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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폭풍우 치던 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민정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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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꼬마개미 콩이와 또또는 눈을 반짝이며 삼촌개미 옆으로 모여들었어요. 삼촌은 모르는 게 없는 만능박사거든요.
“삼촌, 구름도 솜사탕처럼 달콤해요?”
“엄청 보드랍고 폭신하죠?”
삼촌개미가 이끼 침대에 기대앉아 긴 더듬이를 천천히 흔들며 대답했어요.
“그럼! 예전에 저 배롱나무 꼭대기에서 무지개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간 적이 있지. 그곳은 온통 달콤한 향기로 가득하단다.”
배롱나무에 꽃이 피어 마치 분홍빛 구름이 나무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어요.
“우와! 나도 그 구름을 한입 먹어보고 싶어요.”
“난 구름 위에서 방방 뛰어놀 거야!”
그때 바람이 ‘하르르’ 배롱나무 분홍 꽃잎을 뿌려주었어요.
“야호! 분홍 구름이다!”
폭신폭신 쌓인 꽃무더기 위에서 퐁퐁 뛰던 또또가 외쳤어요.
“이제, 비밀정원으로 출발!”
“좋아! 휘이익! 슝슝!”

 

비밀정원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어요. 둘은 노란 팬지꽃 위를 통통 뛰어다니다가 꽃술 사이에서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어요.
“나는 황금개미다!”
콩이가 꽃송이를 흔들어 떨어지는 노란 꽃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두 팔을 쳐들며 뛰어나왔어요.
“콩이야! 나 좀 봐!”
또또가 솜털처럼 가벼운 민들레 씨앗에 매달려서 하늘을 날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야아! 나도 해 볼래! 나도!”
신나게 하늘을 날고 있던 꼬마개미들의 눈에 할머니개미가 보였어요. 할머니개미는 뭔가를 주워서 소중하게 주머니에 담고 있었어요.
“할머니, 그게 뭐예요? 먹는 거예요?”
“먹을 순 없단다. 하지만 이 안에는 아주 소중한 향기와 고운 색깔들이 숨어 있지.”

 

비밀정원의 둘레에는 키가 큰 붉은 보라색 엉겅퀴꽃들이 빙 둘러서 있고 파란 풀밭에는 귀여운 애기똥풀꽃이 노란 무늬를 그리고 있는 여름날이었어요.
비밀정원에서 개미들의 작은 파티가 열렸어요. 귀뚜라미 날개 조각으로 만든 삼촌개미의 악기 연주에 맞춰 모두들 더듬이를 까딱까딱 흔들며 춤을 추었어요. 배롱나무 꽃잎들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같이 춤을 추었어요.
꽃잎 방석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던 할머니개미가 갑자기 더듬이를 바짝 세우며 외쳤어요.
“모두 멈춰라!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오고 있어!”
연주도 웃음소리도 뚝 그쳤어요.
하늘을 쳐다보며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하늘이 저렇게 파랗게 웃고 있는데요?”
“맞아요, 비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 걸요!”
할머니개미는 대답 대신 땅바닥에 더듬이를 바짝 갖다 댔어요.
“땅님이 떨고 있어. 엄청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란다.”
모두 짐을 챙기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개미는 보물이 들어 있는 비단보따리를, 아빠개미는 비상식량을 챙기고 삼촌개미는 튼튼한 밧줄을 챙겼어요. 엄마개미는 아기 포대기 끈을 단단히 동여맸어요.
준비가 다 끝났을 때는 점심때가 훌쩍 지난 뒤였어요.
“배고파요. 점심부터 먹고 떠나요.”
삼촌개미의 말에 할머니개미는 더듬이를 부르르 떨었어요.
“안 돼. 지금 당장 떠나야 해! 어서 서둘러!”
개미 가족들의 피난 행렬이 시작되었어요. 콩이와 또또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어요.
막 강둑을 지날 때였어요. 갑자기 검은 ‘구름 괴물’이 나타나 해님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리지 뭐예요! 사방이 어두컴컴해지더니 휘이이이잉, 무서운 바람이 풀잎들을 세차게 흔들었어요.
“바람 뒤에는 곧 비가 따라온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려무나!”
할머니개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먹만 한 빗방울 하나가 삼촌개미 옆에 푸웅, 하고 떨어졌어요. 곧이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어요.
거센 빗줄기에 개미들은 망치에 얻어맞는 것처럼 아팠지만 서로의 손을 더 꽉 잡고 걸었어요. 길은 미끄덩미끄덩 진흙밭으로 변해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어요.
우지끈 쿠쿵!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개미 가족을 덮쳤어요.
“안 돼!”
비명과 함께 콩이가 소용돌이치는 흙탕물 속으로 휩쓸려 내려갔어요. 아빠개미가 풍덩 몸을 던져 나뭇가지에 매달려 허우적대던 콩이를 겨우 붙잡았어요. 하지만 거센 물살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어요.
“모두 개미 사슬을 만들자!”
개미들은 서로의 허리를 꼬옥 껴안고 길게 줄을 만들었어요.
“영차! 영차! 으영차!”
모두가 한마음으로 애쓴 덕분에 겨우 콩이와 아빠개미를 끌어올릴 수 있었어요.

 

간신히 언덕 위에 도착한 가족들은 흙탕물 범벅이 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어요.
콰르르르 콸콸! 언덕 아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래를 내려다보던 가족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어요.
조금 전까지 살고 있던 가족들의 보금자리가 성난 물살에 장난감처럼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아름답던 비밀정원의 꽃들은 흙탕물에 잠겨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요. 든든한 지붕이었던 배롱나무마저 비틀거리다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쓰러져 거센 강물 속으로 힘없이 떠내려갔어요.
“우리 집이… 우리 정원이 다 없어졌어…, 으아앙!”
콩이와 또또가 울음을 터트렸어요.
작은 동굴을 찾아 안으로 들어간 개미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소중한 우리 집이 사라져 버렸어. 이제 우린 어떡하지?”
“비밀정원의 꽃들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아빠개미가 마른 풀을 모아 작은 모닥불을 피웠어요. 주황빛 불꽃이 일렁이자 동굴 안이 조금씩 따스해졌어요. 삼촌개미는 짐을 풀고 엄마개미를 도와 늦은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였어요.
할머니개미만 비단보따리를 소중히 꼭 안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콩이가 젖은 몸을 털며 물었어요.
“이 보따리 속에는 보물이 들어 있나요?”
모두의 눈길이 할머니개미의 낡은 보따리로 향했어요. 할머니개미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기 시작했어요. 갓난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젖은 나뭇잎을 한장 한장 걷어냈어요.
마침내 비단보자기의 마지막 자락이 열렸어요.
“어, 이건?”
보따리 속에서 나온 것은 번쩍이는 보석이 아니라 씨앗 한 줌이었어요.
“젖은 몸은 말리면 되고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단다.”
할머니개미는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올리며 봄바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여기에는 우리 가족들의 지난날과 내일 우리가 다시 심어야 할 희망이 들어 있단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개미 가족들은 모닥불 아래서 반짝이는 그 작은 알갱이들이 어떤 보석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개미들의 마음속에는 벌써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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