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7월 6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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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_ 요즘
곳_ 맥도날드 형태의 카페
나오는 사람_ 나 회장(70대)|그 친구(70대)|김 감독(60대)
주요 무대는 일반적인 맥도날드 형태의 카페와 생맥주홀.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 나 회장과 그 친구, 각자 커피잔을 들고 들어와 입구 근처에 앉는다.
나회장 (실내를 둘러보며) 여기 카페에 들어서면 말야, 젊음을 되찾는 기분이야, 자넨 어때?
그친구 회장님, 혼자만 젊음을 되찾아야 되겠습니까? 저 역시 한 사십 년은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허허허.
나회장 웃음소리가 너무 커.
그친구 아, 예! 조심하겠습니다. 지랄하네.
나회장 지랄이라니?
그친구 우린 친구다, 친구! 너만 맨날 회장 할래?
나회장 그게 그렇게 아니꼬우냐? 아니꼬우면 니가 회장 하면 되잖아?
그친구 회원은 너하고 나, 두 명뿐인 회원 회장님은 사양하겠소이다. (웃는다)
나회장 (따라 웃으며 입구 쪽을 바라보다 긴장한다)
햄버거와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입구를 통해 등장하는 김 감독, 60대 나이에 비해 한참 젊어 보이는 사이클 선수의 활기찬 모습이다. 선글라스에 사이클 헬멧, 헤드폰 그리고 등에 걸친 가방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완벽한 사이클맨 모습으로 주변의 시선을 끌 만하다.
김 감독,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나 회장 맞은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등짐을 푼다. 등가방에서 탭북을 꺼내 작동을 시켜 놓고 보면서 커피와 햄버거를 먹기 시작한다.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놀라움과 의혹에 찬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살피는 나 회장과 그 친구. 어쩌다 김 감독과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질겁을 해서 피하며 딴청을 부린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나회장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며) 어쩜 저렇게 죽은 김 감독과 똑같냐?
그친구 (역시 계속 다른 곳을 응시하며) 내 말이 그 말이야. 죽은 놈이 살아온 것 같다. 부활한 건가?
나회장 지깐 놈이 무슨 예수라구? (하며 김 감독을 슬쩍 훔쳐본다)
그친구 (김 감독을 슬쩍 훔쳐보며) 아무리 봐도 똑같애.
나회장 나 참, 세상 살다 별꼴 다 보네. 처먹는 저 꼴도 똑같애. (김 감독을 바라보다 눈길이 마주치자 당황한다)
김감독 (햄버거를 먹다가 굳어진 표정으로 나 회장을 바라본다)
나회장 (억지로 미소를 보낸다)
그친구 (김 감독의 동태를 살핀다)
김감독 (반응 없이 계속 햄버거를 먹는다)
나회장 저 무표정, 황당한 일을 당하고도 반응이 없는 저 무표정한 표정도 어쩜 그렇게 똑같냐, 응?
그친구 맞어, 김 감독 그놈이 지닌 큰 무기였지.
나회장 어휴, 징그러운 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끔찍해. 내가 그놈의 무표정 때문에 번번이 지고 말았잖아.
그친구 그놈 끝까지 싸우는 거 봤어? 상대는 열을 받아 아우성을 치는데도 이놈은 그냥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덤덤하게 바라보기만 하니까 상대가 그만 지쳐 나가자빠지잖아. 안 그랬냐? 번번이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했잖아? 이거 얼마나 고도의 방어수법이냐고? 안 그래?
나회장 말하면 뭣해. 그 무표정한 낯짝에 양잿물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가 지고 만 거야.
그친구 (말을 가로막듯 테이블 밑의 나 회장 발을 툭툭 차며 김 감독을 바라본다.)
김감독 (햄버거를 먹다 말고 불쾌한 표정으로 나 회장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회장 (김 감독의 위압감에 당황한다)
그친구 (김 감독의 동정을 살피며) 뭔 일 나는 거 아냐?
나회장 (자리를 피하듯 일어나며 김 감독 들어보란 듯 친구에게) 그럼 말야, 나 먼저 가 있을게.
김감독 (어느 사이에 나 회장 앞으로 다가와서 위협적으로) 얘기 좀 합시다.
나회장 저, 저 말씀인가요?
김감독 여기 회장님 말고 누가 또 있소? 아, 여기 친구분도 계시구만. 앉아도 되나? (하며 허락도 없이 그 친구 옆자리에 앉는다)
그친구 (자기 옆자리를 김 감독에게 내주고 나 회장 옆자리로 옮겨 앉는다)
나회장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하시죠.
김감독 이봐! 사람을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나회장 아, 예….
김감독 아, 예라니?
나회장 정말 멋쟁이십니다.
김감독 누가? 내가?
나회장 멋을 아는 분이십니다.
김감독 나, 살다 살다 별 휘어박힐 소릴 다 듣는군. 그렇다고 그렇게 염치없이 바라봐?
나회장 사람의 눈길을 휘어잡는데 어쩝니까…. 실례지만 몇 년생이십니까?
김감독 (기가 차다) 별꼴이야 정말? 이젠 나이까지 물어? 61년, 신축생이다.
나회장 (그 친구에게) 신축생이면 무슨 띠야?
그친구 신축생이 무슨 띠냐 하면….
김감독 (먼저 대답한다) 65살 소띠인데, 우리 나이로 치면 67살이다.
나회장 67세라…, 띠동갑이시네.
김감독 띠동갑이라니, 나보다 아래는 아닌 것 같고 위라면 칠땡이란 말이요?
나회장 철없이 나이만 주워 먹었소, 일흔일곱이요. 허허허.
김감독 (턱으로 그 친구를 가리키며) 그쪽은?
그친구 동갑내기 친구요.
김감독 동갑내기 친구라… 취미도 같으신가?
그친구 (불쾌하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요?
나회장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말리듯) 이봐, 친구야!
그친구 (알았다는 듯) 아, 예 회장님….
나회장 겁먹을 거 없어, 별 거 아냐.
그친구 예, 회장님. 이미 파악했습니다.
나회장 (김 감독에게 반말로) 할 말이 뭔지 빨리 끝내자구!
김감독 (주춤해서) 사람을 훔쳐보는 취미도 같으냐고 묻고 있었어. 왜 그렇게 힐끗힐끗 쳐다보며 쑥덕댄 거야?
나회장 (벌떡 일어나 김 감독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잖아! 당신이 죽은 내 친구와 똑같다고 말야.
김감독 (나 회장을 마주 바라보며) 아무리 똑같다 해도 뭔가 특별난 사연이 있었을 게 아냐? 난 그게 알고 싶은 거야.
나회장 (김 감독을 의아스럽게 바라보며) 뭘 알고 싶어?
짧은 암전.
무대 밝아지면 같은 장소.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던 나 회장, 김 감독과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친구 자리로 돌아와 마주 앉는다.
나회장 (김 감독에게) 내가 한참 나이를 먹었으니까 후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김감독 (한풀 꺾였다. 퉁명스럽게) 김 감독이라고 불러줘.
나회장 김 감독? 무슨 감독?
김감독 한평생을 영화판에서 굴러먹었으니까 별명이라도 남겨둬야 되는 거 아뇨? 작품은 남기지 못했어도 영화판에서 김아무개 감독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야.
나회장 (그 친구에게 감탄스럽게) 햐, 어떻게 직업까지 똑같으냐, 응?
그친구 그러게 말야.
김감독 누가?
그친구 누군 누구야, 당신을 빼다박은 우리 친구 김 감독 말이지. 성까지 같애, 젠장!
김감독 그렇게 똑같애? 한 번 보고 싶군.
나회장 죽었다니까, 정 보고 싶으면 거울을 갖다 놓고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라구. 웃는 얼굴이며, 심각한 얼굴이며, 아무튼 당신하고 똑같애.
김감독 작품 많이 했나?
나회장 성인영화 몇 편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지난번에 한중합작으로 대작을 기획 추진하다가 갑자가 하늘나라로 가버렸어.
그친구 회장님 돈 5천만 원도 함께 날렸지 뭐.
김감독 5천만 원?
나회장 그 돈 생각만 하면 어지러워, 어지럽다구.
김감독 투자한 거야?
나회장 그냥 빌려준 거야.
김감독 돈도 많다.
나회장 딱 3개월만 쓰겠다고 매달리는데 어떻게 거절해? 더군다나 투자자 후견인이 보증을 서겠다는데 어떡해?
그친구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건데 회장이 너무 성급했어. 허기야 타고난 성미가 즉흥적이고 기분파라 누가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어. 그 성질머리 좀 고치라구.
나회장 고친다 고친다 해놓고도 돌아서면 그만인 걸 낸들 어떡해?
그친구 암튼 조심하라구. 더 큰 거 날리기 전에.
김감독 그래서 그냥 끝난 거야?
그친구 끝내긴? 이게 돈을 갚겠다고 낼 낼 하며 큰소릴 치더니 끝내 행방을 감춘 거야.
김감독 개새끼!
그친구 그리고 10년 만에 찾아냈는데 여전히 큰소리라. 일주일만 참아달라, 한 달만 참아달라 하면서 투자자 핑계만 대는 거야.
김감독 그걸 그냥 놔둬? 사기죄로 고발을 하든지 주민등록을 말소시켜 활동을 못 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면 될 거 아냐? 에이, 답답한 사람들!
나회장 죽어버렸는데?
김감독 봤어? 죽은 거 확인해 봤냐구?
나회장 (확인해 봤냐는 듯 그 친구를 멀건히 바라본다)
그친구 (고개를 내저으며) 장례식장에도 안 갔는데….
김감독 안 가길 잘 했지, 가 봤자 울화통만 더 터졌을 걸. 개새끼! 그건 개만도 못한 새끼라고. (나 회장과 그 친구를 번갈아 보며) 두 사람 어떤 관계야?
나회장 둘도 없는 친구 사이요.
김감독 허긴 그럴 거야, 친군 친군데 한쪽은 회장님, (그 친구를 향해) 다른 한쪽은 그 똘마니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아냐?
나회장 (불쾌하다) 거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버르장머리가 형편없군. 툭하면 반말 지거리에, 눈에 보이는 게 없냐? 옛날 같으면 니 애비 뻘이다, 임마!
그친구 (나 회장을 말리며) 왜 이래? 나도 참고 있다구.
김감독 뭐 임마?
나회장 그래, 어쩔래? (김 감독을 칠 듯 달려든다)
그친구 (나 회장을 가로막으며) 왜 이래 정말? (김 감독을 향해)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요.
김감독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그래요, 내가 좀 지나쳤소. 진정하셔.
나회장 (마지못해 참는 듯 김 감독을 한참 노려보다가) 미안하게 됐소.
그친구 (안심한 듯) 에이, 성질머리 한번 더럽다.
나회장 이제 알았냐? (김 감독에게) 오해 말아요. 나 이래 봬도 괜찮은 아저씨라구.
김감독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그친구 손해 볼 것 없을 거요. 잘 사귀어봐요.
김감독 까딱 잘못했으면 두 분 친구분을 모두 잃을 뻔했습니다.
그친구 좋은 친구죠, 평생을 함께할 변함없는 친구죠.
나회장 군 입대 동기라구.
김감독 군 입대 동기라면 지금 연령으로 봐서 근 50여 년을 함께하신 거 아닙니까? 보통 인연이 아니십니다.
그친구 군번이 맺어준 인연이기도 해. 나 회장이 나보다 하나 앞섰지?
나회장 그래, 난 끝자리가 9고, 넌 빵빵 아니냐?
그친구 맞어, 맞어.
나회장 난 말야, 내 군번을 평생 달고 다녀요.
김감독 목줄에 말입니까?
나회장 촌스럽긴…. 비밀번호 있잖어,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부터 은행 통장 비밀번호까지 하나로 통일시켰어.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내 군번 끝자리 넷. 8949. 세상은 흥정이야, 흥정! 얼마나 상징적이냐?
김감독 맞습니다. 팔구사구, 서로 돕고 사는 게 세상 아닙니까? 굳 아이디어입니다, 회장님!
나회장 (그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봐라, 친구야. 척하면 척인데, 이 친구도 우리 모임에 가입시키는 게 어때?
김감독 영광입니다!
나회장 영광이라잖아? 좋아! 우리 모임에 들어와요, 환영합니다.
그친구 (시큰둥해서) 잘들 해보슈.
나회장 암, 잘 될 거야, 김 감독!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 허허허….
김감독 예,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나회장 김 감독께선 여기 맥도날드를 자주 이용하시는 편인가요?
김감독 내 쉼터입니다, 쉼터. 운동 끝내고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죠.
나회장 아, 그러셔? 이 근처에 사시는 모양이죠?
김감독 아 예, 요 앞에 행길 건너 그린오피스텔에 자주 들르는 편입니다.
나회장 아, 그러셔? 저도 거기 삽니다. 그린오피스텔 3층 331호. 가까운 이웃을 앞에 두고 멀리 바라볼 뻔했습니다, 허허허. 저희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몇 호 사세요?
김감독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내 이게 작업실 겸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들르는 편이죠.
나회장 (그 친구에게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분이 내 오피스텔에 사신단다. (김 감독에게) 부럽습니다, 헌데 하시는 일은?
김감독 저요? 여러 가지 이벤트 사업에 손을 대고 있죠.
나회장 이벤트 사업이라….
김감독 주로 스포츠 쪽이죠, 스포츠.
나회장 그러니까 싸이클 대회라든가….
김감독 하, 역시 센스가 빠르셔! 내 싸이클 소리 한마디에 그냥 정답이 나오네요.
나회장 아, 김 감독 복장부터가 싸이클 아냐? 그래, 어떤 사업인가?
김감독 남북한 교류, 서울에서 평양까지 싸이클로 달리는 겁니다. 천 명의 회원이 싸이클을 타고 달려가서 평양의 자전거 동호인들에게 타고 간 싸이클을 기증하고 돌아오는 겁니다.
나회장 (감동) 햐, 굳 아이디어다, 굳 아이디어야! 그 사업을 자네가, 아니 김 감독이 직접 기획을 구상했다는 거지요?
김감독 그럼요. 저 아니면 꿈도 못 꿔요. 협찬사의 도움을 받으면 사업 자금도 별로 안 들어, 더군다나 참가 인원 자격을 이북 출신 실향민들로 해봐요.
나회장 햐, 그것도 끝내주는 아이디어다! 두고 온 고향을 못 잊던 실향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고향 땅을 달린다. 햐,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그친구 (말 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나회장 왜?
그친구 꿈 같은 얘기다.
김감독 (불만) 내 사업은 이루어진다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나회장 또 하나 뭐?
김감독 남북 합작 영화입니다.
나회장 (고개를 내젓는다)
김감독 왜…?
나회장 아주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얘기 같다.
그친구 그 합작 얘기는 십 년 전부터 돌고 있는 구태의연한 골동품 얘기다.
나회장 영화라면 신물이 난다, 신물이 나. 내가 죽은 김 감독한테 얼마나 당했냐?
그친구 죽은 김 감독 얘기라면 그야말로 신물이 난다.
나회장 그러니까 영화 얘긴 합작이든 뭐든 안 들은 걸로 하자고.
그때 어디선가 핸드폰 울리는 소리. 나 회장과 그 친구, 서로 자기 전화인 줄 알고 ‘여보세요’ 하고 받으면.
김감독 내 전화예요. (하고 전화 받는다) 응, 나야. 일찍 들어왔네. 어, 어, 어…, 하나 걸린 것 같애…. 더 두고 봐야지. 어, 어, 어…. 글쎄, 조금 더 연구를 해봐야 될 것 같아. 뭐라구? 어, 어, 조금은 다 혈질이라고 할까? 아무튼 연구 대상이야. 응? 자기처럼 즉흥적이라 오히려 다루기가 쉬울 것 같아.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 나 오늘 거기서 자고 갈 거야. 이따 봐. (핸드폰 끈다)
나회장 (김 감독에게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아는 체한다) 이거요?
김감독 어떠세요? 제가 오늘 약주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나회장 (귀가 번쩍 뜨인다) 거 좋지. (그 친구를 가리키며) 술이라면 이 친구가 거절을 못해요. 헌데 이유가 뭐예요?
김감독 오늘 우리의 만남을 자축하는 뜻에서 말입니다.
나회장 좋아요, 좋아!
짧은 암전.
잠시 후 비교적 한산한 생맥주집. 호프잔을 앞에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나 회장과 그 친구.
그친구 이 친구 이거, 화장실 좀 다녀온다더니 그냥 싸이클 탄 거 아냐?
나회장 야, 이까짓 호프 한잔에 바람 탈 놈 같으냐? 양주라면 또 몰라.
그친구 암튼 그 친구 조심하라구. 그 친구 행동거지가 맘에 안 들어.
나회장 내가 누구냐?
그친구 왕년에 대- 잡지사의 대- 기자 국장님이면 뭐해?
나회장 나 땜에 출세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냐? 그리고 지금 잘나가는 사람들, 거의 내 신세 안 진 사람들 없다고.
그친구 그게 지금 회장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나회장 뭐 관계라기보다 그렇다는 거야.
그친구 그러니까 내 말은 화려했던 과거에서 빨리 벗어나서 평범하게 살라 이거야. 툭하면, 아 그 애, 내가 데리고 있던 앤데 하고 뭉개버리면 상대 꼴이 뭐가 되겠어?
나회장 헌데, 너 오늘 왜 이러니?
그친구 오늘뿐만 아니야. 맨날 해주고 싶은 말이다. (입구 한편을 응시하며) 온다, 관두자.
김감독 (다가오며) 어이구, 죄송합니다. 큰것 좀 보느라고 좀 늦었습니다. (탁자의 호프잔을 보고) 호프 가지고 되겠습니까? 소맥으로 하시죠, 소맥. (안에다 대고 큰소리로) 여봐요, 여기 소주 세 병하고 맥주 좀 더 가져와요. (그 친구 옆자리에 앉는다)
나회장 과용하시는 거 아닙니까?
김감독 아, 이까짓 소맥 몇 잔 가지고 과용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다음 기회를 봐서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여기로 초대해서 그럴 듯하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하하하.
나회장 아이고, 기대가 큽니다.
김감독 소주가 왜 이리 늦어? (안에 대고 큰소리로) 이봐요, 여기 소주 안 가져와?
종업원 예, 예. 갑니다. (소주병을 가져다 놓고 가면)
김감독 (상대의 반쯤 남은 호프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며) 이 정도야 간이 맞겠죠?
나회장 (웃으며) 어디 간이 맞나 마셔 봅시다. 자, 건배!
세 사람 건배한다.
김감독 이거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회장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회장 아이고야, 내가 아직 통성명을 못 했구먼. 나절로요, 나절로. 허허허.
김감독 예? 나-절-로요…?
나회장 예, 나절로요.
김감독 원래 존함이 나절로 회장이십니까?
나회장 그렇소, 나절로! 왜 이름이 생소해서 그렇소?
김감독 아, 아닙니다. 나 저절로…, 얼마나 좋은 존함입니까? 모든 일이 나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얼마나 신통한 일입니까, 하하하.
나회장 헌데 나 저절로 되는 일이 없어요. 매번 깨져요. 속 시원히 되는 일이 없어. 경쟁을 해서 맨날 져요.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어. (그 친구에게) 안 그러냐?
그친구 잘 알면서 왜 묻냐?
나회장 답답해서 그렇다 인석아. (소맥으로 목을 적시고) 그러나 이번 일만 잘 되면 나절로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질 거다. (소맥을 벌컥벌컥 마신다)
김감독 (호기심) 이번 일이라뇨…?
나회장 당신만 아이디어맨이 아냐. (힘주어) 서비스 센터!
김감독 예, 서비스 센터요…?
나회장 세상의 온갖 불편한 일,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 일, 법을 떠나 인간적으로 해결해야 할 온갖 사건들, 혼자 고민 말고 서비스 센터의 문을 두드려라.
김감독 부담 없이 해결해 드립니다, 이거 아닙니까?
나회장 역시 아이디어맨이야. 어때, 내 아이디어가? (그 친구를 가리키면서) 지금 이 친구와 추진 중인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 하하하.
그친구 (비웃듯) 혼자 웃어라, 혼자 웃어….
나회장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절실히 느낀 건데 역시 사람은 대인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그친구 (대화를 가로막듯) 또 무슨 얘길 하려고 하는 거야. 왕년에 잘나가던 얘기?
나회장 솔직히 나한테 신세 안 진 사람 없다고.
그친구 예, 그러시죠. 나절로가 누구신데 괄시합니까?
나회장 난 말야, 아직도 말야, 화려했던 내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이야.
김감독 어련하시겠습니까?
나회장 함부로들, 내 과거를 무시하려고 하지 마.
그친구 이봐, 나 회장님! 취하셨어? 여기 누가 있다구 들, 들대? 나하고 김 감독 둘뿐이라고.
그때 김 감독 핸드폰 소리.
김감독 (나 회장과 그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전화) 아, 여보세요. 응, 나야. 응, 응, 응…. 여기 걱정은 꽉 붙들어 매놓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하시는 일이나 잘 하셔. 뭐라고? 잘 안 돼? 헌데 문제가 뭐야? 뭐라고? (핸드폰 막고 나 회장에게) 잠깐 전화 좀 받고 들어오겠습니다. (급히 나가면)
나회장 바쁘구만 바빠! 거 또 함흥차사 되는 거 아냐?
김감독 (돌아서서) 아닙니다. (새끼손가락을 펴보이며) 이겁니다, 이거…. 곧 돌아올게요. (서둘러 나간다)
나회장 뭔 일인데 저렇게 바쁘게 불러대는 거야?
그친구 누가?
나회장 (새끼손가락을 펴보이며) 이게 말야. 허기야, 좋을 때다, 좋을 때. 나도 말야, 한참 잘나갈 때….
그친구 새끼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지?
나회장 야, 그때가 정말 그립다. 지금도 말야.
그친구 됐어, 됐어…. 자네가 키워낸 이억, 삼억짜리 가수가 수두룩하다며?
나회장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도 말야, 내가 아쉬울 때 연락만 하면 이, 삼억 정도는 과자값 정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연락이 안 돼. 너무 바쁘니까 연락을 받고도 연락을 못 하고 있는 거야.
그친구 꿈보다 해몽이 좋다.
나회장 너 참 못됐다. 회장 말끝마다 삐딱하게 나오는데 내가 그렇게 못마땅하냐?
그친구 말 같은 소릴 해야 알아들을 게 아니냐? 이, 삼억짜리 가수가 뭐 이웃집 강아지 이름이냐?
나회장 그래. 내 말은 그렇다 치고, 김 감독 말은 말 같은 소리냐?
그친구 어느 김 감독? 회장님 돈 떼먹고 헛소리만 치다 죽은 김 감독이야, 아니면 남북을 잇는 사이클 기증사업 추진위원장이신 김 감독이냐?
나회장 사이클 김 감독이다.
그친구 말은 좋은 말이지만, 그게 될 말이냐? 회장님! 정신 똑바로 차리셔!
나회장 정신 똑바로 차리라니? 아냐?
그친구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일이냐? 사짜 냄새가 저 백 리 밖에서부터 풍겨 와요, 회장님!
나회장 사기를 쳐? (짙은 의아심) 지가 우릴 언제 봤다고 사기를 쳐?
그친구 먹잇감은 순간적으로 찍히는 거야. 상대를 대하는 순간 어딘가 빈틈이 보이면 그대로 찍히는 거야. 한 번 먹잇감으로 찍혔다 하면 그때부터 온갖 친절과 아첨으로 작업이 이루어져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당하고 마는 거야. 특히 너, 회장처럼 말야. 아는 거 많고, 과거가 화려한 사람일수록 한입감이지.
나회장 야야, 거 빈말이래도 내 얘긴 좀 빼고 해라.
그친구 빼고 해도 번번이 당하잖아. 당하고도 끽소리 못 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이 누군데?
나회장 아, 됐어 됐어. 그만해! 헌데 이 작자는 왜 이렇게 전화가 길어?
그친구 뭔가 사연이 있겠지.
나회장 무슨 사연?
그친구 나 참, 여기서 못 할 비밀스런 얘기니까 나가서 하고 온다는 거 아니니?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어? 그냥 술이나 마셔!
나회장 (왠지 찜찜하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친구 왜?
나회장 자네 말이 말야, 자꾸 마음에 걸려….
그친구 내 말이 맘에 걸리다니?
나회장 아, 그냥 자네가 나에 대해서 평소에 지껄이던 소리가 말야.
그친구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데?
나회장 (화를 내듯) 아, 날 보고 경솔하니 뭐니, 잘난 체 그만하라고 작작 지껄여댔어?
그친구 그래. 너 말야, 부탁을 받으면 안 되는 일 있어? 다 된다고 큰소리쳤잖아, 그래 놓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잖아?
나회장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시끄러! (그대로 나가려고 하면)
그친구 어딜 가?
나회장 화장실!
그친구 다녀오셔.
나회장 (나가다가 성급히 들어서는 김 감독과 마주친다)
김감독 아니, 어딜 가십니까?
나회장 화장실.
김감독 화장실요? 어딘지 아세요? 이 건물 밖으로 나가셔야 하는데….
나회장 밖으로 나가야 돼?
김감독 제가 모시겠습니다, 화장실 찾기가 좀 복잡해요. 제가 모시고 가야 안심이 되겠습니다. (손목시계를 보고) 자, 가시죠. (나 회장을 정중히 모시고 나간다)
그친구 (그 모양이 아니꼽다) 화장실 두 번만 가면 가마 타고 가겠다. (맥주를 단숨에 마시는데 방금 나갔던 나 회장 들어온다. 의아스럽게 바라보며) 화장실 간다더니?
나회장 오줌발이 딱 끊겼어. 볼일 볼 사람을 길가에 세워 놓고 계속 전화질만 해대잖아. 그래서 그냥 돌아왔어.
그친구 감시망을 뚫고 말이지?
나회장 그게 무슨 소리야?
그친구 그 싸이클 말야, 우릴 은근히 감시하는 기분 안 들었어?
나회장 감시를 하다니? (그 친구와 마주앉으며) 우리하고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밀착해 오는 거 아냐?
그친구 생각해 볼 문제야….
나회장 그래서 그런지 맥주 맛도 점점 변해 가는 거 같아. 찜찜하잖아? 원래 맥주잔은 시원해야 하잖아?
그친구 헌데?
나회장 헌데 이 맥주잔은 말야, 마실수록 답답하잖아?
그친구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얘길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나회장 (뭔가 결심을 한 듯) 우리가 너무 쉽게 먹잇감이 된 거 아냐?
그친구 먹잇감이 되다니?
짧은 암전.
초저녁 무렵 생맥주집, 호프잔을 앞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그 친구.
그친구 (혼잣소리) 우리가 쉽게 먹잇감이 됐다? 뭔가 걸려들었다는 얘긴데…, 걸리긴 뭐가 걸렸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거야? 나 회장, 그 친구 그렇게 취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별꼴이야 정말….
그때 나 회장 등장.
나회장 (그 친구 앞으로 다가서며) 세상 살다 별 희한한 꼴 다 당하네.
그친구 회장님께서도 별 희한한 꼴을 다 당하셨어?
나회장 지금 농담할 때가 아냐. 그놈 있지? 김 감독 닮은 싸이클놈 말이야. (새끼손가락을 펴보이며) 이거 하나 달고 다니면서 빈집을 터는 전문 빈집털이 도둑놈이었다니까. 특히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경우 캐낸 정보를 가지고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한탕을 노렸다니까. 우리가 거기에 걸려든 거야.
그친구 우리가 어떻게 걸려들었지?
나회장 우리가 싸이클 그놈을 먼저 아는 척했고, 그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오피스텔 정보를 자연스럽게 캐낸 거야. 그래 가지고 주변에 숨겨 놓은 (새끼손가락을 펴보이며) 이거에게 전화로 범행을 지시한 거야. 오피스텔 몇 층 몇 호,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줘 가지고 빈집을 털게 한 거야. 우리는 술집에 가둬 놓고 말야.
그친구 우릴 술집에 가둬 놓고라니?
나회장 그놈이 우릴 감시하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그동안 여자는 맘 놓고 빈집을 터는 거 아냐?
그친구 그래서 어느 정도 털렸어?
나회장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문 앞에서 징징대다 경찰에 끌려갔어. 오피스텔 경비가 신고를 했대.
그친구 현관 비밀번호를 몰랐나?
나회장 싸이클 그놈이 분명히 알아냈지만 착각을 한 거야. 내 군번 끝자리 넷, 8949. 세상은 흥정이라고까지 여자애한테 분명히 가르쳐줬는데 이게 착각을 한 거야.
그친구 착각을 하다니?
나회장 8949를 4989로 말야.
그친구 팔구사구를 사구팔구로 착각을 하다? 사구팔구를 팔구사구로…, 헷갈릴 만도 하네, 응?
나회장 팔구사구를 사구팔구로 제아무리 눌러대봤자 손가락만 아팠지 현관문이 열려? 수상히 여긴 경비원이 신고를 해버린 거야. 새끼손가락 그 여자 오피스텔에 살지도 않는 빈집털이 프락치래.
그친구 좋은 경험했다.
나회장 결국 내가 이긴 거지?
그친구 이겨? 글쎄….
나회장 글쎄라니?
그친구 아무튼 좀 아쉽다.
나회장 아쉽다니?
그친구 이번 기회에 진짜 털렸어야 되는 게 있는데 진짜 털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거야.
나회장 그게 뭔데?
그친구 너의 고질병. 과거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큰 고질병을 털어 갔어야 되는 건데 그걸 못 털어 갔단 말야. 그것만 털렸어도 넌 매번 이길 수 있었는데 아쉽다.
나회장 (중얼거리듯) 그럼 내가 또 졌냐?
막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