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유행의 진화

한국문인협회 로고 한광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조회수4

좋아요0

두바이 쫀득 쿠키(이하 두쫀쿠)라던가? 갑자기 ‘두쫀쿠’ 열풍이 거세게 부는가 했더니 이번엔 또 봄동나물비빔밥이란다. 재미있는 건 외국인들까지 덩달아 우리의 유행에 춤을 추는 모양이다. 한류의 영향이지 싶다. 참 대단한 한류다. 이제 적지 않은 외국인이 우리의 새로운 시도와 우리의 작은 변화마저도 시차 없이 동시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
내게 유행이란 대부분 갑자기 곁에 왔다가 곧바로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로선 미처 만나보지도 못한 채 흘려보내고 마는 유행이 허다하다. 바지 통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유행에서부터 제법 오랜 시간 주목되었던 스포츠 브랜드도 그렇다. 수영, 테니스, 골프 심지어 등갈비 안주도 마라탕도 그저 스쳐갈 뿐이었지 그걸 누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은 두쫀쿠가 외국인에게까지도 인기라지만 딸아이가 한 알 건네주기 전까지 난 두쫀쿠를 스스로 손을 내밀어 접해본 적이 없다. 이러니 시대감각(?)이 없다는 둥의 놀림에 대해 나는 별로 억울한 것이 없다. 어떤 것이 유행이라도 내겐 그저 잠깐 볼륨을 일으켰다가 곧 다시 평정을 찾는 풍선놀이에 지나지 않는 거로 생각하곤 했다. 유행의 속성은 짧은 생명성에 있다는 게 내 근거 없는 편견이었다.
오랜만에 찌뿌둥한 몸을 좀 풀어볼까 하여 공원길로 향하는데 비둘기 네댓 마리가 눈앞으로 내려앉는다. 누가 또 먹이를 주었나 했지만 그들의 부리는 일부러 뿌려준 먹이를 쪼고 있진 못하고 있었다. 굳이 비둘기를 피해 걷진 않았지만 비둘기들도 내 발길에 대해 겁이 없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를 통과하면서도 눈길을 거두려다가 다시 한번 비둘기들을 돌아다보았다. 쪼는 먹이도 떨어진 곡식 낱알인지 식물 씨앗인지 보잘것없거니와 저들의 자태 또한 예전의 ‘닭둘기(닭처럼 살찐 비둘기)’가 아니었다. 유해조수로 낙인찍힌 후 비둘기들은 강제로 다이어트 중인 것일까? 아니 날씨까지 매서운 겨울이니 그보다 훨씬 혹독한(북쪽 윗마을(?) 사람들의 표현대로) ‘고난의 행군’을 수행 중일까? 어쨌든 전보다 훨씬 날씬해진 비둘기들도 먹이 쪼기를 멈추고 비틀대며 다가오는 자전거만은 피해 푸드덕대며 날아오르는데 몸이 사뭇 가벼워 보인다.
이른 아침인데도 공원엔 비슷한 색깔의 운동복들이 곳곳에 무리 지어 달리는 중이다. 바야흐로 달리기가 유행 중이다. 하나같이 날씬하고 근육 단단한 부러운 몸매들이다. 생각해 보니 이 공원을 달리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늘면 늘었지 절대로 줄지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공원은 쉬 생명을 다하지 않는 유행을 관리 중인 건가?
걷는 내 곁을 스쳐 대오를 맞춰 열 명이 넘는 건각들이 달려가고 있다. 종아리에 굵은 힘줄이 꿈틀거린다. 몸들이 가볍다. 한 소녀가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헐떡거리며 스쳐 간다. 공원이 또 한 명의 젊은 소녀를 달리기 유행에 꾀어 들인 모양이다. 저 달리기 운동은 다른 유행과는 조금 다른 게 있는 모양이다.
먹는 유행이나 입는 유행, 장식하는 유행이나 꾸미는 유행, 기르는 유행이나 모으는 유행 등과는 다른, 금방 식상하여 얼른 다른 유행으로 갈아타고 싶지 않은 그 무슨 성취감 같은 것이 있는가 보다. 아니 꼬리가 이처럼 긴 유행은 문화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줘야 할 것 같다. 흘러 지나가지 않고 꼬리가 어딜지 모르게 계속 흐르고 있으므로.
20년도 넘게 달리기 모임을 이끄는 지인이 있다. 언제나 그의 건각이 부럽고, 그의 몸매가 부럽고, 그의 건강한 자신감이 부럽다. 그야말로 오랜 달리기 동호회의 리더이다. 내가 그를 안 뒤로 나는 그의 나온 배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옷에 관해서는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난다. 종종 그의 동호회원들과 같은 자리에 앉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동호회 회원들이 날로 건강해져 가는 것을 늘 목격하곤 했다. 지금 그의 동호회 회원들은 모두 다 그들의 동호회 리더와 같은 몸매가 되어 있다. 그들 중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였지만, 나는 저들의 부푼 옷으로 배를 감추지 않고도 호쾌하게 웃을 수 있는 몸의 자신감을, 매장에 걸린 맵시 나는 옷에 자신감 있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걱정이 없다는 그들이 부럽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럽기만 할 뿐 가쁜 숨이 힘겨워서 그들 무리로 발을 들이는 건 쉬이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다. 나이가 그걸 더 정당화하니 그들도 더 이상 내게 함께하잔 말은 않는다. 하긴 이 공원은 꼭 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후에 비가 오려는지 아침인데도 하늘이 점점 흐려진다. 날이 흐린데도 또 한 무리의 종아리들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내 곁을 스쳐 달린다. 호수 위에서 검은 가마우지가 자맥질하는가 했더니 빛나는 무언가를 꿀꺽 삼키곤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등 뒤에서 날아온 참새 떼가 표창 박히듯 낙엽 위로 파다다닥 내려꽂힌다.
호수공원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감상하는 사이 내 뒤에서 노부부가 힘찬 걸음으로 두 팔을 흔들며 나를 추월해 간다.
‘걷는 것만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각성이 된다. 종아리에 힘을 주어 걸음 속도를 높인다. 두 어르신보다는 앞서가야지 않겠는가? 어르신들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심을 돋운다. 10여 년 걷기인데 걸음으론 누구에게 추월을 주어선 안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다시 어르신들을 추월하기 위해 팔을 휘젓는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