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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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아파트 담 밑으로 이어지는 사철나무 경계수가 대견스럽다. 콘크리트 담을 따라 1m쯤의 폭으로 덧대서 이어지는 경계수들은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괘념치 않고 묵묵히 사철 푸르름을 지켜갈 뿐이다.
대개의 아파트들은 콘크리트 담으로 구획되지만 다시 그에 덧대어 경계수인 사철나무를 심은 것은 담만으로 경계를 구획하는 것이 미덥지 않거나 미관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조상님네들의 관습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
유년 시절 “얘야, 산 보러 가자” 하시며 내 손을 잡고 가시는 곳은 살패(살피의 사투리, 경계표)가 있는 성황당이 있는 선산이다. 이 산은 증조부 이전부터 물려받은 땅(산)인데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하다.
주인이 다른 아래위 산과의 경계는 육안으로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경계가 되는 곳에는 으레 살피 나무인 사철나무가 있었다. 사철나무가 없어진 곳에는 옆의 튼실한 사철나무 가지를 잘라다 식재하면 얼마 안 가면 어엿한 사철나무로 자라난다. 그리고 아랫집 산 임자가 자기네 쪽에 있던 사철나무를 우리 쪽으로 옮겨 심으면(사실상의 우리 땅 침범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용케도 알아보시고 이를 뽑아서 다시 그 자리로 옮겨 심고 그 주인을 불러 호통치시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땅을 지키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게 되었다. 시철나무는 우리 집 영역의 경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사철나무가 왜 살피 나무로 쓰이고 있는지를 곰곰 생각해 봤다. 첫째 사철나무는 사철 푸르름을 간직하는 나무다. 그러다 보니 사철 변함없어서 다른 나무와 확연히 구분하는 데 유리하다. 단풍이 들어 떨어져 나목이 되지도 않고 꽃이 피고 열매 맺더라도 그 푸른 잎을 자랑하며 사철 푸르기에 다른 나무들과 구분하는 데 유리하다. 우리 선대들은 내 것 네것을 구분하는 데도 자연을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사철나무는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우리 마을은 아산만과 남양만을 끼고 있고 우리 뒷산에는 아름드리 푸른 소나무가 울창했으며, 어린 시절을 푸르름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푸른색 푸르름을 좋아한다. 어느 사전에 보니 푸르다는 것은 맑은 하늘이나 풀색처럼 파란색이나 초록색 등 모두를 포괄하여 생동감을 주는 색이라고 밝히고 있다. 순수하게 맑고 진한 파란색만을 의미한다. 푸른 숲 푸른 바다는 진한 파란색만을 의미한다. 파란색 계열에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푸르름은 오직 순수한 파란색만을 의미한다. 푸르름은 싱싱하고 희망적이고 또한 넓은 의미를 갖는다.
아산만이나 남양만의 바다는 앞이 탁 트이는 태평양이나 지중해 같은 넓은 바다는 아니다. 그러나 그 푸르름이 주는 이미지는 어린 내 가슴을 대서양이나 저 멀리는 바이칼호보다 더 넓음으로 자리했다. 소나무밭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가리는 그 소나무들의 푸르름과 특히 바다 울음을 닮은 솔바람 소리는 큰 충격이었다.
더 커서는 바다 빛깔과 역사상으로 유명한 아드리해나 이오니아해의 그 바다를 보면서도 우리의 푸른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나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도 나는 우리 소나무만 한 푸르름을 보지 못했고 솔바람 소리는 더더욱 들을 수가 없었다.
사철나무는 우리의 나무다. ‘사철나무’란 사철 즉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나무로 대접받는다는 뜻이다. 벚꽃나무는 화사한 벚꽃이 달리는 며칠만 나무로서 대접받는 나무다. 사철나무는 그렇지 않다.
사철나무는 한결같이 푸르다. 눈을 맞아도 비를 맞아도 푸르다. 그 한결같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활엽수와는 달리 사철나무는 단풍 드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대개의 나무들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고 눈비를 맞으면 조금씩은 변하게 마련인데 이 나무는 별로 변화의 징후가 없다. 자세히 관찰하면 사철나무 이파리도 떨어지는데 알게 모르게 서서히 몇 개씩 땅으로 떨어져 없어진다. 그리고 공해에도 강하다. 매연이나 먼지를 뒤집어쓴 나무들도 비를 맞거나 물을 뿌리면 산뜻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더 놀라운 것은 겨울 눈을 맞고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다. 눈이 쌓여도 쉽게 꺾이지 않고 오히려 이파리들은 싱싱함이 더해지는 점이다.
오늘 아침도 긴 아파트 담을 끼고 이중의 담벼락 노릇을 하면서 묵묵히 견디는 사철나무 길을 좇아 가면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저들을 지키게 하는 저 푸르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목 민족인 몽골 등 북방 민족인 그들의 고향으로 추앙하는 탱그리 하늘에서 내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푸른 하늘을 질투하며 바다나 호수에 빠진 푸르름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다. 하늘과 바다 등에 어린 청정함과 어찌 보면 냉정하기까지 한 푸른색으로 치장하며 사계절을 모아 땅 위에 자리한 것이 사철나무다.
하얀 목련꽃이 저만치서 화사함을 자랑하는데 아파트 담장을 따라 덧대는 사철나무 식재 작업이 끊이지 않는다.
“영감님! 콘크리트 담장이 있는데 덧대는 사철나무 경계수가 왜 필요할까요?”
“사철나무를 치면 부자가 된대요. Y시 푸른 마을은 이 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모두 잘 사는 마을이 됐대요. 사철나무는 큰 복을 가져오나 봐요. 우리야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일꾼들이지만 그래도 장미넝쿨이나 목련꽃보다야 더 낫제. 어서 가던 길 가세요.”
농반진반으로 뱉어내는 얘기지만 장미나 목련꽃 위에 사철나무를 놓는 것이 마음에 든다. 어느 나라는 멀쩡한 바다에 콘크리트를 붓거나 쇠말뚝을 세워 거기까지가 자기네 영토에 든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이는 바다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철나무가 살피가 된다는 점을 모르는 데서 오는 무식함의 소치이다.
어쨌거나 사철나무는 아버님이 우리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 주신 우리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