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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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마지막 날, 세상은 백지같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더미 사이로 치킨집 홍보 전단지를 돌리던 닭 인형탈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치킨집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나는 그 인형 앞으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인형 안에 있을 할머니의 얼굴이 비쳐 보였으니까. 처진 눈가와 깊은 주름 사이에 맺힌 땀방울이, 인형 속에 숨어 있어도 자꾸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할머니는 짧은 닭날개를 허우적거리며 전단지를 겨우 내밀었다. 꼭 과장된 무대 연기 같았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할머니는 갑작스레 닭 머리를 벗어 올렸다. 희끗한 머리칼이 드러났고 이에 주위의 사람들이 놀란 듯 걸음을 늦췄다. 해맑게 내게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보자 나는 귓불 끝까지 뜨거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는 치킨집 안쪽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스피커에선 트로트가 흥겹게 흘러나왔다. 인형탈을 벗은 할머니의 셔츠 깃에는 짙은 땀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숨을 고를 때마다 퀴퀴한 땀내가 풍겨왔다. 할머니는 전단지 대신 바람과 꽃이라는 제목의 대본집을 양손 가득히 들고 있었다. 새로 나온 대본집인지 아직 잉크 냄새가 페이지마다 맴돌았다.
“서점에 가니까 저번에 본 연극이 대본집으로 나왔더라.”
목소리엔 들뜬 기색이 감돌았다. 할머니는 천천히 대본집을 펼치며 대사들을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한때 대학로에서 좁은 소극장 무대 위를 누비던 배우였다. 조명이 켜진 뒤 숨소리 한 번으로 관객들을 붙들던 배우였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은 목소리부터 서서히 갉아먹었다. 또렷했던 발음은 점차 침이 가득 섞인 듯 알아듣기 어려워졌고, 감정을 끌어 올리려고 할 때면 계속 쉰 소리가 먼저 새어 나왔다. 시간이라는 그물에 걸려버린 할머니를 찾는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결국 할머니는 무대 위에서 조용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아직도 무대를, 아니 무대에 서 있던 자신을 수십 년이 흘러도 그리워했다. 매번 새 대본집을 사와, 종이 위의 문장들을 입안에서 굴렸다. 때로는 나를 억지로 데리고 치킨집 옆 소극장에 가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하고, 또 메모장에다 기록했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꼭 무대 속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 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무대에 올라 서 있다는 환상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바로 앞에 치킨을 올려 두었지만, 할머니의 눈은 여전히 대본집 안의 대사들만 담고 있었다. 조리실로 돌아가던 중 내쉰 아빠의 옅은 한숨이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굼뜬 몸짓과 함께 대사를 내뱉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창밖 사람들의 시선이 괜히 두려워져 목 안쪽이 조여 가는 감각을 느꼈다.
노을이 유리창에 번지던 무렵,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치킨집 문을 밀고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에 자세히 보니, 옆 소극장 배우들이었다. 웃음소리가 기름 냄새 사이로 퍼졌고, 그들이 주문한 치킨을 쟁반에 올려 들고 다가가던 할머니의 눈동자는 마치 조명처럼 반짝였다. 그때 몸집 큰 배우가 할머니를 보곤 “혹시 저희 극장 자주 오시는 분 아니신가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반가운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테이블에 음식을 올리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할머니는, 헛기침 끝에 배우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연기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 갑작스런 한 마디는 막이 내린 무대에 남은 숨소리마냥 흐릿했다. 배우들 주위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그 침묵을 깨곤 다시 말을 이었다.
“쑥스럽지만 이 늙은이도 사실 한때 연극을 좀 했었습니다. 아직 실력이 괜찮은지 우리 배우분들이 한번 봐주시면 소원이 없겠는데.”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배우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이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신난 듯 어린아이같이 잇바디를 드러내며 곧장 대본집을 펼쳤다.
할머니의 연기는 박자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손짓은 과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점점 더 목에 힘을 주며, 있는 힘껏 감정을 쏟아부었다. 가래가 낀 목소리가 치킨집 안을 가득 채우자,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할머니로 향했다.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사를 읊어갔다. 막바지에 이르러선 테이블 위 닭날개 하나를 들어 올리곤 크게 외쳤다.
“이게 나폴레옹이 숨긴 마지막 보물인가!”
순간 치킨집의 소리가 끊어졌다. 배우들의 딱딱한 웃음소리가 맥없이 떨어졌다. 화장실에서 막 나온 아빠는 그 광경을 보곤 놀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손님들 먹는 걸 왜 방해하고 있으세요!”
굵은 목소리가 치킨집 안을 긁었다. 아빠의 말에 할머니의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조명을 머금은 듯 반짝이던 눈동자가, 짙은 어둠 속에 가라앉은 웅덩이처럼 식어갔다.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숨 막힐 듯한 시선들이 할머니를 조여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부르튼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미안합니다….”
대본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접힌 페이지들이 비죽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시선을 피해 서둘러 치킨집을 벗어났다. 나는 급히 대본장을 챙기곤 할머니를 부르며 뒤쫓아갔다. 눈이 쌓인 거리를 따라 할머니의 얇은 등을 쫓았고, 끝내 손목을 붙잡았다. 거친 기름때가 손끝에 묻었다. 내 부름에 뒤를 돈 할머니의 눈가에는 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말없이 대본집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닦곤 대본집을 받았다. 그러다 순간, 강하게 나를 안았다. 따스한 감촉이 전해졌다.
할머니의 눈빛은 초라하기는커녕, 조명보다 밝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세상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