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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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커피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겠어요. 벌써 해가 쨍하네요.”
거위님이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보자 다른 네 사람이 고개를 꺾는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광인의 머리카락처럼 흩어져 있다. 군더더기 없이 파랗고 단순하게 하얘서 사실 습하고 뜨거운 가마솥 이미지를 떠 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누군가는 텔레비전 사극에서 배우가 솥뚜 껑 여는 장면을 그리고, 누군가는 불가마 사우나나 한증막을 상상하려 애쓴다. 네 사람은 거위님에게 호감이 있고 굳이 그런 마음을 훼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거위님도 다른 이에 대해 마찬가지 감정이다. 여 인들은 서로에게 꽤 호의적이다.
2주에 한 번씩 구립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이들 다섯 여인은 애초에 활동을‘잘’하기보다‘꾸준히’하는 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타고난 성정이나 선천적인 능력을 내세워 괜히 일을 그르치지 말자고 암묵적 으로 동의한 상태랄까. 선험적 인식이나 개인적 경험을 뛰어넘어 가마솥더위에 공감하려 한 것도 어디까지나 그래서였다. 지역의 인터넷 카 페를 통해 만난 여인들은 에둘러 이렇게 표현했다.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함부로 마음 주고 그러는 건 질색이에요… 질척거리는 관계가 좋을 리 없어요….”
그러므로 다섯 여인은 상대에 대한 호구 조사 같은 걸 일절 하지 않 았다. 어디 사는지, 무얼 하는지 묻지 않았고 나이나 가족 관계에 대해 서도 함구했으며 심지어 호칭마저 카페에서 쓰는 별칭만을 사용했다. 송이님, 미류님, 모야님, 처음님, 거위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기 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씨’대신‘님’을 붙여 부르자는 데에도 대 부분 찬성했다.
미류님이 일행을 재촉한다.
“빨리 끝내고 빨리 흩어집시다.”
빨리 끝내고 빨리 흩어지는 데 이견이 없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구역 으로 간다.
화장실로 들어선 송이님과 미류님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잘 말리지 않은 대걸레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와 지린내 때문이다. 올 때마다 세제를 풀고 솔로 박박 닦으며 청소해도 어김없이 이 모양이다. 송이님이 창문을 열어젖히는 사이 미류님이 대걸레를 빨기 시작한다. 요양원에는 청소를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으나 쓰렁쓰렁 시늉만 하는 게 분명하다. 송이님은 속으로 게으른 청소 도우미를 욕하나 미류님은 안쓰럽게 여긴다. 송이님이 누군가를 비판하기 좋아해서거나 미류님 이 지나치게 선량해서는 아니다. 다른 날 다른 상황이라면 각자의 기분 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말을 삼간다.
부엌을 맡은 모야님은 개수대 아래 물이 새는 관이 고쳐졌는지부터 점검한다. 여전히 물이 흐른다. 물곰팡이가 중력을 거스르며 꿋꿋하게 자리를 넓히고 있다. 모야님은 컴컴하고 축축한 곳에 고개를 들이민 채 관을 이리저리 돌린다. 모야님은 일에 집중하는 동안 잡다한 다른 생각 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는데, 그걸 의식하지는 못한다.
처음님은 각종 의료기구를 소독한다. 공동으로 쓰는 휠체어며 링거 를 거는 거치대에 세정제를 묻혀 꼼꼼히 닦는다. 옆면에 입소자의 이름 이 크게 적힌 개인용 배변기를 씻는 일이 가장 힘들다. 누군가의 엉덩 이가 닿았을 테고 필시 소변이나 대변이 묻었을 기구를 만지려니 구토 가 치밀 지경이다. 장갑을 꼈으나 그 장갑을 뚫고 스멀스멀 손끝까지 전해져 오는 느낌을 견디기 어렵다. 처음님은 자기가 왜 이런 것까지 참아가며 봉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라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다. ‘생각’한다.
오늘은, 모임의 리더 격인 거위님이 하는 일이 가장 쉽다. 텔레비전 을 보는 공동구역과 외부인이 드나드는 대기실 청소다. 화분에 물을 주 고 먼지가 쌓인 곳을 젖은 천과 마른 천으로 번갈아 훔친다. 노인들이 나 그 가족을 마주쳐서 자칫 감정이 드러날 위험이 있는 공간이지만, 거위님은 노련하다. 많은 것을 잃어 허탈하거나 외롭거나 비참한 입소 자들을 상대하는 게 자기 몫이 아니라는 걸 절대로 잊지 않는다. 엄밀 히 말해, 잊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다섯 명의‘님’들 모두 어떤 면에서 귀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 다. 자청해서 봉사하면서도 그걸 어딘가에 드러내어 과시하려 하지 않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가 전적으로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 다. 비록 뚜렷하게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봉사를 통해 분명 무언가를 얻 고 있으니까. 그건 가령 다른 이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의 치유일 수 있고 비밀스러운 일로부터 비롯된 죄책감의 상쇄일 수 있다.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고무하는 방편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건강한 아타락시아의 경지에 이르려는 진정한‘쾌락’지향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잡하고 방만한 의미로 왜곡, 재생산된 쾌락, 즉 물도 있고 빵도 있고 버 터도 있어야 하는 쾌락이 아니라 물과 빵만으로도 충만한 에피쿠로스 식 쾌락 말이다. 그러나 의도란, 사고의 복잡한 미로나 어두컴컴한 지 하감옥에 던져져 있기 마련이다.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에서 순수하거나 순수하지 않은 동기를 축출해 내기란 어렵다.
다행히 여인들은 자신들이 왜 봉사를 하는지, 오래 골몰하지 않는다. 꼬리가 짧은 의문이 굼뜬 영혼을 흐리마리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 다. 그들은 아주 특이할 것도 없고 비범할 것도 없는, 그저 조금 선량한 사람들일 뿐이다.
일을 마친 다섯 명이 휴게실에 모인다. 거위님이 다들 수고했다며 봉 지 커피를 타서 돌린다. 누군가는 봉지 커피가 맛있는 순간이 따로 있 다며 컵을 손으로 감싸고, 누군가는 가끔 먹으면 진짜 맛있다며 호로록 거린다. 커피에 관한 한 취향이 뚜렷한 누군가는 마시지 않은 채 평소 보다 조금 서둘러 떠난다. 열한 시 이십 분, 모임이 완전히 끝난다.
두번째커피
“아, 나 정말….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라.”
정 사모가 앉자마자 유리 엄마를 픽업하다가 일어난 해프닝을 이야 기한다. 브런치 레스토랑의 천장이 워낙 높아 소리가 웅웅 울린다.
“4번출구로 올라오는 중이라는 전화를 받고 깜빡이 켜고 있는데 글 쎄, 저이가 내 바로 앞에 있는 차로 쏜살같이 뛰어가 문을 마구 두드리 는 거야. 운전석에 있던 남자만 내린 게 아니야. 옆에 탄 애인인지 부인 인지 모를 여자까지 내려서는….”
정 사모가 제게 쏟아진 시선을 다분히 즐기며 그 장면을 전한다. 실제로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유리 엄마에게 누구인지를 물으며 쩔쩔 맸다. 오래전 알던 사람인데 자기가 혹시 기억하지 못하나 싶어 당황한 듯도 보였다. 유리 엄마가 언제나처럼 느릿느릿 말한다. 말투 때문에 더 맹해 보인다.
“당연히 정 사모님 차인 줄 알았죠. 주정차 단속에라도 걸릴까 봐 마 음은 급하지, 차창이 깜깜해서 안은 보이지 않지….”
“내차탄게몇번째인데 그걸 못 알아봐? 하여튼 어리바리한 거 알 아줘야 해.”
“우리가 유리 엄마 덕에 웃는다, 웃어. 고맙네, 뭐.”
유쾌한 웃음이 번지는 가운데 유리 엄마를 놀리는 말들이 지칠 줄 모 르고 이어진다. 테이블에 놓인 샐러드며 파스타, 피자 등이 무람없이 자취를 감추는 와중이다.
유리 엄마가 뒤늦게 합류한 후로 모임의 성격이 변했다. 남편들이 사 업상 함께 골프를 치다가 아내들도 만나게 된 그 모임은 애초에 격식을 따지는 자리였다. 여인들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정 사모, 한 사모, 송 사모로 부르며 먀얄먀얄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리 엄 마가 그런 분위기를 바꾸었다.
“전 도무지 사모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나이도 제일 어 리잖아요. 우리 딸 예쁜 이름 좀 쓰게 해주세요.”
처음부터 고집을 피웠으므로 유리의 엄마는 그렇게 유리 엄마로 불 렸다. 유리 엄마는 실수가 잦았고 아무 말이나 툭 던진 후 실없이 웃기 잘했다. 언젠가는 음식점으로 들어서려다 통유리창을 보지 못하고 이 마를 부딪기도 했고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 넘어져서 앓는 소 리를 내기도 했다. 유리 엄마는 자신의 헐렁한 태도가 가학적인 데가 있는 정 사모를 만족시키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한 사모를 방심케 하며 좋은 사람 콤플렉스가 있는 송 사모를 흡족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녀가 처세술의 대가거나 내면이 가난한 이들의 공허가 그런 식으로 메 워지기도 하는 걸 알 만큼 영리한 자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쩌면 사 모들 각자의 개성이, 그 모임의 성격이, 유리 엄마의 태도나 행동을 이 끄는지 몰랐다. 어쨌거나 유리 엄마가 어물게 굴수록, 푼수 짓을 잘할 수록 모임은 활기를 띠었다. 유리 엄마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을 때 면 사모들이 오히려 안달하곤 했다. 이제 슬슬 강림할 때가 되지 않았 어? 재미있게 좀 해 줘 봐. 유리 엄마는 물컹물컹한 말들이 휘뚜루마뚜 루 오가는 걸 즐겼다. 사모들이 정말로 자신을 친근하게 여겨서 그러는 거라고 믿기도 했다.
정 사모는 모임에서 매사 딱 부러지게 말하거나 빈틈없이 행동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끔은 모진 말이나 강퍅한 태도가 튀어나오 기도 했는데 엄벙덤벙한 유리 엄마가 자주 표적이 되었다.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제발. 제일 젊으면 뭘 해? 제일 정신이 없 는데….”
그러나 말이 표독스럽다고 해서 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으나 정 사모는 유리 엄마가 싫지 않았다. 호감이 생긴 건, 아마 유리 엄마가“국내 대학엘 못 가서 미국에 있는 무명 대 학에 가기는 했으나 허송세월만 넘기고 돌아왔다”고 털어놓았을 때부 터였을 것이다. 정 사모는 소위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학벌이고 뭐고를 떠나 실존만으로 당당할 수 있는 부류는 아니어서였다. 나름대 로 교양을 넓힌다고 넓혔으나 어린 시절의 공포심을 물고 끝내 더 어려 워지기만 한 영어만은 도저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정 사모는 ABCD만 간신히 구분할 줄 안다며 너스레를 떠는 유리 엄마가 밉지 않 았다. 언젠가 유명 파스타 가게의 메뉴판에서 도무지 한글을 찾을 수 없었을 때도 그랬다. 당황한 정 사모는 때 이르게 노안이 왔다며 한 사모에게 주문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굴욕적인 순간을 모면한 건, 마침 유리 엄마가“이게 뭐야? 죄다 웬 꼬부랑 글씨네? ”소리쳤기 때문 이었다. 정 사모는, 계산이 빨라도 꼼꼼하지는 않은 한 사모나 너무 순 해서 둔한 데가 있는 송 사모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여기며 유리 엄마 에게 쯧쯧거리는 것으로 제 부끄러움을 숨겼다. 그러나 다음 모임에서 한 사모가 돋보기 달린 펜던트를 선물했을 때, 정 사모는 그걸 비웃는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선의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 사모 는 돌연 의심에 사로잡혔다. 한 사모가 다정하게 구는 건 그저 다정해 서만이 아닐 수 있었다. 모자란 듯 구는 유리 엄마도 사람 좋아 보이는 송 사모도 어쩌면…. 물론 의심스럽다고 해서 정 사모가 달리 할 수 있 는 일은 없었다.
한 사모는 애초에 남편 사업 때문에 생긴 여자들의 모임이니만큼 정 주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절히 호의를 가장하는 선에 서 관계를 깔끔하게 맺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사실 남편이나 사업이 아니라면 유리 엄마가 그리 어리숙하게 굴지도, 정 사모가 늘 유리 엄 마를 픽업하지도, 송 사모가 집에까지 초대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자신 이 정 사모에게 젊은 나이에도 노안이 올 수 있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 고서 굳이 돋보기 펜던트까지 선물한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였다. 하지 만 언젠가 송 사모네 집에서 제가 든 찻잔의 손잡이가 부러져 비슷한 걸로 사다 준 후로는 깔밋한 관계라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정 사모가 찻잔이 너무 예쁘다며“어머, 헤렌디네. 이거 엄청 비싼 건데”라고 말하던 참이었다. 한 사모는 자세히 보려고 찻잔 을 살짝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잔을 던지지도 손잡이를 비틀거나 꺾 거나 당기지도 않았는데 손잡이가 툭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송 사모 는 괜찮다고 말했으나 한 사모는 같은 브랜드의 찻잔을 사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보다 가격이 비싸서 더 억울했다. 비싼 잔을 과시하려고 꺼낸 집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걸 또 굳이 아는 체하며 비싸 다고 언급한 정 사모도 마뜩잖았다. 어쩌면 그런 식의 사고에 가장 어 울릴 법했으나 그날만은 조신했던 유리 엄마마저 미웠다. 그러나 한 사 모는 가만히 마음을 숨겼다. 상대하기 싫은 이들을 견뎌야 할 때도 있 는 법이라 여겼다.
송 사모는 남편의 사업이 아니어도 사람들과 두루 사귀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매번 자청해서 맛집을 소개하거나 푼더분하게 사람들을 챙 기는 것도 그래서였다. 송 사모는 낮은 자세로 친절을 베푸는 스스로가 뿌듯했다. 그러나 의욕이 넘쳐 여인들을 집으로 초대한 건 두고두고 후 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작이 거친 한 사모가 하필 제가 제일 아끼는 찻잔의 손잡이를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송 사모는 너무 큰 대가를 치렀 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눈치 없는 한 사모가 같은 브랜드일 뿐 등급이 훨씬 낮은 다른 잔을 사다 주어 더 분이 났다. 이후로 송 사모는 모임에 흥을 잃었다. 사람이 좀 되통스러워 그렇지 수더분한 성격이라 생각한 유리 엄마나 아는 체하기 좋아해도 근본이 악하지는 않다고 여 긴 정 사모를 참아 넘기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나 수고할 거 다 하 고서, 성인 못 된 기린 신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 사모는 여 전히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고 다정하게 굴었다. 물적 여유만이 아니라 심적 여유까지 겸비한 자신을 대견하게 여겼다.
모임은 언제나처럼 화기애애하다. 개운치 않은 의혹과 서로로 인한 긴장은 끝내 도두뛰어 나오지 않는다. 바람직하고 성공적인 사교 모임.
“커피 조금 더 드실 거죠? 어떤 걸로 드실래요? 제가 다녀올게요.” 유리 엄마가 비어 있는 컵들을 살피더니 묻는다. 모임에서 두 번째
커피 주문은 헤어질 시간을 알리는 일종의 타이머다. 두 잔이나 마셨으 니 혹은 시간을 보낼 만큼 보냈으니 자연스레 인사를 나눌 수 있다. 유리 엄마가 새로 주문한 커피를 들고 오자, 누군가는 두 번째 커피마저 알뜰히 다 마시고, 누군가는 입도 대지 않은 채 들고 다니는 텀블러에 옮겨 담는다. 반쯤 마신 후 다회용 컵에 옮겨 담는 이도 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다들 일어나실까요? ”
“오늘도 정말 즐거웠어. 다음 만남 또 기대할게요.”
단지 살짝 비틀려 있거나 약간 음흉할 뿐인 사람들이 미소를 띠며 인 사를 나눈다. 한 사람은 내친김에 근처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하고, 한 사람은 마트를 거쳐 집으로 가기로 하며 또 한 사람은 헬스장 에 들르기로 한다. 한 사람만이 일터로 향한다.
세번째커피
사장의 옷 가게는 오후 세 시부터 일곱 시 사이에 가장 붐빈다. 주 고 객층인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 밖에서 이런저런 볼일을 보고, 가령 친구 를 만나거나 장을 보거나 운동을 하고, 귀가하기 전에 들르곤 하기 때 문이다. 사장은 오전에 한 명, 오후에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만을 돌려 하루 다섯 시간씩 일하게 한다. 긴 시간 일해 능률이 떨어질뿐더러 보 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정직원은 쓰지 않는다. 그래도 사장의 매장은 최저 시급의 한 배 반이 넘는 급여를 보장하므로 적게 일하고 짭짤하게 벌려는 사람에겐 좋은 직장이다. 사업 수완이 좋은 사장은 아르바이트 생들에게 실장이란 호칭을 주고 버젓해 보이는 명함까지 내주며 말하 곤한다.
“손님들이 제대로 된 매장에서 옷을 산다고 느낄 수 있도록 직원들이 품위 있어 보여야 해.”
세 시 십 분, 연 실장이 얼마간 초조해하며 매장에 들어선다. 착실하 고 다기진 김 실장이 어련히 오전에 문을 열었을 테고 오 실장도 두 시 에 나왔을 테니 십 분 지각쯤이야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깐깐한 사장이 알면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연 실장은 차라리 십 분 쯤 늦을 거라고 미리 말할 걸, 후회하며 매장을 둘러본다. 다행히 사장 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늦게 출근한 건 연 실장만이 아니다. 오 실장은 원래 두 시에 와야 했으나 간발의 차로 연 실장보다 일찍 들어섰을 뿐이다. 오 실장은 퇴근하는 김 실장에게 고마움을 표한 후 막 들어선 연 실장에게 살갑게 인사한다.
“오셨어요? 커피 드실래요? ”
연 실장이 오 실장이 손에 든 걸 흘깃 보더니 턱짓으로 계산대 옆 작 은 공간을 가리킨다.
“난 됐어요. 마실 거면 이쪽에서 마셔요. 흘리면 안 되니까.”
오 실장은 커피 뚜껑이 잘 닫혔는지 확인한 후 선반 위에 둔다. 이미 커 피를 두 잔이나 마셨으므로 당장 마시기는 싫고 버리기엔 아까워서다.
세 시 반, 단골을 상대하던 연 실장은 돌아보지 않아도 사장이 매장으 로 들어선 걸 알 수 있다. 피부를 아리게 하는 차가운 바람 같은 게 실 내를 휘돌아 나가고 옹골찬 무언가가 잔뜩 도사린 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장이 가만히 서서 옷이 걸린 사면 벽을 일별하거나 무심히 바닥을 훑을 뿐인데도 어김없이 그런 분위기가 감 지된다. 함께 일한 어떤 직원은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고 했고, 어 떤 직원은 갑자기 중력이 두 배로 늘어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 다고 했다.
연 실장이 여러 벌의 옷을 산 고객을 곰살궂게 배웅하고 나자, 사장이 연 실장에게 다회용 컵을 내민다.
“이거 마시는 거 맞지? ”
연 실장이, 감사해요, 하자 사장이 내처 묻는다.
“알아봤어요? ”
연 실장은 사장의 목소리가 구멍 뚫린 해면 스펀지처럼 가벼우나 음 색만 가벼울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어깨로 내려앉는 압박감을 무 지근하게 감지하며 엑셀 파일로 작성한 서류를 내민다. 없어진 의류 목 록과 판매가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모두 몇 벌? ”
“그다지 많지는 않아요. 처음 두 달간은 별일 없었고요. 지난달부터 이번 달까지 조금씩….”
사장이 연 실장이 정리한 목록과 총액을 흘끗 보고는 월급보다 많네, 한다. 너무 늦게 알아차린 스스로가 싫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 나 실은 연 실장이 보고 있으므로 그런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어쨌거 나 오 실장이“제 가게라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했 을 때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유형이라는 걸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사장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쯧, 혀를 찬다.
곧 연 실장이 USB도 내민다.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오 실장이 옷을 훔친 날만 편집해서 모은 영상이다. 연 실장은 CCTV를 일일이 돌려보 느라 밤을 새웠으나 군말하지 않는다. 허튼짓하는 직원에겐 가혹하나 정직한 직원에겐 너그러운 사장이 적절히 보상하리라 여겨서다. 연 실 장은 사장이 자신을 신뢰할수록 휴가비며 상여금 명목으로 얻을 수 있 는게많다는걸익히알고있다.
사장은 사람을 쓰는 데에 특히 공을 들였다. 돈 좀 있고 나이 지긋한 부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어디로 튈지 모를 젊은 사람은 들이지 않았다. 애초에 예의범절 같은 걸 배운 일이 없어 보이거나 애교만으로 대충 뭉 개려는 사람도 채용하지 않았다. 일단 채용하면 업무에 관한 한 꼬잘스 레 지적하며 가르쳤다. 가끔 매상을 올리지 못했으면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직원에게는 냉랭하게 말하곤 했다.
“같은 손님인데 왜 당신은 팔지 못하고 나는 파는 거죠? 내가 한두 해 장사했을 거 같아요? ”
사장은 자선 사업하려고 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떤 것도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다. 버티는 직원이 많 지 않았다. 사람을 내보낼 때마다 사장은 투덜대곤 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투성이야. 말이며 태도며 천년만년 일할 것처럼 해 놓고는….”
그러나 태세 전환이 빠른 사장은 언제부터인가 더는 화를 내지 않았 다. 대신 쓸데없이 기력을 소모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이지 않도록 미리 충분한 증거를 모았다. 실랑이할 상황이 올 성싶으면 곧바로 경찰 서로 넘겨버렸다.
연 실장은 사장이 늡늡한 데라곤 없는 사람이어도 존경스러운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손버릇 나쁜 직원을 내보내는 게 어찌 보면 남는 장 사일지 모르겠다고 짐작한 후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사장은 없 어진 옷의 원가가 아니라 판매가를 보상받고 내쫓았다. 처음에는 사장 이 매몰차다 싶었으나 지금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이익이 나지 않으면 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장의 말에 동조하게 되어서였다. 더군다나 사장 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밤새 자료를 준비한 연 실장에게 언제나 적절히 사례했다. 연 실장은 사장을 혹은 사장의 경영 태도를 존중하는 게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오 실장에게 경고할 수 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 실장은 확실히 도를 넘었다. 그러나 오 실장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옷을 훔친 건 아니었다. 사장의 가게를 만만하게 본 건 사실이었다. 그 저 적게 일하고도 꽤 넉넉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곳쯤으로 여겼다. 착 각인 줄 몰랐다. 다른 가게에서는 손님을 친절하게 대하기만 하면 됐다. 옷을 살 사람은 어찌해도 샀고, 안 살 사람은 무얼 해도 사지 않았 으니까.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 그쯤은 경험으로 안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사장은 깐깐하게 직원을 다그치는 사람이었다. 어떤 손님이 오건 수완을 발휘해 액세서리 하나라도 팔아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못마땅 한 사장의 시선을 종일 감당해야 했다. 노동 강도도 높았다. 날마다 꼼 꼼히 청소기를 돌려야 했고 수시로 스팀 다리미질도 해야 했다. 예상과 달랐다. 최근에 오 실장은 남편의 사업이 본격적으로 위기에 처하면서 백방으로 돈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에 물류센터에서 일해 번 돈으로는 사채 업자의 이자를 감당하기만도 벅찼다. 그녀는 언젠가 고 약한 점주를 만났을 때 했던 대로 옷을 하나씩 빼돌렸다. 사장의 옷들 은 품질이 좋아 아는 사람에게 넘기면 흡족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손 님들이 옷을 그대로 두고 나오는 데다 카메라도 없는 탈의실을 이용했 으므로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 경험을 믿은 오 실장은 이런 가게, 이런 사장이 있는 곳에서는 함부로 손을 놀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오 실장이 결국 스카프 한 장도 팔지 못하고 손님을 보내고 나자 사 장이 손짓해 부른다.
“오늘부로 그만두고 나가요. 탈의실 안에 카메라가 없었어도 오 실장 이 가방을 탈의실에 둔 채 들락거린 건 다 찍혔어.”
오 실장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어“네? ”한다. 조곤조곤 말하는 사 장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은 없다.
“도둑질은 눙쳐줄 테니까, 십이만 오천 원 더 내고 조용히 나가요.” “무슨 말이에요, 지금? ”
사장이 회초리 치듯 종이를 휙, 한 번 들었다 놓는다.
“당신이 여태 훔친 옷 판매가 총액이 백육십이만 오천 원. 오늘은 늦게 와서 제대로 일하지도 않았으니, 어제까지 이십일 일 일한 거 계산 하면 모두 백오십만 원. 모자라는 십이만 오천 원, 내고 나가요.”
오 실장이 만 가지 말을 쏟아내고 싶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사장 을 증오하는 데서 시작해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다그친 후 마침내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한탄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당연 히 오 실장은 이런 걸 처음 겪는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다. 슬기롭게 체 념하기로 한 그녀가 사장을 더는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나지막하게 말 한다.
“지금 당장은 못 드려요.”
“영상도 보여줘요? 경찰서에 신고할 겁니다.”
사장이 곧바로 휴대전화기를 꺼낸다. 사장이 시늉만 하는 사람은 아 니란 걸 익히 아는 오 실장이 한풀 더 꺾인다.
“죄송해요. 사정이 급해서 그랬어요.”
사장이 시킨 대로 입구에서 손님이 오지나 않는지 살피던 연 실장은 속으로 피식 웃는다. 사정 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돈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말이다. 심지어 사장마저도 여하한 사 정이 없다면 뭣 하러 옷 장사 같은 걸 하고 있을까.
예상대로 사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입금하세요, 지금 당장.”
이해타산이 밝고 그럴 사정이 충분한 세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기까 지 채 십 분이 걸리지 않는다. 사장과 연 실장이 각자 자기 커피를 홀짝 이는 사이, 오 실장은 제가 사 온 커피를 잊은 채 가게를 나선다.
네번째커피
먼저 온 이가 나중에 온 이를 다급하게 끌어안는다. 두 사람의 공간 에서 연인을 기다린 이가 투정하듯 말한다.
“늦었네.”
“응….”
먼저 온 이는 안달이 났으나 나중 온 이는 느긋하다.
“왜 그리 바빴는지, 뭘 했는지 다 알려줘.”
“일이 많았어. 처참했지. 오늘 내게 있었던 일을 다 말하기는 싫 은데….”
“말해 줘.”
먼저 온 이는 그리 말했으나 입을 맞춰 말을 막는다. 나중 온 이 역시, 그랬고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뿐인 일과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생 각은 없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입술은, 좀 더 있으리라고 짐작한 어떤 것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며 떨어진다. 나중 온 이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며 말한다.
“피곤해. 커피 한 잔 줘.”
“막 마시려던 참이야. 나도 오늘 정말 힘들었거든.”
먼저 온 이가 물을 올리고는 원두를 간다.
“아메리카노랑 에스프레소.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치? ”
나중 온 이가 연인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시선을 맞추며 대꾸한다.
“마시는 커피인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디 있어.”
“커피 마시는 취향에 따라 사람 성격도 다를걸? 물론 이것저것 기분 따라 다 다르게 마시는 사람도 있겠지만, 넌 꼭 그것만 마시잖아. 나도 다른 건 잘 안 마셔.”
“다르다고? 그런가….”
“우린 달라서 끌리는 거야.”
어떤 면에서 다른지 안다고 확신하는 먼저 온 이가 크기가 다른 잔에 커피를 따른다. 나중 온 이가 먼저 온 이의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마신다. 먼저 온 이는 필연의 시간을 거쳐 제게 온 듯한 연인의 손에 정신이 팔려 방금 무얼 놓쳤는지 알지 못한다. 짧게 깎은 손톱들과 단정한 손 가락들, 더께 앉은 고독을 긁어내고 위안을 움켜쥐는 데에는 양보를 모 를 그것들이 비통할 만큼 아름답다고 여길 뿐이다.
먼저 온 이는 나중 온 이가 있어서 지금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이 있는 동안에도 너무 그리워, 심지어 서럽기까지 한 상태를 스스로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특히 연인의 손가락을 볼 때마다 깨물어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지나치게 아프지는 않게, 그러나 유의 미할 정도로는 아프게. 연인이 그걸 너무 싫어하지 않았더라면 한두 번 시도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을 거였다. 언제나 그러고 싶었고 언젠가는 또 그래 보고 싶었다. 먼저 온 이는 갓 부모가 된 엄마나 아빠가 아기를 보며 왜“꼭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현을 쓰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아 름답고 너무 사랑스러운 걸 보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물어서 정 말로 울음을 터뜨리는지, 정말로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혹 은 죽을 만큼, 그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상대가 탐스러워 자연스레 생 명과 관련된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일지 몰랐다. 생명 같은 사랑을 덥석 물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먼저 온 이는 나중 온 이를 그렇게 몹시 사랑 했다. 때로는 진짜로 고통을 주고 싶기도 했다. 사랑과 고통이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사랑이 커서 너무 아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중 온 이는 그렇지 않았다. 연인을 사랑했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 으나 그걸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 했다. 사랑은 즐겁고 유쾌해야 하고 고통은 지겹고 불쾌한 것이어야 맞 았다. 봄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처럼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굳이 연인에게서까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중 온 이는 연인이 가끔 제 손가락을 비롯해 신체의 어느 부위건 깨무는 걸 싫어했다. 나중 온 이는 사랑과 고통이 맞물려 있을 수도 있다는 연인의 말을 대체로 무시했다. 사랑이 끝나면 고통이 올 수도 있겠으나 사랑하는 동안 고통 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고통스러워지면 사랑은 곧바로 끝내는 게 맞았다. 사랑이, 삶이 품은 유일하게 소중한 건 아니니까. 노동의 지 옥을 혹처럼 달고 태어난 삶은 대개 사랑만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것들 도 기르고 어르고 받들어야 하니까. 게다가 사랑이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옅거나 짙은 사 랑과 조금 더 가볍거나 무거운 사랑이 어디에나 물결처럼 흘러 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나중 온 이는 이 사랑이 끝나도 다른 새로운 사 랑으로 옮겨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다만 지금 하는 사랑이 정말 끝나 기라도 하는 걸 굳이 미리 상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먼저 온 이도 나중 온 이도, 어슴푸레 넘겨짚고만 있을지 몰랐 다. 사십 년에도 미치지 못한 인생을 살았을 뿐인 이들이, 고단한 하루 에 젖어 잠시 망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 로 잊었을 뿐, 나중 온 이가 먼저 온 이처럼, 먼저 온 이가 나중 온 이처 럼 생각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사랑에 대해 지금 두 사람의 입장이 다른 건, 저울이나 자로 똑같이 나눌 수 없는 사랑 자체의 속성 때문일 수 있었다. 불균형이 본질인 것을 저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 이, 늘 한쪽으로 더 가거나 덜 간 채 짝다리 짚고 선 걸 즐기기 때문일 수도…. 어쨌거나 사랑이 제 생긴 모습을 일부러 감춘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사 이래 무수한 연인들이 자청해서 속고도 그렇지 않은 척 한 건 분명했다. 대체로 유약하고 비겁하기 때문일 텐데, 살던 대로 사 는, 살다 보면 살아지리라 생각하는 두 사람 역시 대단히 특별한 사랑 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참, 요즘 밤에 잘 못 잔다면서 커피 마셔도 돼? ”
“커피랑 상관없어.”
앙증맞은 작은 잔과 튼실해 보이는 큰 잔이 거의 빈 채로 나란히 놓 인다. 커피는, 어린 시절에 저지른 은밀하고 치명적인 실수처럼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잔 바닥에 찐득하니 끈질기게 잔류한다.
“마시니까 살 것 같다.”
“그러게. 참 좋다.”
곧 나중 온 이의 손이 먼저 온 이의 몸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한다. 위 로 옆으로 아래로, 뜨겁고 아름다운 경계 너머로, 끝으로…. 나중 온 이 의 손가락은 탐색에 능하다. 너무 소중했으나 방심한 순간 잃어버린 걸 찾아내고 그다지 소중한 줄 몰랐으나 돌연 귀히 여기게 될 것도 찾아낸 다. 유능한 그 손가락들은 곡예사처럼 시간을 타고 넘으며, 깡그리 잊 은 것들 사이에서 희미한 단서를 잡아내기도 한다. 앞으로 생길 것도 찾아내 줘. 꼭 그래 줘. 먼저 온 이가 미숙한 사춘기 아이처럼 나중 온 이에게 떼를 쓰기 시작한다. 상대가 소중해서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지 는, 상대가 아름다워 자신도 아름답게 여겨지는 고양의 순간이 안개처 럼 연인을 감싼다. 잠깐의 온전함…. 이윽고 두 사람은 내리막길로 치 닫는 쓸쓸한 사랑의 행로에 휩쓸린다. 언젠가 함께 읽은 책에 나온 라 틴어 구절“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성교 후 모든 동물은 우울 하다).”와 같은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먼저 온 이가“사랑해”라고 하자 나중 온 이도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고, 심지어 창조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먼저 온 이가 연인이 말하기를 재촉하며 투덜거린다. 먼저 온 이는 언젠가 자신도 사랑이란 단어에 의문을 품었으며, 그래서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적 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 불렸어야 할 순간은 금방 유야무야 흩어진다. 사랑을 제외한 생의 온갖 잔여물이 나른한 잠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는 잠시나마 무구해진다.
마지막 커피 그리고 하루
커피에 관한 한 취향이 뚜렷한 여자가 혹은 취향이랄 게 실은 없을지 모를 여자가, 아이와 남편이 잠든 걸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커피를 내 린다. 녹지근해진 밤이 하품하는 사이, 김을 뿜는 뜨거운 물이 신비로 운 검은 물로 변한다. 여자는 소파에 스며들 듯 몸을 웅그려 넣는다.
커피는 여자의 잠을 앗아가지 않는다. 잠을 앗아가는 건 따로 있는 데…. 그건 어디에도 없는 여자 자신이다. 아니다. 실은 없는 게 아니라 굴절되어 자기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여자는 아침에 본 하얀 구름처 럼 가닥가닥 흩어진 자신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려 애쓴다. 그러나… 아 침은 너무 멀다. 거꾸로 짚어보기로 한다. 연인을 만난 장소에서부터 옷 가게와 브런치 레스토랑과…. 여자는 미간에 주름을 모으다가 평생 일관되게 모은 게 주름뿐인가 싶어 쓴웃음을 짓는다. 모든 일에 다른 모든 일이 갈마든다. 산만한 가운데 여자는 자꾸 중첩되고 연루되고 또 와해된다.
여자가 잔을 들어 올려 거의 경건해 보이는 태도로 향을 맡는다. 흩 어진 여자의 조각들이 커피 향과 함께 밤의 장막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엷은 색채만을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는다. 어디…일 까? 여자는 스스로가 미덥지 못해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고작 하루의 무게를 얹었을 뿐인 눈꺼풀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손가락에 커피잔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마침내, 여자를 유일하 게 제대로 아는 커피가 여자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