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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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_ 요즘
곳_ 유원지 근처의 휴식처와 소문난 술집
나오는 사람_ 나국장(83세)|후배(75세)|뭉치(75세)|여인(70대)
무대_ 주 무대는 유원지 근처의 휴식처와 십여 평 남짓한 소문난 술집. 유원 지 근처의 휴식처에는 서너 개의 벤치가 놓여 있다. 그 한옆으로 설치 된 커피 자판기가 돋보인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막이 오르면, 80대 초반의 나 국장, 손목시계 를 자주 들여다보며 힘겹게 등장, 약속 시간에 조금 늦기는 했지만 시간에 거 의 맞춰 도착한 것에 대해 흡족해한다. 그러나 약속한 상대가 부재중임을 확 인하고는 불만을 토해낸다.
나국장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눔이 이거, 약속 시간에 먼저 나와 있 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다니까. 그걸 알면서도 허둥지둥 달려온 내 꼴이 우습지…. (벤치에 가서 앉는다. 손목시계를 보며 유원지 입구쪽의 동정을 살피며) 내가 약속을 잘못했나…? 언제는 뭐 약속을 하고 만났나? 으레 이 시간엔 만나기로 돼 있는 거 아냐. (문득) 이상하다. 밤새 뭔 일이 생겼나? 안 나타날 녀석이 아닌데….
그때 핸드폰 전화 통화를 하며 등장하는 70대 중반의 여인. 등산복 차림에 한껏 멋을 냈다. 나 국장 앞을 오가며 마냥 즐겁게 통화를 한다. 나 국장, 그 런 여인을 멀거니 바라본다.
여인 (핸드폰 통화, 마냥 즐겁다) 참, 너도 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하니? 인생을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마. 쉽게 살아, 쉽게! 낼모래 면 우리도 80고개에 들어서. 더 늙기 전에 인생을 즐기는 거야. 뭐라고? 살다 보면 단 몇 시간을 봐도 마음을 열게 하는 사람이 있고, 쫌팽이 영감처럼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사는 사람이 있어. 그런 인간을 왜 만나? 좋은 사람 있으면 따라가. 따라가서 맛있 는 것도 먹고, 좋은 구경도 하고…, 나도 지금 맘 편한 사람을 찾 고 있는 중야. 그래, 바보야.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즐기면서 행 복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늙음을 후회하지 말고, 몸이 허락하는 한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거야. 혹시 병들더라도 겁먹거나 걱정 하지 마.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는 생로 병사야, 생로병사.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있는 대로 써. 아깝 다고 아끼지 말고 써버려.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냐! 알아? 자신이 자신을 최고로 여기고, 마음껏 사랑하면서 즐겁게 행복을 누리며 사는 거야. 그럴 돈이 없다구? 니가 왜 돈 이 없어? 죽는 소리 그만하고 그냥 눈 딱감고 써! 다시 한번 말 하지만,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냐. 알았어? (나 국장 앞을 지나다가 눈이 마주치자 핸드폰을 접으며) 안 그래요?
나국장 (넋을 놓고 듣고 있다가) 저 말입니까?
여인 안 그러냐고요?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란 말, 안 그래요?
나국장 아, 예, 그럼요….
여인 몇이세요?
나국장 저 말입니까…?
여인 제 또래 아니세요? 나 칠십셋인데….
나국장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인 고맙고 감사하다면…, 나보다 훨씬 많다는 얘긴데, 허기야 그까 짓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국장 그럼은요. 나이야 숫자에 불과한 거 아닙니까?
여인 몇이신데요?
나국장 팔십 중반입니다.
여인 그런데 그렇게 젊어요?
나국장 글쎄요, 다들 그렇게들 말합디다.
여인 혼자세요?
나국장 예? 아, 예…. 집사람은 요양원에 있습니다.
여인 사모님을 여쭤본 게 아니고, 왜 여기 이렇게 혼자 나와 계시느냐 구요?
나국장 아, 예…. 짜식이 오늘 따라 제 시간에 안 나타나는군요… (먼 발 치를 바라보다가) 응, 저기 나타났군요. 새까만 후밴데 이젠 친구 가 됐어요. 버르장머리 치고는 뒈게 고약한 녀석이죠.
여인 요즘 그런 친구들 많아요. 그래도 행복한 줄 아세요.
나국장 행복한 줄 알라구요? 어떤 땐 때려 죽이고 싶은데도요?
여인 그래도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요. 더 구나 선생님처럼 사모님을 요양원에 모셔 놓고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시는 분에게는 말이에요. 고마운 줄 아세요.
나국장 아, 그럼은요.
후배 (다가서며) 뭐가 또 그럼은요야? (하며 여인을 훑어본다)
여인 (후배를 아니꼽게 바라보며) 눈이 몹시 안 좋으신 모양이죠?
후배 예?
여인 뭘 그렇게 훑어내려요?
나국장 너, 야단맞을줄알았다.
후배 첫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십니까?
여인 그래서 확인이라도 하시겠다는 거예요? (나 국장을 바라보며) 정말 때려 죽이고 싶을 때가 많으시겠어?
후배 내얘길하는거야?
여인 예, 그래요. 버르장머리가 저만치서 따로 놀고 있는 후배 아저씨 라고.
후배 가만 있어 봐.
나국장 가만 있긴 뭐가 가만 있어 봐야? 내 얘기 들어.
후배 내 얘길 들어보라니까, 그러니까 자리에 없는 사람을 가지고, 그 것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시시덕댔다는 거야 뭐야?
여인 시시덕대다니? 말씀 좀 삼가하시지.
후배 말을 삼가라고? 하, 이거 참! 이봐요, 아줌씨!
여인 아줌씨라뇨?
후배 아녜요? 고맙게 받아들여요. 아줌마 소리들을 때가 좋은 시절인 줄 아세요.
여인 나 참 기막혀! 아줌씨래.
후배 할멈보다야 애교스럽잖아요?
여인 뭐이런사람이다있어? (나 국장을 향해) 정말 때려 죽이고 싶으 실 때가 많으시겠어.
나국장 참아야지 어떻게 합니까.
후배 내가 오늘 여기 잘못 나타난 거 아냐? 두 분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방해한 거 아냐?
나국장 내 얘길 들어. 자네 오늘 큰 실수했어. 나 오늘 여사님과 첨 보는 사이야. 알아? 헌데 뭘 시시덕댔다는 거야?
후배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나국장 말할 틈이나 줬어? 여사님을 보자마자 아래 위로 쓱 훑어보지를 않나…, 아무튼 자네 오늘 크게 실수를 했어.
후배 내말들어봐.
여인 내 말이고 자시고 그만들 두세요. 그리고 한마디 곁들이고 싶은 건 지금부터라도 오늘을 사랑하세요. 오늘에 정성을 쏟으세요.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시라구요. 특히 잘생긴 미남 아저씨 말이에요.
후배 저 말씀예요?
여인 그럼 여기 누가 또 있어요? 젊었을 때 여자들 속 꽤나 썩히셨겠어. 후배 (흐뭇해서) 그런 소리 많이 듣고 있습니다
여인 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인생은 즐겁게! 전 이만 바이 바 이 합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퇴장)
나국장 (부러운 듯 바라보며) 대단한 여자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즐겨라. 후배 저 여자가 한 소리야?
나국장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란다.
후배 저 여자가 그랬어?
나국장 오늘 한잔 사라! 저 여자가 널 보는 눈이 이상했어. 널 보고 잘생 긴 미남 아저씨라고 했어.
후배 내 말 들어 봐. 저 여자 꽃뱀인지도 몰라. 늙은 꽃뱀.
나국장 에라, 이 흉측한 녀석! 속으론 은근 좋으면서 늙은 꽃뱀이래.
후배 말 다했어? 날 어떻게 보고 그따위로 말을 해? 다신 안 만날까 보다.
나국장 아이구, 겁나라. 내가 할 소리다, 내가 할 소리.
후배 헌데 왜 자꾸 만나자고 전화질이야?
나국장 네가 너무 외로운 것 같아서 그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말야. 후배 내가 할 소리요, 내가. 선배, 나 아니면 아마 우울증에 걸렸을걸? 나국장 그러니까 보기 싫어도 자꾸 만나는 거 아니냐. 헌데 오늘은 왜 이리 늦었어? 난 또 밤새 안녕 못하신 줄 알았지.
후배 자다가 가버렸을까 봐? 그거 아무나 자다가 죽는 줄 알아? 그거 복받은 인생이나 자다가 안녕이야. 난 그런 복도 못 타고 난 모 양이야.
나국장 그런 의미에서 커피 한 잔 뽑아 오라구.
후배 거 참, 거 몸에 해로운 걸 왜 자꾸 마시겠다는 거요? (자판기 앞으 로 가면서) 이건 완전히 낭비야, 낭비.
나국장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 낭비가 아니란다, 허흠!
후배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뽑으려다 말고) 나, 낭비 안 할래.
나국장 야, 농담도 못하냐? 이왕이면 불랙으로 뽑아 와.
후배 (아니꼽게 바라보며) 설탕이 해롭다는 건 아시는군.
나국장 혈당을 높인다며? 나 당료 없으니까 혈당 걱정은 안 해도 돼. 후배 살찐다는 얘긴 못 들었수?
나국장 제발 살 좀 쪘으면 좋겠다. 믹스커피 한 잔 정도로 살찐다면 난 하루에 열 잔이라도 마시겠다.
후배 (커피를 뽑아 오며 한 모금 마신다)
나국장 이 봐! 뭐 하는 짓야?
후배 얼마나 달달한가 하고 맛 좀 봤어. (커피잔을 나 국장에게 내민다) 나국장 (커피를 받아들고) 이걸 마셔, 말어?
후배 아, 왜요?
나국장 왜요라니? 커피를 시킨 사람은 나야. 헌데 왜 니가 먼저 마셔? 후배 맛 좀 봤다고 했잖수.
나국장 맛볼게따로있지. 그거몇모금이나 된다고 홀짝대?
후배 아이, 치사해서 정말? 다시 뽑아 줘?
나국장 좀더 나이 들거든 뽑아 와. 애들이 자꾸 뽑는 건 진짜 낭비다. 후배 국장님,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십니까?
나국장 몇 살인데?
후배 일흔다섯요.
나국장 거의 십 년 차이로구나.
후배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다 같이 늙어 가기는 마찬가지 아뇨? 나국장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후배 갑자기 왜 나이는 들먹거려요. 서글프지 않아?
나국장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다. (커피 한 모금 마신다)
후배 (나 국장 눈치를 살피며) 어떻든 만났으니 또한끼때워야할거아 니유?
나국장 때워야지….
후배 뭘로 하실래요, 점심은?
나국장 글쎄 뭘로 할까…?
후배 청국장 어때요?
나국장 청국장…, 그거 좋지.
후배 천연 보약 아뉴. 성인병 예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거 알아? 특히 나 같은 암환자에겐….
나국장 나 같은 암환자라니?
후배 내 얘길 들어 봐. 내가 암환자였다는 거 몰라? 10년 전에 전립선 암 수술까지 받은 암세포 보유자라고. 알아?
나국장 그랬어?
후배 내 얘길 끝까지 들어. 나 알고 보면 시한부 인생야. 내 몸 어느 구석에서 암덩어리가 터져나올지 몰라. 그래서 내가 까다롭게 음식을 가려 먹는 거라구. 요즘 위가 좋지 않아서 신경을 쓰고 있지만 말야.
나국장 그런데도 그렇게 술을 퍼마셔?
후배 선배하고나 마시지 내가 아무하고나 마셔?
나국장 조심해야겠구먼. 자살 행위 방조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후배 아무튼 갑시다. 청국장 먹고 건강한 인생을 즐기러 말야. 소문난 집 어때요? 청국장 하면 소문난집 아냐? 그리고 나 국장 평생 단 골집 아니유?
나국장 허긴 그래. 헌데 말야. 좀 께름직해서 거긴 안 갔으면 해.
후배 그건 무슨 소리유? 평생 단골집을 마다하다니, 소금이 쉬어터질 소리 아니유?
나국장 그렇게 됐어.
후배 그렇게 되다니? 거기 외상값 있수?
나국장 꼴보기 싫은 놈 때문이야.
후배 꼴보기 싫은 놈이라니? 누구? 온갖 잡놈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 니까 누구라고 딱 지목할 수는 없지만 선배가 눈살을 찌푸릴 정 도라면…, 그게 누굴까? 나도 알 만한 작자유?
나국장 자네가 나한테 추천한 자네의 알량한 친구말야.
후배 내가 추천한 친구라고…? 내가 누굴 추천했지? 아, 그놈! 그놈 아냐, 그놈? 진섭이, 변진섭 말야? 뭉치 맞지?
나국장 그래, 뭉치 맞다.
후배 뭉치가 거기 나타났다는 거유? 나국장 내일 만나기로 했어.
후배 내일 만나기로 했다구? 지겹지도 않아요? 선배의 인생을 망쳐 놓다시피 뭉치 짓을 한 놈인데 그런 뭉치를 왜 만나요? 선배는 배알도 없수?
나국장 꿈에 나타날까 봐 징그러운 놈이지.
후배 그런 놈을 왜 만나? 아무리 내 친구지만 난 그놈을 버린 지 오래 됐다구. 출세욕에 눈이 뒤집힌 놈. 출세라면 제 마누라하고도 바 꿀 놈이 바로 그 뭉친데, 지겹지도 않아?
나국장 내얘길들어봐.
후배 들으나마나 뻔힌 얘기 아냐? 만나지 마!
나국장 내얘기들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달라는데 어떻게 거절해? 후배 (악을 쓰듯) 만나지 마!
순간 무대 한옆으로 뭉치 변진섭의 모습 떠오른다. 나 국장과 후배를 비웃 듯 바라보다 사라진다.
후배 개자식!
나국장 그런 놈을 내게 추천했잖아.
후배 개새끼. 그렇게 비열한 놈인 줄은 몰랐어. 짜식이 내 밑에서 일 할 때만 해도 얼마나 순진했는데. 헌데 정치판이 새끼를 더럽게 만든 거라구.
나국장 내 밑으로 오기 전에 국회의원 출마까지 했었다며?
후배 내 얘길 들어. 얼마나 웃겼는데. 내 밑에서 한 삼 년간 같이 일을 했던가. 헌데 느닷없이 시골로 내려가더니 국회의원에 입후보를 한 거야. 새끼 아비가 한탄스럽게 중얼댔지. 나라가 망하느냐, 집구석이 망하느냐, 갈림길에 선 아버지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 가 없었지.
나국장 (키득대며 웃는다) 알 만해, 알 만해.
후배 웃지 말고 내 얘기 들어. 아들놈이 국회의원이 안 되면 집안이 망하고, 아들놈이 되면 나라가 망할 텐데 아비가 걱정 안 하게 생겼냐고 말야. (하고는 자신도 킬킬대고 웃다가) 이게 웃을 일이야, 웃을 일이냐구?
나국장 헌데 어떻게 그런 놈을 나한테 추천을 한 거야. 자네도 날 엿먹 인거아냐?
후배 엿을 먹이다뇨? 내 얘길 들어 봐. 사람 하나 만들고 싶어서 선배 님한테 보낸 겁니다. 아시겠어?
나국장 결국은 나 엿먹인 거 아냐? (생각만 끔찍하다) 아, 흉측스런 놈! 그 야말로 지 손에 피 한 방을 묻히지 않고 날 죽인 놈이야.
후배 지독하게 애를 먹였다며?
나국장 첨엔 말없이 고분고분 나를 따라주더니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 보타주로 들어간 거야.
후배 사보타주라니…?
나국장 내 얘길 들어. 아, 이 자식이 말야, 어디서 배워 처먹은 숫법인지 고의로 일을 느리게 한다던가,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선동해 가지고 나하고 벽을 쌓게 만들어 놓는 거야. 하늘 같은 국장 말 을 개떡같이 여기고 말야. 나 미쳐. 부서회의 때도 계획서 한 장 내놓지 않고 콧구멍만 쑤시고 앉아 있던 놈야. 어떤 땐 보다 못 해 회의석상에서 내쫓은 일도 있었어. 헌데 안 나가. 죽어라 하 고 앉아서 비웃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거야. 나 미쳐!
후배 아, 그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단 말이야?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봐. 하도 속을 썩혀 인사이동 때 다른 부서로 보낼 려고 했지만 받아주는 부서가 없는 거야.
후배 그냥 잘라버리지 그랬어?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봐. 회사 분위기가 그럴 처지도 안 됐다고. 정부 투 자기관이라 그런지 높은 놈일수록 복지부동, 그냥 정치마당에 줄을 대놓고 눈치 보기에 전전긍긍인 판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어.
후배 어휴, 그래도 그렇지 하루 이틀 아니고 그놈 꼴보기 지겨웠겠다.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봐. 그러다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그놈 세상이 된거야.
후배 그놈 세상이 되다니?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보라니까. 그놈이 어느새 줄을 잡았는지 큰 줄을 잡아가지고 우리 회사에 살생부 명단이 나돌기 시작한 거야. 그 동안 그놈 눈 밖에 난 간부나 사원들을 쳐내기 시작하는데 꼴불견이더라고. 모가지 아니면 엉뚱한 부서로 내몬 거야.
후배 선배는?
나국장 나를 곱게 내버려두겠어? 들리는 소문에 지방발령 제1호라는 소 리에 그날로 사표 내고 지긋지긋한 회사문을 나선 거야. 나 그길 로 회사 근처엔 발걸음도 안 했어.
후배 뭉치는?
나국장 국장이 돼 가지고 목에 힘을 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얼마 전 소 문에 전무이사가 됐다나 봐. 몇 년 잘 해처먹더니 또 정권이 바 뀌자 그놈도 업자가 돼버린 거야. 하루 아침에 그냥 잘리고 만 거야.
후배 그 얘긴 나도 소문에 들었어. 나한테 전화 한 통 없어. 그런 자식 을왜만나?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봐. 그동안 나하고도 연락이 뚝 끊겼었는데 며칠 전부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는 거야.
후배 뭉치 그 자식이 직접 연락을 해왔다고?
나국장 내 얘길 들어. 소문난집 마담을 통해서 말야. 내가 소문난집 평 생 단골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야.
후배 그래서? 갈 거야?
나국장 내 얘길 들어. 낼 소문난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은 했거든. 헌데 썩 맘에 내키질 않아. 갈까 말까, 고심 중이다.
후배 가지 마! 그 자식 만나봐야 꿈자리만 사나워져, 알었어?
나국장 글쎄…, 같이 가 볼래?
후배 거 꿈자리 사납게 왜 그래?
나국장 허기야 같이 갈 수도 없다, 나 혼자만 특별 초대를 받았으니까. 후배 특별 초대라니?
나국장 특별 초대도 몰라? 나하고 단독으로 미팅을 하겠다는 거다. 후배 단둘이 만나자는 게 아무래도 의심쩍은데?
나국장 낼 미팅을 위해서 소문난집을 하루 전세 냈단다.
후배 단 둘이 만나는데 소문난집을 전세를 내? 영업도 안 하고? 손님 도 안 받겠다는 거야? 햐, 별 희한한 놈 다 봤네?
나국장 그러게 말야.(짧은 암전)
무대 밝아지면 십여 평 남짓한 소문난집. 주방 입구엔 제사상처럼 음식을 차려 놓았다. 수의 차림의 뭉치, 심각한 표정으로 제사상 한가운데 놓인 자신 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영정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뭉치 (영정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그래, 슬픈 표정보다 환하게 활짝 웃 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저렇게 웃어보기도 첨이야. 맨날 심각한 얼굴 로 이 눈치 저 눈치 눈치만 살피며 살아온 변진섭 인생아. 웃음 을 잃고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을 숨겨 온 표리부동한 인생이 바로 너였단 말이냐?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사는 가치인 줄 알았단 말이냐? 사람들은 내가 부러웠을 거야. 정신 없이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나를 향해 침을 뱉는 바보들은 없 었을 거야.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며 축배의 잔을 들었음은 들었 지 그 잔에 침을 뱉지는 않았을 거야. 모르지. 나 모르게 침을 뱉 어 놓고 낄낄댔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때 조심스럽게 문 열고 들어서는 나 국장, 실내 분위기에 적이 당황한다.
뭉치 (나 국장을 반갑게 맞이한다) 국장님! 와 주셨군요.
나국장 (뭉치의 모습을 의아스럽게 살피며) 헌데 자네가 맞나…?
뭉치 예, 접니다. 뭉치 변진섭입니다, 국장님!
나국장 헌데 자네 그 꼴이 뭔가…?
뭉치 수의를 입고 있습니다, 국장님.
나국장 수의를 입다니? 그꼴을 보여 주려고 날 만나자고 한 건가?
뭉치 예, 오늘이 뜻깊은 날이라서요.
나국장 뜻깊은 날이라고?
뭉치 예, 제 장례를 치르는 날입니다.
나국장 장례를 치러?
뭉치 예, 제 장례식날이라구요. 제 장례식장에 오신 겁니다. 고맙습니 다. 감사합니다. 안 오실까 봐 은근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나국장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자네도 마음 졸일 때가 있었나?
뭉치 왜 이러십니까? 오늘 이 장례식도 옛날의 껄끄러웠던 일을 깨끗 이 씻어내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나국장 그랬어…?
뭉치 정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정말 죽었다고 칩시다. 제 장례식장에 오셨겠습니까.
나국장 그야 뭐….
뭉치 못 오셨겠죠. 아니, 안 오셨겠죠? 생전에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놈, 살아생전에도 안 보던 놈을 뭣하러 죽은 자리에 찾아가? 아 닙니까?
나국장 솔직히 그럴 수도 있어.
뭉치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국장 뭐 감사까지….
뭉치 솔직히 오늘 이 자리도 국장님을 위해 마련했습니다.
나국장 날 위해 마련하다니?
뭉치 마지막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지난 일 다 잊으시고 앞으론 저를 새롭게 봐주십시오. 다시 뵐 기회가 있다면 말씀입니다.
나국장 음….
뭉치 국장님을 생각하다 보니까 좋은 아이디어까지 떠오른 겁니다. 나국장 좋은 아이디어라니?
뭉치 오늘 이 장례식은 예행연습입니다.
나국장 예행연습이라니?
뭉치 날 잡아가지고 본격적인 제 장례식을 거행할까 합니다.
나국장 본격적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뭉치 장례식에 꼭 올 사람 100명을 초대해 놓고 거창하게 한바탕 즐 겨 볼 작정입니다.
나국장 자네 장례식을 즐기겠다…?
뭉치 일단 내 인생을 정리해 보는 겁니다.
나국장 그때도 날 초대할 건가?
뭉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식은 꼭 초대할 겁니다. 국장님 과 인연을 맺게 해준 후배 말입니다. 그 자식, 그놈은 나보다 더 지독한 기회주의니까 아마 내 초대를 받으면 생각이 많을 겁니다. 나국장 그럴까….
뭉치 틀림없습니다. 자, 그럼 제 장례식부터 시작해 볼까요? 우선 술 한잔 올리시죠. (술 주전자를 건네준다)
나국장 (아직도 어리벙벙해서) 그, 그래…? (얼떨결에 술주전자를 받아 들고 영 정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른다)
뭉치 됐습니다. 이제 고인에게 절을 올리는 대신 마지막 인사로 저하 고 악수를 나누는 겁니다. (손을 내민다)
나국장 (난처하게 악수를 해주며) 아무튼 마지막 인사라니까 손은 잡아 봐 야지? (악수를 끝내고) 다음 순서는 뭐야…?
뭉치 조사요.
나국장 조사라…?
뭉치 간단히 한마디 해주세요.
나국장 간단히라…? 굉장히 어려운 주문이로군.
뭉치 저를 잘 아시잖아요. 남들이 볼 때 제가 성공한 인생 같지만 사 실은 전 완전히 실패작입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떳떳 하게 얼굴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실패,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요, 출세도 명예도 모두가 상처투성이뿐이라 실 패작이나 다름없습니 다. 저를 잘 아시잖아요? 간단히 한마디 해주세요.
나국장 (심각하다) 음….
뭉치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 국장을 바라본다)
나국장 (결심한 듯) 변진섭 인생아, 속시원히 잘 없어졌다!(짧은 암전)
공원 유원지 근처의 휴식처. 후배, 벤치에 홀로 앉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후배 (혼잣소리로) 짜식이 제 장례식을 치렀다. 두 눈 멀쩡히 뜨고 말 야. (키득대고 웃는다)
그때 여인 콧노래를 부르며 등장, 후배 앞을 그대로 지나가려다 말고 돌아 서서 다가선다.
여인 (아는 체한다) 어째 오늘은 혼자 계셔? 선배 되시는 분 안 나오셨 나보다.
후배 싸러 갔어. 어제 음복주를 되게 퍼마셨다고 하더니 탈이 난 모양 이야.
여인 음복주를 퍼마시다니… 누구 제삿날이었어요.
후배 허기야 그렇지. 장례식장에 갔었으니까 제삿날이나 마찬가지지 뭐. 멀쩡한 놈이 두 눈 뜨고 제 장례식을 치렀거든.
여인 멀쩡한 사람이 자기 장례식은 왜 치러?
후배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미친 놈이야, 미친 놈.
여인 헌데 잘생긴 영감님께선 안 가셨었어?
후배 난 초대를 못 받았거든. 초대를 했어도 그 미친 놈 장난질 치는 데왜가?
여인 아, 그래도 가서 감사를 해야죠.
후배 감사를 해?
여인 감사해야죠. 요즘 세상엔 모든 일에 다 감사해야 돼요.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해야 되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안 되도록 틀어 지게 된 데 대해서도 감사해야 되고, 돈이 떨어져 사고 싶은 것 을 못 사게 된 것도 감사해야 되고….
후배 (상대 말을 가로채듯)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감사해야 되고….
나국장 (벤치 뒤편에서 등장하며) 저를 끝없이 비방하고 모략하는 사람들 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되고….
여인 어머? 다 듣고 계셨구나.
나국장 화장실이 바로 뒤에 있어 다 듣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요. 여인 선생님 욕을 했더라면 큰일날 뻔했네요.
나국장 욕을 하셨더라도 감사해야죠.
후배 선배가 어제 뭉치 장례식에 다녀오셨다는 소릴 듣고 밤새 한 잠 도 못 자고 뒤척이기만 했는데 그것도 감사해야 되나?
나국장 여사님에게 물어 봐.
후배 아무튼 꼬박 샜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어.
여인 선배님은요? 편히 주무셨어요? 느끼신 점은 없으셨구요?
후배 공부 많이 했어요. 인생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 녀석은 자신의 장례식을 흥겨운 마당놀이처럼 즐기고 있었단 말 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여인 즐기는 인생이라…, 어떻든 말 되네요.
후배 (화제를 돌리듯 여인에게) 그래, 그동안 편안한 사람 만나셨어? 여인 편안한 사람이라니? 아, 기억력도 좋으시다. 아직 못 만났어요. 나국장 내 오늘 맛있는 거 사드릴게.
후배 돈 있어? 맨날 우는 소리만 하면서. 낭비하지 마셔.
나국장 나이 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래. 안 그래요 여사님? 나 어제 장례식장에 가서 수입 잡았어.
후배 수입을 잡다니?
나국장 내 얘길 들어. 즐거운 기분으로 장례식을 끝내고 나오는데 뭉치 가 봉투 하나를 주는 거야.
후배 봉투를 주다뇨?
나국장 내 부의금이래.
후배 부의금이라뇨? 짜식이 선배한테 부의금을 미리 줬다구?
나국장 그래, 부의금을 받았다니까. 내가 죽으면 못 전해 드릴 것 같아 미리 부의금을 전하는 거래. 부의금 치고는 꽤 많았어. (여인에 게) 자, 갑시다. 오늘 맛있는 거 많이 사드릴 테니 즐겁게 드세요.
여인 아무렴요, 살아 생전에 부의금 받는 사람도 있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인생야. (후배에게) 자, 인생를 즐기러 갑시다.
후배 어이 선배, 그러니까….
나국장 (앞장서 걸으며) 내 얘기부터 들어. 나 두 눈 멀쩡히 뜨고 내 부의금 받아온 사람야. 얼마나 멋진 인생이냐.
후배 (쫓아가며) 어이 선배, 그러니까….
나국장 (퇴장하며) 내 얘길 들어 봐. 나도 말야, 내 인생을 즐겨야겠어. 여인 (따라서 퇴장하며) 그래요, 당신의 인생을 즐기세요.
후배 (퇴장하려다 말고 객석을 향해) 나한테는 부의금 먼저 줄 사람 없나? 후배, 관객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막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