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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진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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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끝에 고추잠자리 하나
처마 끝엔 뽀얀 무명 한 자락

 

한낮 고요 속에 눈길 팔다가 문득 소박한 얼굴이 살아난다. 언제나 봐도 들꽃처럼 수수하고 햇살 내려앉은 옹기처럼 실팍한 그녀다. 뜸하게 마주쳐도 변덕스러운 사심이 들랑거리지 않아 편하다. 우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무던하게 흘러간다. 투박한 오지 아낙처럼 사람다운 품새에 반할 만하면 때로 자경전 꽃담만큼이나 은근하고 멋스럽다. 덤덤하지만 의외로 다색이다. 그중에서도 오밀조밀 구순하게 풀어내는 입담이 으뜸이다.
여린 무순처럼 낭창거리기도 하고 쇠똥구리 굴러가듯 잠시 덜그럭대기도 한다. 물총같이 시원하게 말을 뻗는가 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비껴간다. 끈 떨어진 삽짝마냥 기우뚱 옆으로 제치는가 싶으면 순간적으로 그 뜻을 휘어잡고 튀어 오른다. 용케 제자리다. 뜬금없이 겅중겅중 겉도는가 하여 말머리를 조합하면 방금 채운 철문처럼 똑 떨어지기 예사다.
어느 날 하얀 망초꽃 새순 하나 똑 따서 손바닥에 건네준다.
“회색인가 흰색인가….”
실바람에 웃음 싣듯 말끝을 흐린다. 허허실실 속없는 바람잡이 같아도 눈빛은 총총 밝다. 자드락 옆을 지나도 한발 앞서가 달래 한 움큼 뽑아 든다. 그저 잡초인가 싶을 뿐인데 신통방통 절구통이다. 손끝에 박힌 농군의 혈맥이 달리는 화살촉처럼 땅 위 것들을 훑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그마한 촌락을 빙빙 돈다. 언제 어디서 붉은 앵두 세 알 움켰는지 식당 바닥에 가만 앉으며 살포시 내민다. 영락없는 촌색시처럼 갓 맑은 기운이 넘실대나 싶은데 어느새 묵나물 품평이다. “가지가 심심하니 내 입맛에 맞춤한데, 요 고춧잎도 제법이네”라며 접시를 앞으로 슬쩍 밀어준다. 진중과 함축이 빚어내는 다소곳함,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간혹 절마당에 들면 잊지 않고 눈여겨보는 것이 장독간이다. 부석사나 신륵사, 대원사는 물론이고 불영사, 보문사, 전등사 등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곳은 정갈하고 낯선 고독감이 뭉근하게 고여 있다. 내리쏟는 햇빛에 부처님 말씀 귀담아 쟁이듯 가지런히 놓인 항아리들은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끈다.
어느 초가을 오후, 산사에 들러 고즈넉함에 넋을 빼앗겼다. 수려한 산세에 이물 없이 탁 트인 풍경이 날로 좁아진 도시인의 마음을 훌쩍 밀어낸다. 노스님 정좌했다는 반석에 가까스로 오른다. 그물코처럼 얽힌 세상사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마음 밭이 절로 후련해진다. 가만가만 발길을 놓다가 요사채 근처를 지난다. 아니나 다를까. 나지막한 장독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는 중이다. 도란도란 정겨움이 빛살 아래 환하다. 아담하고 팡팡한 옹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심성 깊은 여인네의 기척같이 고요하게 다가들며 시선을 끌어당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잠시 입담을 가두어둔 사람처럼 흡족하다. 그때 왜 불쑥 눈앞에 그녀가 떠오르는가. 쏘옥 당겨 곁에 두고 싶다. 속살대듯 다감하게 재잘대는 그녀의 말소리가 내 속에서 움을 키운다.
정감 어린 초가삼간에 어린 날을 묻어두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지 아마. 선한 자리에 선한 인물 나기로 비빌 언덕이 없으니 피붙이들 삶의 꼬투리를 꿰어주느라 노상 종종거렸단다. 해가 나면 질 때까지 눈물방울 여미기가 다반사였다지 않던가. 그렇다 해도 타고난 심성을 뒤바꿀 순 없다. 본디 맑고 순한 것을 어디다 비기랴. 지나온 세파에 닳을 만도 하건만 영악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아직도 두툼한 사람다움이 여전하다. 그 맛이 그녀를 싸고도는 인간다움이다. 남을 해할 줄 모르고 남 탓을 하지도 않는다. 만만찮은 인생사였음에도 겉은 여전히 보드랍다. 알고 보면 여물기가 가래 열매다. 삶의 이력이야 그만한 굳은살이면 너끈히 족하다.
삶줄을 붙잡고 그네타기에 조심스러운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멋스러움을 휘날릴 때면 이렇다. 거창하지 않은 꾸밈과 타박타박 걷는 걸음새로 은은한 문자 향을 내뿜는다. 무심히 전해오는 향기가 한겨울 매화 못지않다. 지켜보는 것이 흐뭇하다. 요란하지도 않거니와 은근해서 좀체 질리는 일이 없다. 보이지 않는 사념 줄을 엮으며 저 혼자 짙은 가얏고를 퉁긴다. 밤잠을 밀어내고 오롯이 홀로 골똘하다.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 부지런히 자신의 세계를 수놓는다. 제 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만석꾼 부럽지 않을 뚝심이다.
우리의 만남은 일 년에 서너 번이 고작이다. 날마다 만나서 새새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한자리서 마주쳐도 강 건너 먼 산 보듯 혹은 저만치 봇도랑 스치듯 한 번씩 건너다볼 뿐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간간이 서로의 심중을 읽어 내린다. 굳이 이런저런 내색이 필요치 않다. 무방하고 적절한 거리다. 객쩍은 소리를 해도 배시시 웃음 한 번이면 그만이요, 중차대한 말이 건너와도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끝난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마음의 병을 앓은 모양이다. 누군가의 말끝이 심사에 남아 영 개운치가 못해서이다. 얼토당토않게 흘러드는 말이 마음 언저리를 콕콕 찌르고 있으니 내심 씁쓰름한 게다. 당사자는 딴청이니 사람 속은 알고도 모른다. 세상은 본래 그렇다. 깨진 막사발 구르듯 내뱉는 말은 말이 아니다.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것. 얼룩덜룩 곱지 않게 말에 물들이는 재주는 스스로 밉상을 불러들인다. 그런 말을 일일이 귀담아 무엇하랴. 자고로 속된 것은 쉬이 고쳐지지 않는 법이라 하였으니 성현의 말씀을 깊이 새길 일이다.
삶이 등짐처럼 무거울 때 잦은 한숨을 뱉어본 이는 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느낌을 말이다. 고지는 왜 그리 멀기만 한지 가도 가도 막막함뿐이다. 당신은 불안을 동반한 채 제자리를 동동거려본 적 있는가. 그것은 우울감이 능선을 타기 시작할 때의 당혹감과 서늘한 뒷맛 같은 것이다. 아마도 그녀와 나 사이의 암묵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그것을 건너봤다는 데서 오는 공통분모, 묘한 동질감이 허락된 자리다. 누군가와 계산이 필요치 않은 마음의 공간 하나쯤 갖고 있다는 건 천만다행이다. 쉽게 누릴 수 없는 행운이다.
막걸리 한 사발 넘나드는 곳에 고명처럼 얹히는 게 수저 타령이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살기가 팍팍할수록 수저 타령은 넘친다. 요즘은 웃수저, 근수저도 모자라 막수저가 큰소리다. 웃음을 타고난 사람은 웃수저요, 근육질을 타고난 사람은 근수저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말 내던지기가 일상인 사람은 막수저란다. 사분사분 말재간이 고운 그녀는 뛰어난 입담꾼이다. 거칠거나 삿되지 않고 상대의 마음자리에 좀체 골을 파두는 일이 없다. 어딘가 허술한 바람벽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가 밀물에 반쯤 입을 벌린 조개처럼 어여쁘다. 벌판 끝에 묵묵한 돌하르방같이 사뭇 입을 꾹 다물 줄도 안다.
언제 어느 때나 말을 부려놓는 것이 연하고 말씨가 유순한 그녀는 말재주를 타고난 말수저다. 말과 말 사이에 재치를 끼워 넣고 농담 뜨개질로 말을 이어간다. 동글납작한 언어로 나긋나긋 퐁당퐁당 웃음을 유발한다. 제 속이 편하면 솜씨 좋은 여인네처럼 야무진 입담을 조곤조곤 읊조린다. 드문 만남으로도 남몰래 속정을 켜켜이 쌓아둘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사시사철 몸에 감기는 면포이듯 부드럽다. 너그럽고 따듯하면서 시원해서 좋다. 뒤끝마저 유쾌하다. 이런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은 내 삶의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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