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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의 달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정금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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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저거 좀 봐. 빨리 와 봐.”
순영이 남편을 다급하게 불렀다.
“뭔데.”
김 사장이 방문을 열고 나오다 말고 몸이 굳은 채 티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5층 건물 창 틀에 어린아이 가 홀로 매달려 있었다. 어디선가 한 남자가 달려와 벽을 타고 있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동안 5층 높이를 맨손으 로 오른 남자는 아이의 팔을 덥석 잡아 베란다 안으로 끌 어들였다. 말리 출신의 22세 불법체류자, 마무드 가시마. 티브이 자막에는 청년의 신상이 떴다. 블랙팬서도 스파이 더맨도 아닌 그 청년은 현실 속 진짜 슈퍼히어로, 세상을 감동시켰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그를 대통령궁으로 초청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
“신이 제 발을 들어 올려줬습니다.”
그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프랑스 시민권을 받았고 소방 공무원으 로 특채되는 약속을 받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뉴스를 보는 동안에도 계속 벽시계를 보던 남편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맨트만 나와.”
남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푸르바? 그럼 엘로로한테 해 봐.”
순영이 창밖 정문 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전원이 꺼졌어.”
“뭔일 났구만. 요새 하는 행동들이 불안 불안했어.”
푸르바는 네팔에서 왔고, 엘로로는 가나 출신이다. 이들은 3차 하청 공장인 태광정밀에서 일 한지 2년이 되어간다. 기술도 제법 늘어서 김 사장이 받아오는 주문량을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곤 했는데, 최근 들어 서 작업 태도가 엉망이었다. 오전 일만 하고는 피곤하다며 조퇴를 하지 않나 걸핏하면 지각해서 김 사장의 속을 태우고는 했다.
“조금 더 기다려 봐. 걔들 원래 시간 개념이 없잖아.”
순영도 초조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엘로로와 푸르바를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들이 없으면 태광정밀은 돌아갈 수가 없 다. 푸르바가 반사경을 만들기 위한 전 단계인 철판과 스텐을 샤링기로 재단하면 엘로로는 이를 받아서 용접한다. 태광정밀에서 만드는 도로 반사경은 도로가 곡선으로 구부러진 곳이나 주행 도로에 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곳이나 좌우 시야 확보가 어려운 교차로 등에 설치한다. 다른 차량이나 보행자, 그리고 전방의 도로 상황을 사전에 확인해서 안 전한 주행을 유도하기 위해 설치하는 안전시설이기도 하다.
“푸르바가 일하면서 자꾸 졸던데 무슨 일이 있기는 있어.”
그러고 보니 순영에게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어제였다. 순영이 간 식을 가지고 작업장에 갔을 때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 었다.
“어서 와 따뜻할 때 먹어.”
방금 삶은 고구마와 계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커피만 홀짝이는 둘 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마담, 삼십만 원 가불해 줘.”
엘로로의 검은 얼굴 속 깊게 패인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했다.
“무슨 소리야. 그저께도 오십만 원 필요하다고 가져갔으면서.” 이런 일은 없었다.
“동네에서 누가 신고했어? 이러다 니네 튈려고 이러는 거야? ”
이들은 불법체류자였다.
“아니, 마담. 그게 아니고.”
엘로로가 뭔가 설명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푸르마가 다급하게 가로막 았다. 자국어로 쏼라거리면 순영도 대책이 없었다.
“빨리빨리 투데이 원 싸우전 메이드.”
순영이 알고 있는 영어 단어는 스무 개 정도다. 그래도 영어 사이사 이에 한국 문장 적당히 돌려막기로 끼워 넣으면 소통이 된다.
“투데이 오다. 익스펜시부(비싼 거야).”
결국 어제 그들은 주문 양의 반도 채우지 못한 채 퇴근했다. 원래는 여섯 시가 퇴근 시간인데 여섯 시 십 분 차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다섯 시 오십 분에는 일을 마치게 해줬다. 그런데 어제는 몸이 안 좋다며 다 섯 시도 안 되어서 퇴근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도 이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큰일이다. 주문 받은 걸 만들려면 한시가 급했다. 살다 살다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며 다들 아우성이다. 남편이 원청에서 일거리를 삼천 개나 받아온 것은 천 운이다. 개당 단가를 오백 원씩이나 낮췄기 때문이다. 이러면 남는 게 없는데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순영이 때때거렸지만 따지고 보면 남 편의 판단이 옳았다. 소문에 의하면 일거리가 없어서 기계를 멈춘 공장 들이 여럿이다 보니 원청에서는 생산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는 것이다. 김 사장의 경영 원칙은 원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일단 일은 잡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공원에 가보자.”
“기술도 없는 애들 데려다 또 사고 나면 어쩌려고.”
몇 년 전에 한 직원이 프레스 작업을 하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난 적 이 있었다. 소규모 영세 사업장인 순영이네는 여러 가지 비용 부담 때 문에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었다. 김 사장은 적당한 금액으로 합의 를 보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다친 사람은 치료비와 위로금 명목으로 목돈을 톡톡히 뜯어 갔었다.
“눈 꾹 감고 오 과장한테 부탁할까? ”
“그 인간 말도 꺼내지 마.”
남편이 버럭 했다. 태광정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오 과장과 남편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철의 양이 부쩍 줄었 다. 샤링기에서 철판을 원형으로 자르면 자투리 철이 나온다. 이 철을 서너 달 모아서 고철상에 내다 팔면 공장 월세 부담에 큰 보탬이 되고 는 했다. 효자 노릇 톡톡히 하는 고철이 야금야금 없어지는 것은 심각 한 문제였다. 의심 가는 사람은 샤링 기계를 다루는 오 과장뿐이었다. 도둑을 잡으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심 끝에 김 사장은 출입문 천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김 사장과 순 영이 일찍 퇴근한 날이면 오 과장이 자신의 승용차 트렁크에 파쇄 고철을 실어 날랐다.
“과장님이 이럴 수가 있어요? ”
“김 사장, 그렇다고 나 모르게 몰래카메라까지 달았는가? ”
대답은 의외였다.
“없던 일로 할 테니 가져간 물건 다시 가져오세요.”
“없네, 술 고파서 다 팔아 마셨네.”
적반하장.
“자네가 나를 경찰에 신고라도 하겠단 말인가? 맘대로 하게.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이건 또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불법 촬영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잘 생각해 보게. 그보다 더 켕기는 게 있을 텐데….”
갈수록 태산. 오 과장의 어투가 빳빳하고 분위기가 살벌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엘릭이 갑자기 용접 보안경과 안전모를 벗어 던지 고 줄행랑을 쳤다. 네팔에서 온 엘릭은 불법체류자였다. 엘릭에게 경찰 이라는 단어는 공포였을 것이다. 지난번 일했던 깻잎 농장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 관리소 직원한테 친구가 잡혀갔기 때문이다. 
“일하고 있는데 폴리스 왔어. 친구 잡아갔어.”
엘릭은 키가 컸다. 달리기 선수였다는 그는 뒷문으로 탈출에 성공했 지만, 친구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장면까지 목격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작업 중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했다.
용접 일이라는 게 워낙 위험하고 중노동이어서 젊은 사람은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십 대 후반이나 육십 대마저도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이다. 금형이나 용접 등, 이른바 뿌리산업 기업 중 절반 이상은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허덕인다. 이를 해소하려면 외국 인 근로자를 지금보다 훨씬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순영은 순하고 일 잘하는 엘릭을 아꼈다. 간식으로 삶은계란과 커피 를 들고 현장에 가보면 엘릭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작업에만 열중했다. 
“엘릭, 비 케어플(조심해).”
“땡큐 마담.”
엘릭도 처음에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계절 근로자로 입국했다. 기 간이 3년인데 엄마가 위암에 걸려서 수술하는 통에 치료비를 계속 벌 어야 했다. 계약 만료가 지났지만 한국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는 엘릭도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것이다.
순영은 힘든 일을 하는 직원들에게 삼겹살을 구워주고는 했다. “실컷 먹고 아프지 마.”
순영이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엘릭의 앞 접시에 수북이 담아줬다. “깻잎 무서워, 불법 무서워.”
깻잎 농장에서 있었던 아픈 기억 때문에 엘릭은 고기를 절대 깻잎에 싸 먹지 않았다. 이들이 깻잎 백 장을 따고 받는 금액은 3백 원에 불과 해서 매일 열 시간 이상 엎드려 1만 5천 장을 따는 중노동을 하고 받는 월급은 백이삼십만 원밖에 안 되었다고 했다. 벼룩의 간을 빼 먹고 말 지, 악덕 농장주는 그들이 기거하는 패널 집이나 컨테이너를 빌려주는 명목으로 월급에서 매달 20∼30만 원을 제했다.
“깻잎사장나빠.”
한 번은 엘릭이 마당에 나뒹구는 양은대야를 들고 자신의 머리를 때 리는 흉내를 냈다. 쉬는 날 친구들과 숙소에 모여서 고기를 구우려 했 는데 하필 그날 후라이팬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급한 대로 양은대야 에 고기를 굽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사장이 쳐들어온 것이다. 다짜고짜로 사장은 멀쩡한 대야 다 태운다며 몽둥이와 대야로 이들을 폭행한 것이다.
“엘릭, 한국사람 착한 사람 더 많아.”
순영은 속으로 깻잎 사장이 밉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인가 순영은 고기를 싸 먹을 때 상추 위에 겹쳤던 깻잎을 슬그머니 빼고는 했다.
“오케이, 오케이. 마담, 캡틴, 나이스.”
엘릭이 환한 얼굴로 엄지척을 했다. 엘릭이 핸드폰 지갑에서 가족사 진을 꺼내 보였다. 여러 형제와 부모님이 다정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그들에게도 엘릭은 애틋하고 미안하고 고마운 아들일 것이다.
“파더, 마이 네임 엘릭플림 메이드.”
엘릭플림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며 엘릭은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
“맘. 배 아파. 도터, 씨스터 공부해. 나 돈 많이 벌어야 해.”
울산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엘릭의 친구가 있는데 기술이 좋아서 한 국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번다고 했다. 엘릭도 친구처럼 숙련공이 되고 싶다고 했다.
“사장님, 나 기술 많이 가르쳐 줘. 아임 드림, 엔지니어.”
“유두캔두잇(너는할수있어).”
김 사장이 양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엘릭이 기술을 터득하면 현장 관 리자로 맡겨도 손색이 없겠다며 눈여겨 보고 있던 터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현장이 있는데 생산과 관리가 효율적어서 업주 측에서 만족 해 하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엘릭이 마당 한가운데로 공을 휙 던졌다. 라떼가 공을 향해 달려 나 가 발로 차고 주둥이로 굴려서 엘릭한테 가져왔다. 공을 건네받은 엘릭 이 라떼와 코 맞춤을 했다.
“라떼! 삼촌 라떼 사랑해.”
라떼의 삼촌으로 통하는 엘릭은 출근할 때마다 라떼가 좋아하는 간식을 챙겨 와서 라떼의 입에 물려주고는 했다. 부모가 짓는 농사로는 겨우 먹을 것만 해결되기 때문에 엘릭은 월급의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 냈다. 그 돈으로 엄마의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로 쓰는 것이다.
순영이도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있는 딸 생각으로 가슴이 찡했다. 얼 마 전 딸이 학교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왔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엄마, 굿 뉴스야. 캠퍼스에 쓰레기통 비우는 일이 있는데, 이거 할 까? 매일 한 번만 비우면 기숙사 비를 오십 퍼센트 면제받을 수 있어.”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거기 뭐 하러 갔어? 둘 중 한 가지만 해. 쓰레기, 아니면 공부.”

“엘릭찾는방법좀알아봐.”
“무슨 수로 찾아,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인데.”
“엘릭 아버지가 왜 엘릭플림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알 것 같아. 엘릭이 어디를 가든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서일 거야.”
“그렇지, 우리도 똑같은 마음인데. 엘릭도 우리를 잊지 않고 지내다 언젠가는 돌아올지 몰라.”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
옆에 있던 라떼가 하울링을 했다.
“어머, 얘 좀 봐 우리가 하는 말 다 듣고 있었나 봐.”
“개는 영물이라잖아.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라떼도 엘릭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울까? ”
지금은 줄었지만 엘릭이 떠난 후 라떼는 밤낮 없이 울어댔다. 그 소 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듣는 사람까지 가슴이 짠해지고는 했다.

고심 끝에 김 사장과 순영이 달려간 곳은 반월공단의 중앙공원이었다. 그곳에 가면 일자리 찾는 불법체류자들이 깔렸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단순한 일이라도 시켜 볼 생각으로 데려온 친구들이 바로 푸르바와 엘로로였다. 농사만 짓던 애들이어서 기계에 대한 감각 도 없고, 배우려는 의지도 없었다. 거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걸핏하면 지각이요 조퇴였다. 어쩌겠는가. 그나마 힘 좋은 애들을 구슬러서 일을 시키려면 그들이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를 실컷 먹이는 것이었다. 남편 은 짬짬이 당구장에도 데려가고 노래방에 가서 기분도 풀어 주면서 그 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기술도 차츰 늘어서 제 품 생산량도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차에 부동산 중개소에서 전 화가 왔다. 지금 태광정밀이 입주해 있는 공장의 터와 건물이 급매로 나왔다는 것이다.
“사장님, 제가 가격 흥정 잘해 볼 테니 이번 기회 놓치지 마십시오.” 김 사장은 귀를 의심했다. 5년 만기 재계약 갱신 때마다 인상되는 월
세 부담이 커서 김 사장도 이런 땅이 있다면 평생 걱정이 없겠다는 생 각을 했었다. 5백 평 정도 되는 땅이 있으면 소개하라고 중개사한테 얘 기한 적이 있었는데 김 사장의 형편에 천이백 평이나 되는 규모는 견물 생심이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장님. 땅 사서 이사하려면 진입로 닦아야지, 건물 지을 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은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그보 다 더 큰 문제는 주변에서 들어오는 민원이 더 무섭습니다. 소음 문제 해결하지 못해서 땅 파다가 공사 중단한 현장도 있어요.”
사실 공장을 옮기려면 덩치 큰 장비들의 이동과 설비가 쉽지 않고 이 전 비용이 엄청나서 김 사장의 고민도 컸었다.
임대인의 급한 사정을 꿰뚫고 있는 중개사는 가격을 바닥까지 끌어 내리고, 정부의 각종 지원금과 매매가의 85%까지 저렴한 이자로 장기 대출을 받아 매매를 성사시켰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행복에 젖어 있는 김 사장에게 오늘 같은 사단이 난 것이다. 푸르바와 엘로로, 어차피 그들은 철새였다.

3월의 바람은 한겨울보다 더 매서웠다. 반월 산업단지와 이웃하고 있 는 시화 국가산업단지에 들어서자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핏 보기에 활기가 느껴지는데도 주변 곳곳에는 공장 매매 임대, 등 원색의 현수막들이 경기의 한파를 실감하게 했다. 그뿐 아니었다. 골목 골목에는 벽과 전신주에 중고차 지게차 장비 매입 등 절박한 내용이 담 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들도 한때는 잘 나가는 기업들이 었는데 고금리와 원자재 가격 상승,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 인건 비 상승 등, 복합 요인 작용으로 경영 환경이 더 나빠진 것이다.
공원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두세 명씩 몰려다니면서 쎌카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 사장이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일단 부딪치고 볼 일이다. 마사이족처럼 다리가 쭉 뻗은 청년들한테 호감이 갔다. 엘 릭과 비슷해서였을 것이다.
“유 캔 아르바이트? ”
김 사장이 핸드폰을 열고 공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마? ”
순영이 얼른 핸드폰의 계산기에 숫자 12만 원을 넣었다.
“오케이.”
첫술에 성공이다. 이 광경은 흡사 갓 잡은 생선을 두고 가격 흥정하 는 어부와 경매사의 광경이다.
“우리 일 없어, 공장 문 닫았어.”
웬 떡인가. 한시가 급한데.
김 사장은 이들을 당장 차에 태워 공장으로 향했다. “경찰 무서워.”
“돈 워리 어바웃 뎃(안심해).”
약속한 대로 김 사장은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에게 뒷문을 안내 했다.
“경찰 오면 이쪽으로 도망가.”
캐비넷으로 가려진 뒷문으로 나가면 야트막한 산이 공장과 맞붙어 있어서 피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불안한 것은 김 사장도 마찬가지다. 5년 전이었다. 그때는 경기가 좋 아서 잔업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오 과장을 포함 외국인 노동자 세 명 이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한창 바쁠 때였다. 마당에서 라떼가 자지러지 게 짓고 소란스러웠다. 느닷없이 앞문과 뒷문으로 단속원이 두 명씩 짝 을 지어 난입했다. 꼼짝 없이 붙들린 노동자들에게 이들은 다짜고짜 신 원조회를 한다며 차에 태워 끌고 갔다. 그 일로 김 사장은 벌금을 톡톡 히 물어야 했다. 그런데도 불법 고용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는 값싼 인력 때문이다. 영세업체에서 높은 급여와 상여금, 4대 보험에 대한 부담도 크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외 국인보다 인건비를 두 배로 주는데도 하루 지나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도대체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기껏해야 오십대 후반이나 육십대가 대 부분이다. 그들도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배짱이 있어서 맘에 안 들면 고 집을 부리거나 갑자기 결근을 해서 고용주에게 타격을 주고는 하는 것 이다.

태어난 시간이 아침이어서 부모님이 지어준 아대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힘이 세고 토요일에 태어났다는 커미는 행동이 느렸다. 그래도 갈 데가 없는 이들은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기술도 필요 없고 힘만 쓰 면 되는 고물상과 도로포장 하는 데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무거운 철판 도 척척 들어 옮겼다. 김 사장이 기계를 작동하고 순영이도 지게차를 운전하여 납품을 마친 날, 김 사장이 자리에 누워버렸다. 허리병이 도 진 것이다. 큰일이다. 급한 불은 껐지만 또 다음 주문이 납품 날을 기다 리고 있었다. 대출금 원리금과, 공장 운영자금, 직원 인건비, 딸한테 송 금할 돈을 마련하려면 어떻게든 기계를 돌려야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 이라고, 순영이 발을 벗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김 사장 어깨너머로 배 운 솜씨가 있어서 순영도 풍월은 읊는다.
“위험해. 일당 불러.”
남편이 말렸지만 순영은 요지부동이다.
“그러다 공장 문 닫을 일 있어? 일당쟁이가 간첩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대랑 커미 신고 들어가면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순영이 커미와 아대를 샤링 기계 앞으로 불렀다.
“오늘 사장님 아파. 우리가 이거 메이드.”
“많이 아파? ”
뚱한 커미에 비해 살가운 아대가 걱정을 했다. 한 열흘 함께 일하면 서 김 사장은 이들을 살뜰히 챙겼다. 퇴근 시간 넘어서 잔업까지 한 날 은 추가 수당을 현금으로 쥐어 주었다. 거기다 치킨까지 배달시켜서 야 식으로 실컷 먹이고 자신의 차에 태워 숙소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순영이 코일 형태로 나온 철판을 샤링 머신에 밀어 넣도록 지시했다. 기계를 중앙에 두고 마주 선 아대와 커미가 철판을 힘껏 밀어 넣었다. 순영이 스위치를 누르자 유압기가 작동했다. 철커덩. 반사경으로 만들 기 위한 모형으로 재단된 금속판이 만들어졌다. 시범을 보인 순영이 커 미와 아대에게 똑같이 해 보라고 했다. 아대가 긴장된 얼굴로 시작 버 튼을 눌렀다. 철커덩. 기계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복종했다. 신기하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대가 연달아 기계를 작동했다. 배우려는 의지와 일머리가 있는 아대가 기특했다. 기술을 잘 가르치면 엘릭처럼 몇 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컨베이어 밸트를 타고 이동하는 금속 판을 파렛트에 쌓아야 하는데, 커미는 산 너머 불구경하듯 어슬렁거리 만했다.
“커미, 오늘 씩스 헌드레드 메이드.”
들은 척도 안 한 커미가 슬그머니 용접대 쪽으로 가더니 보안경과 안 전모를 착용했다. 못 보던 행동이다. 남편이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고 분고분했었는데. 이들도 여자를 은근히 무시하고 뺀질거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커미, 웰딩 내일 메이드. 투데이 샤링 바빠.”
너는 지껄여라 하는 식으로 커미가 용접기를 들었다. 순영은 부아가 치밀었다. 목소리가 사납게 나갔다.
“커미, 커엄.”
“$$#$& @&@#.”
큰 소리로 자국어를 툴툴대는 커미도 만만찮게 핏대를 세웠다. 기가 찼다.
“쟤 지금 뭐라는 거야? ”
난처한 표정인 아대가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았다. 커미가 주섬주섬 작업복을 갈아입었다. 쇳가루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작업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커미, 거기 서….”
뒤쫓아 나온 순영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미가 정문을 열고 빠져나갔 다. 늘어지게 오수를 즐기던 라떼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컹컹 짖었다.
“그러니까 쟤들은 농사만 짓던 애들이라 기계 다루는 걸 어려워한다 니까.”
“아대는 곧잘 따라 하던데? ”
“사람 나름이지. 당신이 성급했어.”
“엘릭이라면 이렇게 속 썩이는 일을 벌이지 않을 텐데….”
순영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엘릭을 떠올렸다.
“나 좀 일으켜 줘. 아대한테 가보게.”
“왜, 어쩌려고.”
“아대까지 가 버리면 큰일이야. 쟤들은 늘 두 명씩 짝지어 행동하니 까 아대를 잘 구슬러서 커미를 데려오도록 해야 해.”
순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로 아대까지 가 버리면 막막하다. 넓은 공장 안에는 여전히 기계 돌아가는 소음과 쌔애한 쇳가루 냄새가 진동 했다. 기계 앞에 껀정하게 선 채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아대가 든든 했다.
“아데, 고마워. 내일 커미 데리고 와. 하루에 만 원씩 더 올려줄게.” 그러겠노라고 남편과 약속했던 아대마저 이튿날 출근하지 않았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커미가 당신을 보면 자극받을지 모르니까.” 순영은 자존심이 상했다. 허리 때문에 운전을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오기는 했지만 내 꼴이 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커미네가 사는 연립 주택 지하 입구에 낯익은 운동화가 햇볕에 널려 있었다. 커미가 어제 들고 나갔던 바로 그 운동화다. 땟국을 벗은 운동화가 오늘은 인물이 훤했다. 컴컴한 계단 아래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영이 귀를 기울였다.
“커미… 아이러브 유.”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미 투.”
어색하게 들리는 커미의 화답에 순영도 한시름 놓았다.
“쏘리, 커미.”
이튿날 아대와 출근한 커미에게 순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태광정밀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자아 오늘은 모두 열심히 일했으니까 저녁까지 먹고 가. 특식으로 커미가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배달시켰어.”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태광정밀 마당에 식탁이 차려졌다. 휴대용 버너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닭볶음탕을 순영이 냉면 그릇 에 한가득 떠서 커미 앞에 놓았다.
“커미, 커미도 친구처럼 머니 많이 벌어서 네팔에 3층 집 메이드 해.” 커미의 친구 중에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3층 집을 지었는데 자
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땡큐 맘.”
빨간 양념이 밴 감자를 뜨면서 커미가 빙그레 웃었다.
“커미, 어제슈즈왜캐리했어?”
순영이 짓궂게 물었다.
“크린 한 거요.”
커미가 수줍어했다.
“넥스트, 앵그리 해도 슈즈 가져가지 마.”
네 명의 웃음소리가 빵 터졌다.

저녁이 되어 고요가 찾아왔다. 순영이네는 공장에서 차로 한 시간 거 리인 시내에 아파트가 있지만 주말에만 가서 쉬고 온다. 출퇴근이 번거 롭기도 하지만 창고에 쌓여 있는 비싼 자재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원래 는 기숙사 용도로 지어진 건물인데 순영이네가 사용하려고 내부 수리 를 해서 불편함이 없다.
“여보, 저거 좀 봐.”
뉴스를 보던 남편이 순영을 불렀다. 러닝머신을 타던 순영이 서서히 보폭을 줄였다.
한국어를 가르쳐 준다는 빌미로 친해진 외국인 노동자들과 성관계를 한 뒤, 돈을 요구하고 성폭행 당한 것처럼 경찰에 허위신고까지 한 60 대 여성에게 실형이 선고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여성은 월급을 본국 으로 보내지 말고 자기에게 달라고 강요하다가 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 니까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조사 결과 이 여성은 결국 무고죄로 걸린 것이다. 순영이 무릎을 탁 쳤다.
“맞네, 엘로로랑 푸르마가 저 여자한테 걸렸었네.”
티브이 화면은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사진으 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요즘 들어서 한국말이 부쩍 늘었기에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실실 웃 기만 하더니만….”
“뉴스에 나오는 일이 우리 집에서도 일어났네.”
“맨날 가불만 해 가더니 저 여자한테 다 바쳤나 봐.”
앵커는 그 여성이 정신질환자로 밝혀졌다며 뉴스를 마쳤다.
“커미랑 아대한테 단단히 일러둬야겠어,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재미있는 세상이야.”
“뭐가? ”
“똑같이 도망 다니는 신세면서 누구는 생명을 구해준 영웅이 되고, 누구는 범법자한테 사기나 당하고.”
“참 그런 일도 있었지.”
순영도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보았던 스파이더맨 청년을 떠올리며 러 닝머신에서 내려왔다.
라떼가 대낮처럼 세상을 훤히 비추는 보름달을 향해 컹컹 짖었다. “라떼도 이젠 늙었어. 짖는 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
“그렇지.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 13년 됐으니까. 사람 나이로 치면 쟤 도 할아버지지.”
“세월 참 빠르다. 우리 여기서 7년만 더 일하고 여행이나 다니자.” “20년 채우자고? 앞으로 7년이 어떻게 펼쳐질지 누가 알아? ” “오늘처럼 무사히, 내일도 안녕하게 하루하루 쌓이다 보면 은행 대출
도 어지간히 갚아질 테고, 그때는 공장 월세만 받아도 우리 사는 데 걱 정 없을 거야.”
태광정밀의 달밤은 도란도란 자장가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라떼가 거칠게 짖어댔다. 나가볼까 하다가 저러다 말겠지 했 는데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도둑이 들었나? ”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라떼, 왜 그래.”
대문 앞에서 원을 그리며 점프를 하던 라떼가 달려와 꼬리를 흔들고 몸부림치다가 다시 내달렸다. 어린아이처럼 낑낑 보채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대문 쪽으로 나가 보았다. 대문 밖에는 밀키트를 주문했던 새 벽배송 빈 가방과 오후에 배달시켰던 그릇이 미처 수거해 가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가만….”
남편이 대로변 쪽을 응시했다. 저만치 언덕마루 달빛 아래 실루엣이 떴다. 껀정한 키에 휘청거리는 허리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 었다.
“에… 엘릭? ”
순영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래, 맞아. 엘릭이구나, 분명히 엘릭이야.”
“왔구나, 엘릭이 우리한테 돌아왔구나. 라떼야 삼촌이 왔어, 삼촌이.” 꼬리를 바짝 올리고 흔들던 라떼가 핵핵거리며 대문을 긁어댔다. “자, 어서 가 삼촌한테.”
남편이 대문의 빗장을 풀었다. 출발 신호를 기다렸던 육상 선수처럼 라떼가 빛의 속도로 내달렸다. 엘릭도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엘리이∼익.”
남편도 라떼의 뒤를 따라 달렸다.
“라떼∼.”
이렇게 아름다운 밤은 얼마만인가. 달빛은 태광정밀 넓은 마당에 강 물처럼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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