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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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설아랑 함께 앉고 싶어요.”
회장 민우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어.
“와, 박민우가 한설아 좋아하는구나!”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난리가 났어.
“하하, 너희들 참 이상하다.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나는 더 이상해. 그냥 짝을 정해주면 되지 왜 굳이 손을 들라고 할까? 설아의 흰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진 것 같아.
나는 2년이나 설아랑 같은 반이지만 이상하게 짝이 된 적 없어. 그런데 민우 저 녀석이 당돌하게 먼저 손을 들다니!
수다쟁이 연서가 내 짝이 되었어. 다행인 것은 내가 설아의 뒷자리에 앉게 된 거야.
“고독한 표범 용진아, 내 뒷자리로 온 걸 환영한다.”
민우가 내 별명을 부르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나는 속이 뒤틀렸어.
“용진이가 내 뒤에 앉았네.”
설아가 나를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어.
나는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어. 설아를 보면 자꾸 내 얼굴에 웃음이 감돌아. 설아도 나만 보면 늘 웃어.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설아는 누구에게나 다 친절하지만.
며칠 후 민우와 내가 청소 당번이 되었어. 우리는 빨리 집에 가자며 후다닥 청소를 끝냈지.
“용진아,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민우가 없는 사이 나는 설아의 책상 바닥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
‘설아 건가?’
빨간색의 두툼한 다이어리야. 슬쩍 집어서 펼쳐보니 분홍색 카드가 보였어.
‘어, 누구한테 보내는 걸까?’
카드가 껴 있는 다이어리 날짜가 이번 달 10일인데 빨간색 하트가 그려져 있어.
그 밑에 작은 글씨의 메모도 보였어.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민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교실로 돌아왔어.
나는 얼른 다이어리를 책상 밑에 넣어놨어.
민우와 헤어지고 곰곰이 생각했어. 그날은 무슨 날일까. 설마 설아가 좋아하는 아이의 생일? 아쉽게도 내 생일은 다음 달이야. 설마 민우? 난 가슴이 쿵 했어. 그러고 보니 둘이 짝이 된 뒤 깔깔거리는 일이 잦아. 게다가 둘 다 동네에서 제일 잘 산다는 금빛아파트에 살거든.
다음 날 나는 민우에게 슬쩍 물어봤어.
“민우야. 혹시 네 생일이 언제야?”
“응. 9월 10일이야. 가을에 태어난 왕자님이지. 하하.”
나는 눈앞에 파란 아지랑이가 일며 머리가 아득해졌어.
집에 오자마자 난 백팩을 침대 위에 팽개쳤어. 설아의 눈웃음이 떠올라 눈물이 났어.
나는 앞으로 설아에게 쌀쌀맞게 대하리라 다짐했어.
설아가 나한테 말 걸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답했어. 설아가 연서랑 얘기하며 곁눈질로 나를 볼 때도 나는 늘 고개를 돌렸어.
쉬는 시간에 설아가 실쭉한 눈빛으로 물었어.
“김용진, 너 요즘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나는 얼굴이 호떡처럼 뜨거워졌지만 태연한 척했어.
설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어.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민우가 홱 돌아보더니 항의하듯 내게 말했어.
“표범, 너 왜 설아를 미워하냐?”
나는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소리를 꽥 질렀어.
“뭐라고! 너 다시 말해 봐.”
민우의 눈이 동그래졌어.
“어, 용진아. 너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때 돌아온 설아가 찬찬히 내 얼굴을 바라봤어. 알 수 없는 눈빛이야.
나는 머쓱해져 교실 밖으로 나갔어. 나는 친구들과 싸우지 않아. 원래 고독한 표범이니까.
그렇지만 설아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분홍색 카드를 떠올렸어.
학교 주변에 코스모스가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어.
민우가 자기 생일이라고 반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했어. 민우가 하도 졸라서 나도 안 갈 수가 없었어.
“우리 민우 친구들이구나. 다들 와 줘서 고맙다.”
민우 엄마는 드라마 속의 귀부인 같았어. 먼저 와 있던 설아가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어.
학교에서는 못 보던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도 마음이 아려 왔어.
길쭉한 상에 음식이 듬뿍 차려졌어.
“박민우, 우리 반 까불아. 축하한다.”
아이들은 민우에게 축하 인사를 하고 선물을 건넸어.
식사를 마치고 민우는 커다란 텔레비전에 컴퓨터를 연결해 애니메이션을 보여줬어.
난 고독한 표범답게 혼자 어슬렁거렸지. 벽장의 책꽂이에 큰 사진첩이 눈에 띄었어.
‘얄미운 녀석. 어릴 때 얼마나 못생겼는지 사진이나 볼까?’
나는 사진첩을 꺼내 뒤적거렸어. 뭔가 이상했어. 민우와 설아가 대여섯 살 때부터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가족끼리 찍은 사진도 보였어.
‘뭐야? 둘이 이미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어. 그때 민우가 실실거리며 다가왔어.
“어때? 이 형님의 어린 시절도 잘생겼지?”
“응. 아니, 그런데 너 원래 설아랑 친구였어?”
“아, 맞다. 쉿!”
민우가 흠칫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댔어. 주위를 살피더니 내 귀에 속삭였어.
“너 몰랐지? 사실 설아네 엄마가 우리 이모라고.”
“뭐? 이, 이모?”
“그러니까 말하자면 음, 설아는 나보다 생일이 늦은 사촌동생이야. 설아가 너한테 말 안 했으면 그냥 모른 척해 줘. 설아도 굳이 알리기 싫어하거든.”
내 가슴속에 쌓였던 모래성이 파도에 허물어지듯 밀려나갔어.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었어. 돌아보니 설아야.
“김용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잠깐 와 볼래?”
설아는 내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끌고 거실 끝의 작은방으로 향했어.
“자, 받아.”
설아는 책상 밑에서 뭔가를 찾아 꺼내 나에게 건넸어. 두툼한 쇼핑백이었어.
“이게 뭔데?”
“너 그동안 나한테 자꾸 못되게 굴었지? 내가 안 주려다가 주는 거야.”
뾰족한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부드러웠어.
“하여튼 김용진 너 나빠.”
설아는 새초롬한 눈으로 흘기더니 방문을 닫고 나갔어. 나는 쇼핑백의 물건을 꺼내 보았어. 아, 내가 갖고 싶어 했던 힙합 후드티야. 이 비싼 걸! 또 뭔가 툭 바닥에 떨어졌어. 주워 보니 낯익은 분홍색 카드야. 떨리는 마음으로 펼쳐 봤어.
‘김용진. 너 다음 달 생일이잖아. 미리 선물 주는 거야. 나 아빠 회사 때문에 곧 부산으로 이사 가야 하거든. 너 나 잊지 말고 자주 연락해야 돼. 알았지?’
나는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어. 그러고 보니 설아랑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어.
집으로 가는 길, 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어. 나는 이 모퉁이에서 헤어져야 돼. 내가 돌아서는 아이들에게 갑자기 크게 소리쳤어.
“다들 잘 가라. 한설아! 내일 학교에서 봐.”
아이들은 ‘쟤 갑자기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지만 설아만 활짝 웃었어.
“응 김용진, 너도 잘 가. 내일 봐.”
나는 집으로 마구 내달렸어. 노을 속의 가을 햇살이 솜사탕처럼 달콤했지.
설아는 오늘을 기다렸던 걸까. 카드에 적혀 있는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의 다음 말은 무얼까. 아무래도 좋아. 나는 내일 당장 설아에게 줄 선물부터 사리라 다짐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