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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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센터 케이지 안엔 젖비린내 나는 2개월 미만 강아지 열 마리 정도가 분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가면 슬며시 눈을 피하는 녀석도 있고, 눈을 맞추며 끙끙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방금 들어왔는지 푸들 한 마리가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애달프게 울음소리를 냈다. 가까이 가보니 눈물도 흘렸다. 생애 최초 불안과 두려움에 노출된 어린 새끼들이었다. 한 구석에 변을 보고도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는 시츄도 보였다.
그런 중에 유난히 마음을 끄는 녀석이 있었다. 나랑 눈을 맞추고 있는 말티즈였다. 직원이 그 녀석을 내 품에 안겼다. 흰색 털의 촉감이 비단결보다 더 부드러웠다. 빠르게 뛰는 녀석의 심장 박동과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빤히 올려다보는 두 눈망울엔 하고픈 말이 담겨 있었다. 억겁이라는 단어를 잠시 생각했다.
700g밖에 안 되는 작은 생명을 데려다 놓은 첫날 밤, 반려견을 키워 본 경험이 없다 보니 어찌 보살펴야 할지 몰라 강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룻바닥에 내려놓으니 비칠비칠 미끄러지며 걸음도 서툴렀다. 낯선 환경이 두려운지 자꾸 품에 안겨들고, 이도 나지 않은 잇몸으로 내 손가락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거실 한편에 펜스로 집을 마련해 주고 잠자리에 넣어주었지만, 낯선 환경에 잠 못 드는지 한동안 낑낑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밤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잠들기 전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여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눈을 마주치고 꼬리를 흔들며 또 낑낑거렸다.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들어와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가슴에 찌르릉 신호가 왔다. 유방암 수술 후 아픔만 남아 있는 가슴에 느닷없이 통증 아닌 생명의 신호가 찾아오다니.
아이를 낳고 수유할 때, 나는 가슴이 늘 탱탱 불어 있었다. 아기 생각이나 울음소리만 들어도 유선이 동하여 분수처럼 뻗쳤다. 출산 후, 처음으로 두 사람만의 데이트를 제안한 그는 분위기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두고 온 아기를 생각하는 순간 유선에서 강렬한 분사가 시작되었다. 거즈 수건을 두 개씩이나 겹쳐 넣고 무장을 했음에도 겉옷 밖으로 뿌연 액체가 뚝뚝 흘러서 허둥지둥 돌아왔다. 우아한 식사는 그렇게 날아갔다.
모성이란 꼭 자기 새끼에게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미의 절대적인 돌봄이 필요한 모든 어린 것들에게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특별한 호르몬이 흐르는 것만 같다. 어린 생명들의 절대 생존을 위해 신은 그런 장치를 준비해 놓은 것 같다. 이 세상이 온통 전쟁터지만 멸망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은 원자폭탄보다 더 강렬한 무기, 모성의 영원성 때문이리라. 그래도 그렇지, 강아지 울음소리에 유선이 동한다면 참 민망한 일임이 틀림없다.
이름 짓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름’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조금 익숙해지면 외롭지 않게 한 마리 더 분양받아서 ‘아름’ ‘다움’이라고 불러야지 생각했는데, ‘아름’이가 ‘앓음’이와 동음이의어로 발음이 같다. 투병 중이라서 꺼려졌다. 며칠 궁리해 꺼낸 이름이 ‘보미’다. 늘 우리 곁에 봄처럼 머물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보미에게 서열을 알려주고, 돌보는 일을 분담했다. 물과 사료는 남편이, 목욕과 털 빗겨주기는 내가, 배변 훈련은 둘이 함께 했다. 보미는 자연스럽게 먹이 담당인 남편을 졸랑졸랑 따라다녔다. 그가 낮잠을 자면 방문 앞에서 잠이 들거나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곤 했다. 남편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앉아! 기다려! 등 단순한 제시어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집에서 내 말 잘 듣는 건 보미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미가 인식한 서열 1위는 나였던 것 같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놓지 않거나 무엇에 화가 난 듯 으르렁거리며 손가락을 물기도 했다. 야단을 치면 더 크게 왈왈 짖어대기도 했다. 그럴 때, 내가 약간 힘주어 ‘보미야!’ 부르면 납작 엎드려 조용해졌다. 모질지 못한 남편의 성품을 어느새 간파했던 모양이다. 연민과 정이 넘쳐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남편은 일관성을 유지 못함이 탈이었다. 야단을 치다가도 녀석이 기죽지 않고 ‘曰∼曰∼’ 짖어대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리는 사람이니까.
그와 함께 살아오면서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대립을 일삼지도 않았는데, 우리 가족은 최강자로 늘 나를 꼽았다. 꺾이지 않는 사람, 힘든 일이 닥치면 더욱 평정심으로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 그렇게 살려고 애써왔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병원을 드나들며 20년 넘게 힘겨운 시간을 살고 있지만, 가족의 신념과 상관없이 나는 아픈 내색을 안 하기로 작정하고 사는 사람이다. 천성적으로 인내심만은 참 대단하게 타고났다.
2011년도에 서울생활을 접고 원주로 이사 온 후, 시어머님과 진돗개 ‘가을이’가 먼저 떠나고, 이제 대안은행정길에 남은 가족은 우리 내외와 보미뿐이다. 2007년생 열아홉인 보미, 어떻게 이리 장수하는지 대견하고 짠하다. 보미는 그간 내가 요통으로 보행이 어려워지면 저도 다리를 질질 끌었다. 나 따라 비슷한 병증을 보인 적이 여러 번이었다. 지금은 목 아래 주먹 크기만 한 종양을 달고 사는데, 동물병원에서 검사도 수술도 마다했다. 동병상련의 느낌이 들어 보미 보기를 잘 못한다. 척추 골절상을 입어 안아주지 못한 지도 오래다.
지난해 내가 생사의 고비를 몇 번 겪을 때, 보미도 한동안 곡기를 끊고 눈에 띄게 위독해져서 장례 절차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과 요양보호사의 지극정성으로 다시 생기를 찾았다.
2026년 봄, 어느새 투병 5년째 접어들었다. 고통으로 흐르는 하루하루가 더디고 지루하기만 한데 우리 집 뜨락엔 봄기운이 가득하다. 어느 생명인들 충만하기만 할까. 생멸이 본디 한 몸, 뜬구름처럼 사는 헛헛한 가슴에도 소생의 파장이 전달된다. 천하를 무장해제하면서 찾아드는 봄날 한가운데서 문득 보미와의 첫 만남을 반추한다. 내 투병으로 웃음을 잃은 남편에게 웃음을 안겨주려고 애견센터를 찾았던 날,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보미의 눈빛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