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1
0
삼일절 이른 아침이다. 가는 빗방울이 가로의 태극기를 촉촉이 적신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의 추위에, 메말랐던 대지의 흙냄새가 코끝을 적신다.
심호흡을 해본다. 휘날리는 태극기의 환상이 이 아침에 떠오르는 것은 뜻깊은 날이기 때문이리라. 얼었던 육신이 녹는 듯, 이날이 우리의 자유를 찾은 날처럼 느껴진다. 가랑비도 이 자유를 재촉하는 듯하고….
천변으로 내려가는 여기저기에 매화가 하얀 꽃잎을 펼쳐 거의 만개한 모습이다. 겨울의 차갑고 긴 시간도 이들에게는 생명을 예비하는 준비의 시간일 뿐이었나 보다. 불에 탄 듯한 먹빛 줄기와 가지 사이사이, 어디에서 이런 순백의 화촉을 준비했다가 터뜨리는 것일까? 질곡 속에서도 이를 이겨낸, 끈질긴 우리의 역사를 보는 듯, 고난과 시련을 겪어 온 태극기의 정신이 느껴지는 것은 이날 아침, 나만의 별스러운 상념인가?
산수유도 뒤질세라 노오란 꽃잎을 펼친다. 아직 꽃 색깔이 빈약하기는 하지만, 그 꽃잎들 사이에 작년에 붉게 익었던 열매가 아직도 소복하게 매달려 있다. 천변의 좌우 7.2km, 2천 그루 가까운 산수유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붉은 열매가 겨울 추위와 매서운 북풍 속에서도 꽃처럼 아름답더니, 새롭게 기지개 켜는 노란 꽃들 사이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의 꽃과 지난해의 열매를 한 나무에서 보게 되는 즐거운 시간이다.
산수유 사이사이, 천변 좌우 언덕에 줄지어 심어 놓은 오백여 그루의 모과나무는 잔가지를 대부분 잘라내고 다듬어 둥치를 키우려나 보다. 자그마한 다섯 잎 분홍색 꽃에서 어른 주먹보다 큰 모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작고 아름다운 꽃과 노랗게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보면서 모과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어졌다.
모과나무 사이사이 듬성듬성 대여섯 그루씩 심어 놓은 수백 그루 배롱나무도 잔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굵은 둥치만 남겨두어 키가 작아 보인다. 다른 나무보다 늦게 줄기가 벋고, 그 새 줄기에서 꽃차례로 피어 풍성한 통꽃이 되면서 여름 내내 볼거리가 될 것이다. 좌광천 좌우 언덕에 담처럼 연이어 심어 놓은 개나리도 어지러운 가지들을 잘 정리하여 두었다. 매화꽃과 산수유꽃에 이어, 일시에 노오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는 천 주변을 화사한 꽃밭으로 바꿀 것이다. 이것은 봄을 알리는 함성이요, 추위를 이겨낸 군중의 힘처럼 느껴질 것이다.
개나리가 심어지지 않은 좌우 오백 미터 언덕에는 4만 그루의 녹차나무가 5단으로 심어져 있다. 작년 11월 늦게까지 핀 하얀 꽃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다. 겨울 추위에도 잘 견뎌낸 초록 잎사귀들이 부산히 새잎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4월 20일 곡우 전에 따서 만든 차를 우전차(雨前茶)라고 하는데, 올해도 새잎을 따서 녹차와 홍차를 만들 생각을 하니 흥겨워진다.
구목정 공원 장미원에 심어 놓은 2백여 종, 5만 그루의 여러 나라 태생의 장미들이 모두 전정을 끝내었다. 5월이면 일시에 꽃잎을 터뜨리고, 은은한 향기와 싱그러운 꽃잎을 가진 가지가지 색깔이 장관을 이룰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즐겁다.
자연은 이렇게 소리 없이 계절의 기미를 알아채고 기지개를 켜고, 이에 앞서서 주변의 수목들을 손본 보이지 않는 일꾼들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렇게 봄이 용틀임 치는 3월의 첫날, 동토의 그 매서운 억압에 나부끼던 태극기의 함성이 그냥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자유를 만끽하는 후손들도 두고두고 이 정신을 새봄처럼 떨치고 일어나라는 죽편같이 느껴진다.
천을 따라 걸어본다. 겨울 물때가 바닥에 쌓여 있지만, 징검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어디 계곡에라도 온 것 같다. 저만치 물속 바위 위에서 까치가 고리를 간댕거리더니, 부리로 깃을 다듬고 물을 몇 번 쪼고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재빠르게 자리를 옮긴다. 웅덩이에는 이곳에서 겨울을 지낸 청둥오리가 거꾸로 머리를 박고 물속의 수초를 뜯는다. 이 녀석들은 꼭 짝을 이루고 다니는 것이 정겹다. 버둥거리는 붉은 다리가 아직도 차가워 보인다.
찌르레기 무리가 재빠르게 날면서 째잭거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산수유 열매를 쪼고 있다. 자그만 참새 떼들은 녹아서 부드러워진 흙을 헤집고 모이를 찾는다. 모든 새들의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무엇에 쫓기는 것 같기도 하고, 부지런한 일꾼들 같기도 하다.
천변과 공원 주변, 이곳저곳의 긴 의자들은 원색으로 진하게 칠을 해두어, 이따금 구름장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반들거린다. 흔들그네들도 역시 잘 손보아 두어 깔끔한 모습이다.
3월의 첫날 아침은 조용하면서 생명력이 넘치는 시간이다. 자연이 이렇게 되살아나고 좌광천의 이곳저곳이 새로운 옷을 입듯이 우리의 찌들고 힘겨운 삶도 심기일전 새로운 다짐과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날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일제에 항거한다는 의미를 넘어, 이렇게 자연의 생명력이 솟구치던 날,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이날을 기억하고, 모두들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힘차게 나아가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작년에 이 천 일대가 부산 동부산권의 제1호 지방공원으로 지정 등록되었다. 그야말로 도시 속의 친수, 산책 공간으로 공인된 것이니, 이곳에 삶터를 둔 우리는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정관신도시를 가로지르는 좌광천 3.5km와 주변 12만 평방미터 속에는 다양하게 조성한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공원과 산책길 자전거길, 약초길, 생태학습구간 등이 가꾸어져 있고 앞으로 더욱 잘 가꾸어 나갈 것이다.
이제 비도 개고 햇살이 간간이 환하게 비친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천변을 걷는 나의 마음은 봄날처럼 가볍다. 그러나 그날의 소리 없는 만세 소리처럼 새로운 약동의 몸짓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