤중이 되도록 계속되 었다. 용우와 친척들이 도착하였고 목사님도 교인들 칠팔 명과 함께 도 착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다그치며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깨신 듯하였으 나 눈뜰 기력조차 없었던지 끝내 뜨지 못하셨다. 계속된 아버지의 잠은 밤 12시 직전에 호흡이 가빠지면서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심전도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지고 빨간불이 깜박거리며 삐삐 소리와 함께 멈추었 다. 젊은 의사가 기계적으로 심장충격기로 회생시켜 보려고 하였으나 내가 말렸다. 아버지가 충분히 힘드셨기에 이제 고이 보내 드리고 싶었 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송가 소리를 들으시 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당년 77세이셨다.
당시 나는 사업체가 중국에 있어, 두어 달씩 중국에 머물다 귀국하곤 하였다. 중국 진출 이후 그동안 시(市) 정부 공장을 임차하여 사용하였 으나 그 당시에는 자체 공장을 건축하고 있었다. 그날은 공사 때문에 평소 주기보다 귀국 날짜가 좀 늦었다. 오후 늦게 김포공항에 내려, 곧 바로 부모님 댁으로 갔다. 부모님 댁이 공항에 가까운 원당이라 귀국 시에는 언제나 먼저 들려 인사를 드리고 같이 저녁 식사 후 집으로 가 곤 했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평소 환하게 맞아주시던 어머니의 표 정과 다르게, 왠지 굳어있는 듯했다. 거실에 앉자마자 늘 그랬듯이 별 일 없으시냐? 고 물었다. 어머니는 울음을 참고 계셨던 것 같아, 나를 보자 기어이 울음을 보이며 말씀하신다.
“너거 아버지가 식도암에 걸렸다 칸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깜짝 놀란 내가“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아버지를 쳐다보며 다그치자 그제야 무겁게 입을 떼셨다. “얼마 전부터 목 안에 뭐가 걸리는 것 같고, 딱딱한 음식은 삼키기가
불편하여 동네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았더니 식도암 같다고 하더 라.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보라고 하는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50이 다 되도록 양 부모님이 건재하다는 사 실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얼마 더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며, 심란해졌다. 암에 걸리면 대부분 힘들 게 투병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 죽고 말기 때문이다.
“의사가 10cm쯤 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병원에는 언제쯤 가보셨습니까? ”
“20일 정도 됐다.”
“그동안 왜 큰 병원에 가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얼마 전 전화드 렸을 때, 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말씀하셨다면 내가 좀 더 일 찍 귀국했을 텐데요.”
참담하여 원망하듯 말을 쏟아냈다. 두어 주일쯤 전에 안부 전화를 드 렸다.
“공장을 신축 중이니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감독 좀 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아버지가 건축을 알지 못하시지만 종일 무료하게 계시는 두 분이 딱해 그 핑계로 얼마간 중국에 와서 계시라고 한 말이었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한국에 언제 들어오느냐? 들어와서 이 야기하자”하셨다. 그동안 동생들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귀국 하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암이라는 말을 들으신 후, 20여 일 동안 두 분이 얼마나 불안과 심적인 갈등을 겪었을까? 바쁜 나에게 빨리 들어 오라는 말씀도 못 하시고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귀국을 늦추기까지 했다. 가슴이 저리고 목이 잠겨와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나는“요즈음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암도 충분히 고 칠 수 있습니다”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지만, 상식이 풍부하신 아버 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나 싶었다. 나를 기다리지 말고 동생들에게 말씀하셔서 빨리 처치를 받으실 것이지. 기어이 나를 기다리셔야 했나. 분당에 아영이가 살고 있지만, 굳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큰일에는 딸과 사위보다는 큰 자식이 만만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날로 동생들에게 전화하여 아버지의 발병 사실을 알렸다. 깜짝 놀 라며 울먹이는 아영이에게“입원을 시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어느 병원이 좋겠느냐?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동생이“얼마 전에 시집 고모가 강남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조용하고 좋더라”며 삼성동 시 립 강남병원이 좋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입원을 시켰다. 강남병원은 종합병원이지만 메 이저 병원들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비교적 깨끗했다. 3일 동안을 입원 해 계시면서 이방 저 방을 오가며 정밀 검사를 받으셨다. 입원해 계시 는 동안에도 습관처럼 하시던 산책을 멈추지 않으셨다. 마지막 날 최종 적으로 식도암 판정을 받으셨다. 암이 상당히 진행되어, 3기라고 했다. 식도암은 스스로 자각 했을 때는 이미 많이 진행된 후라고 한다. 의사 는수술을받으면2년정도는더살수있을, 것이라했다. 수술을받으 려면 국립 원자력병원이 좋다며 추천해 주었다. 나는 각종 필름과 검사 자료들을 챙겨 공릉동 원자력병원을 찾아갔다. 암 전문병원에서 수술 가능 여부와 수술에 따른 구체적인 상담을 해보고 싶었다. 원자력병원 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암 환자들로 들끓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서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내 뒤로도 많은 환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 면담은 불과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빠지고 남은 머리가 희끗희끗 한 의사는 환자가 평소에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시느냐? 음주와 흡연을 많이 하시느냐? 등등을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시 지만, 술이나 담배는 하지 않으셨다. 가져간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본 의사는 기대수명을 80세로 보고, 아버지는 아직 몇 년 남았으니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수술 전 항암치료를 통해 암세포를 최대한 줄인 후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절제범위에 따라 다르지만, 수술에는 6시간 이 상 소요되며 2주일 정도의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식도암은 5년 생존 율이 30% 미만으로 어려운 암 중의 하나라 했다. 수술하면 식도로 음식 물을 삼킬 수 없어, 목 아래쪽을 뚫어 관을 삽입하여 음식을 주입 시켜 야 한다고도 했다. 병원을 나서면서 생명을 얼마나 더 연장시켜줄지 알 수 없는, 수술이 여간 힘든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단호히 수술을 거부하셨다. 아버지는 애초부 터 수술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해 오시기도 했다. 2∼3년의 생명 연 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짧은 생명 연장을 위해 입원, 수술 등 고통스러운 과정도 싫다고 하시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살다 가 죽겠다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이 틀리지는 않는다. 의학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연장시키기도 한다. 대 부분 사람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면서까지 불확실한 수술을 받는 다. 이는 차마 삶의 끈을 놓지 못해, 실낱같은 희망이라고 붙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식으로서 비록 작은 희망이라 할지라도 포기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수술 거부에는 수술비용도 걱정하셨을 것 으로 짐작된다. 자식들에게 조금의 경제적인 부담도 지우고 싶지 않으 셨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검사를 마쳤지만, 수술을 받지 않아 따로 항암치료도 필요치 않다고 했다. 결과를 판정받은 후,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떤 처치도, 약도 없었다. 아버지가 아무런 방법도 없어, 그냥 돌아가 시는 날만 마냥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하지만 정작 아 버지 자신은 퇴원한 이후에도 평온하셨고 일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 았다.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시고 저녁 예배, 심방 등 교회 행사에도 참석하셨다. 이전과 여전히 다름없이 아침 식사 후 뜨거운 커 피를 마셨으며 신문을 읽으시고 TV 뉴스를 시청하셨다. 틈틈이 성경을 읽으시어, 완독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점심 식사를 끝낸 후에는 매 일같이 원당 주위의 들판을 두어 시간 정도 산책하셨다. 평소에도 아버 지는 취미나 좋아하시는 잡기(雜技)가 없었다. 자식들이 보기에도 아버 지가 너무 무료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 낚시도구를 사드리기도, 분재, 수석 탐석 등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취미생활은 젊을 때부터 꾸준히 해와야지 나이 들어 시간이 생겼다고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한동안은 음식 드시는데, 크게 지장이 없었고 몸도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다. 퇴원하신 지 얼마 후, 아영이가 수원에 있는 유명한 한의원에서 기적적으로 암을 완치시킨다는 약을 사 왔다. 아버지는 열 심히 드셨다. 정말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셨는 지 모를 일이었다. 20일치 정도의 약을 다 드셔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 나지 않았다. 주위에서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는 등의 약을 추천했 지만, 아버지는 따르지 않으셨다. 나는 암을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정신 력이 필요하다며,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시라며 당부드리곤 했다. 별달리 해드릴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식으로서 지켜보는 것 외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자신이 영면하실 장지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아버 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해,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있는 선산은 코밑까지 공장들 이 들어차, 언제 개발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부터 서울 근교와 경기도 지역의 공원묘원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마땅한 곳을 구하지 못해, 충북 음성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처음 이 묘역에 들어섰을 때 그 규모에 놀랐다. 잘 가꾸어진 망자들의 작은 도시였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에워싸고 입구만 트여있는 아늑한 명당 같았다. 여기라면 아버지를 모셔도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곳에도 위치 좋 은 평지는 빈자리가 없었다. 높은 곳에 계단식으로 된 자리밖에 없었 다. 비가 많이 오면 언덕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내하던 인부 에게 막걸리 값을 쥐어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평 지라며 기독교인 묘역 내에 합장묘를 쓸 수 있는 자리를 알려주어, 계 약할 수 있었다.
B시 교육계의 원로이셨던 아버지는 평생의 교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셨다. 오랫동안 교장으로 재직하시다 사학재단을 인수, 학교를 운영하셨다. 인수 후, 다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내가 아버지와 합류하게 되었다. 6·25때 설립된 학교가 시내 고지대에 위치하여, 부 지가 좁고 통학로도 불편했다. 더 넓고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변두 리에 산을 사서 신축 이전을 진행했다. 부지 토목공사 중 붕괴사고와 사망사고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았다. 결국 이전은 시켰지만 진행 과정에서의 과도한 자금 차입으로 사채이자와 돌아오는 어음을 감당하 지 못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신축이전에 관한 일은 내가 주관하였기 에 부도는 나의 책임이 컸다. 부도 후 식구들은 낯선 서울로 황망히 떠 나왔다. 서울로 올라오신 이후에는, 참담한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버티 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쌓아 오신 교육계와 기독교계 등의 사회적 명예를 한꺼번에 잃으셨다. 명예를 잃으신 말년의 아버지를 지 켜보면서 자책감으로 가슴 아파하였다.
중국에서 공장을 신축 중이었기에 큰 변함이 없는 아버지의 일상을 보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수시로 전화하 여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물었으나“괜찮으니 그쪽 일이나 잘 보라”는 말씀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국에 있을 동안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위해 모든 준 비를 하고 계셨다. 자신의 지난 삶과 다가올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과 고뇌를 하신 것 같았다. 삶이란 언젠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질서이다. 아버지는 이 질서에 순응하시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신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남 지 않은 삶의 일정표를 작성하여, 그 스케줄에 따라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 평소에 쓰시던 사소한 소지품부터 자신이 가시고 나 면 필요 없을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직접 정리하셨다. 옷가지 등은 음성 꽃동네에 보내주라며 따로 싸 놓으셨으며 혹시 자식들이 필요한 물건 이 있는지? 나에게는 아직 새 옷이라며 무스탕 재킷을 용우에게는 시 계를 주라 하셨다. 장례식 사회는 평소 눈여겨보았던지 교회 안 집사에 게 시키라 했으며 장례식장에서 낭독될 자신의 약력도 일일이 적어 놓 으셨다. 문상객에 대하여도 누구에게는 연락해라, 누구는 연락할 필요 가 없다, 등등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시킬 사람들까지 챙기셨다. 홀로 남게 될 어머니에게도 앞으로 어떻게 지내라며 자세히 일러 주셨다. 교 인들이 있다지만 실지로 타향인 이곳에 어머니가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도 없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기 힘 들다. 자식들 집에 같이 살기에도 마땅치 않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향인 B시로 내려가시라고 했다. B시에는 가까이에서 돌보아줄 수 있 는 작은 아들 용우도 살고 있다. 부도가 난지도 10년도 더 지났으니, 체 면 생각하지 말고 옛날 다녔던 교회에 다시 나가라고 하셨다. 옛 교인 들과 친구들도 만나면서 외롭지 않게 살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칩 거 후 연락을 끊고 있던 각별했던 친구들과 삼촌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3일간 B시를 다녀오셨다고도 했다.
한 달 후에 다시 귀국하였을 때 아버지의 상태는 놀랍도록 나빠져 있 었다. 많이 야위셨고 바깥출입을 못 하실 정도로 기력이 떨어져 있었 다. 종일 누워 계시면서 앉아서 엉덩이를 밀며 화장실에 가시는 것 외 는 기동도 못 하셨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기침도 하셨다. 아버 지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진 원인은 본인의 뜻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이미 예정된,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먼 저 죽음을 맞이하기로 작정하신 듯했다. 죽음을 앞두고 고통에 시달리 면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힘들어진다. 더 이상의 삶은 고통의 연장과 식구들의 부담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세세한 부 분까지 일일이 챙기며 신변 정리를 끝내신, 아버지의 마지막 스케줄은 음식 거부였다. 음식이라면 그 무엇도 단호히 거부하셨다. 음식을 드시 지 않아,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귀국 후,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놀 라는 나에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너그 아버지가 빨리 죽으려고 작정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굶은 지가 벌써 일주일도 더 되었다. 죽는 것이 뭐가 급해서 그렇게 서두르 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급한 성격이더니 죽는 것도 급하게 가려고 하 는구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씀을 쏟아 놓 으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계셨다. 뭘 드시기만 하면 이삼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다. 실지 음식을 드시기만 하면, 어머니 생각만큼은 몰라도 이렇게 빨리 나빠지 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성격이 조급하신 편이다. 그 래서인지 자신의 죽음조차도 급하게 서두르셨다. 아버지는 음식뿐 아 니라 병원은 물론 링거주사도 일절 거부하셨다. 내가 귀국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나, 여동생이 조금이라도 드시기를 아무리 간청하여도 완강 하셨다. 미음을 숟가락에 떠서 입에 넣어드리려 해도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어쩌다 입속으로 들어가도 혀로 밀어내신다. 배가 많이 고프실 터인데 입속으로 들어온 음식을 뱉어내는 의지도 대단하셨다. 병원은 물론 이웃에 사는 간호사를 불러 포도당이나 생리식염수를 주사하려 해도 단호히 거부하신다. 내가“목이 타니까, 생리식염수만이라도 맞 자”고 사정사정해도 손사래를 치셨다. 아버지의 결심은 확고하셨다. 냉수로 타들어 가는 목만 조금씩 추길 뿐이었다. 아버지는 음식을 일절 섭취하지 않으면 자신이 언제쯤 가시게 될지 계산하고 계셨던 것이었 다. 마치 하늘나라로 가는 티켓을 미리 예약해 놓으신 것 같았다. 이슬 람 테러리스트들이 거리낌 없이 자살 폭탄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그들 의 신으로부터 사후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도 분명 죽음 후, 구원을 약속받으신 듯했다. 의식이 몽롱할 때는 천사들의 합 창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셨다. 아버지는 이때 하늘나라를 체험하시고 영원한 삶을 믿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생을 믿지 않으셨다면 자신 의 삶을 그렇게 쉽게 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씩 들러, 병중인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원당교회 원로 목사님도 말씀하셨다.
“장로님이 하나님 곁으로 빨리 가고 싶어 하시네요. 하늘나라에서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죽음이란 해가 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밤에도 태양은 반대 쪽에서 변함없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죽음 뒤에도 여전히 하늘나라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 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음식을 거부하신 지 열흘쯤 후부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정 신이 혼미한 상태를 이용해 링거를 놓으려는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주사를 놓으려고 팔을 잡으면 금방 알아차리고 눈을 뜨신다. 아버지는 완벽하게 자신의 삶을 끝내려 하셨다. 그렇게 20일쯤 지나 깊은 혼수상 태에 빠지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단 하루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스케 줄 대로 서둘러 가셨다. 발병 사실을 안 이후, 3개월이 채 못 되었다.
이형기 시인의「낙화」가 떠올랐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 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후략).’
아버지의 뒷모습도 처절하도록 아름다웠다.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누구나 살아온 방식과 모습 그대로 죽기에 마 지막 모습은 그 사람의 삶을 드러내는 거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품위 있는 죽음은 삶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언젠가 읽은, 의사 김경식의 『동행』이란 저서에서도 죽음의 품위에 대해‘품위 있는 죽음이란 더 이 상 치료가 무의미한 시점에서 치료에 매달리며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시간을 가져 주변을 정리하고 가족, 친구와 못다 한 이 야기를 끝낸 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버지는 우리에 게 진정한 죽음의 품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중부내륙 감곡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빨간 복숭아가 매달려 있는 가 로수 길을 따라 공원묘원에 도착했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이르다. B시 의 용우도 분당 아영이 부부도 도착하지 않았다. 물 머금은 초록 잔디 와 빗물에 씻긴 까만 비석이 예쁘게 어우러져 있다. 비석에는 아버지가 생전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460장‘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 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아버지 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죽음의 교훈은 삶도 죽음도 모르는 70살 나에게 깊은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정오의 따가운 햇볕이 아버지의 묘지에도, 우리 부부의 머리 위에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