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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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백화점이 있어요. 그리고 백화점 앞에는 백화점보다 유명한 시계탑이 있고요. 나는 그 시계탑의 그림자랍니다. 요즘 나에겐 말 못 할 고민이 하나 있어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속 장소가 시계탑인데 요즘 시계탑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겁니다. 시계탑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제 유일한 즐거움이거든요. 반가워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수줍고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오는 사람,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연신 손을 비비는 사람, 사람들의 행동은 제각각이지만 행복한 마음은 제게도 전해졌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게 변해 갔어요. 하얗게 빛나던 백화점 건물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검은 얼룩이 늘어났어요. 시계탑의 멋진 파란 지붕 귀퉁이도 떨어져 나갔고요. 무엇보다 시계탑을 찾는 사람들 발길이 점점 줄어들면서 내 마음도 얼룩이 번지고 조각이 떨어져 나가 슬펐어요. 더 이상 행복한 마음은 느껴 볼 수 없었으니까요. 혹시 간절히 기도하면 다시 예전처럼 멋진 백화점과 시계탑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수십 미터 지하의 꿈속에 끌려 들어간 듯이 깊은 잠에 빠졌어요. 절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잠에서 깬 건 처음 느껴 본 어마어마한 열기 때문이었어요. 뜨거운 불기운이 쏟아져 내려 따끔따끔하고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온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어요.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환한 빛으로만 보였고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빛에 적응이 되자 주위가 보였어요. 빨간불, 초록불 신호등, 밤새 불을 켰던 가로등, 살랑살랑 가지를 흔드는 가로수 모두 그대로였어요.
아,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곁에 시계탑이 보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백화점은 하얀 철판으로 사방이 가려져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뜨거운 햇살 아래 덩그러니 나만 남아 있었어요.
“시계탑이 없어졌다!”
식은땀이 나고 입이 말랐지만, 빨리 시계탑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아무나 붙잡고 무작정 시계탑의 행방을 물었어요.
“시계탑은 어디로 갔나요?”
모두 머리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만 했어요. 오히려 시계탑 없이 혼자 있는 그림자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해를 피해 다른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림자 모양이 망가진다고 싫어했어요. 해가 지고 어둠 속으로 그림자들이 사라질 때쯤 가로등이 불을 켜며 깨어났어요. 가로등은 거리 한복판에 우두커니 있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어요.
“아니, 너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야?”
가로등은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았어요.
“시계탑은 한밤중에 큰 트럭에 실려 갔단다. 너도 따라갔어야지…, 쯧쯧.”
가로등은 백화점과 시계탑이 사라진 이유를 들려주었어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백화점은 철거 결정이 났고, 시계탑은 수리를 하기로 결정해서 큰 트럭이 실어 갔대요. 트럭은 큰길을 따라 달렸는데 목적지는 모른다고 했어요. 가로등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요. 백화점처럼 부서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까요.
‘자, 시계탑을 좇아가자.’
막상 제집 같은 이곳을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시계탑 없는 시계탑 그림자는 없어.”
가로등의 한마디에 결심을 굳혔어요.
“빨리 시계탑을 찾길 바라. 잘 가.”
가로등은 불을 깜빡이며 배웅해 주었어요.
행여 트럭이 달리던 길을 놓칠까 큰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어요. 길만 따라가면 금방 시계탑을 찾을 줄 알았는데 길은 계속 이어지고 걷고 또 걸어야 했어요.
처음에는 집을 떠난다는 두려움이 컸지만 낯선 곳으로 갈수록 또 다른 두려움이 생겼어요.
“그림자만 다닌다고?”
“그림자가 아니라 괴물 아냐?”
“햇볕에 곧 소멸되겠네.”
지나갈 때마다 수군대는 소리가 집요하게 날아와 머릿속에 앉았어요.
낮에는 큰 도로 옆에 바짝 붙어 걷다가 밤이 되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어요. 골목에는 빛이 없는 곳이 있어서 내 모습을 숨기고 조용히 쉴 수 있거든요.
야옹 야옹, 조용하던 골목에 어린 고양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어요. 이어서 므야웃, 야흣, 여러 마리의 고양이 울음이 날카롭게 어둠을 찢었어요. 밤공기 속 무게가 다른 두 소리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소리가 난 곳에는 역시 작은 고양이 한 마리와 덩치 큰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어요. 싸움을 말릴 용기는 없었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는 궁금했어요. 골목 모퉁이에서 안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 있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자동차 불빛에 내 모습이 드러난 거예요. 커다란 내 모습과 자동차 소리에 놀란 고양이들은 후다닥 도망가 버렸어요. 작은 고양이만 남아 덜덜 떨고 있었어요. 작은 고양이를 안심시키려면 내 정체를 밝혀야 했어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난 그냥 시계탑 그림자야, 그림자.”
작은 고양이는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비친 나를 보더니, 다가와 발로 여기저기를 건들었어요.
“그림자만 있는 건 처음 봐.”
“나도 혼자 지내는 건 처음이야.”
내 상황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자 작은 고양이는 경계를 풀고 내 위로 앉았어요.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어요. 그날 이후 나는 시계탑을 잊고 작은 고양이와 친구가 되었어요.
“난 이 동네가 좋아. 동네 사람들이 길고양이를 잡지도 않고 먹이도 챙겨주거든. 전에 살던 동네에선 시끄럽다고 쫓겨났어.”
작은 고양이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았어요.
“그럼, 그 세 녀석들이 다시 오면 혼내주자.”
갑자기 내가 커다란 그림자로 나타나 놀래키고 작은 고양이가 큰 소리로 겁을 주기로 했어요. 세 녀석은 여지없이 작전에 걸려들어 줄행랑을 쳤어요. 우리 둘은 크게 웃으며 승리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어요. 그때 어두운 골목에 빛을 내는 눈들이 우리 주위로 모였어요. 제일 빛나는 눈이 앞으로 나와 말했어요.
“남을 속이고 겁주는 건 좋지 않아. 저런 이상한 것으로 가리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한다면 너를 이 동네 일원으로 받아들일 거야. 괴롭히는 일도 없을 거야.”
말이 끝나자 빛을 내는 눈들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분명 작은 고양이에겐 잘된 일인데 축하해 주지 못했어요. 나에겐 잊고 있던 현실을 꼬집은 말이었으니까요.
“그동안 즐거웠어. 잘 지내.”
“너도 시계탑을 꼭 찾기 바라.”
같이 지내자는 작은 고양이의 부탁을 뿌리치고 작별 인사를 했어요. 나도 시계탑 그림자인 내 모습을 찾고 싶었거든요.
큰 도로로 나오니 차도 사람도 드물었어요. 그중에 등교 시간이 지났는데 할머니와 커다란 가방을 멘 아이가 눈에 띄었어요. 할머니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달래며 길을 건너고 있었어요.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지랖 레이더를 가동했어요. 그림자로 아이들이 좋아할 모양을 만들어 학교까지 유인하는 방법을 썼어요.
“할머니, 이건 티라노사우르스야?”
“할머니, 이건 뭐야? 모르겠다.”
분명 할머니를 도우려고 했는데 아이의 질문 세례에 할머니는 녹초가 되었어요. 겨우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와 아이를 보다가 익숙한 것이 발견했어요.
“시계탑이다!”
학교 건물 중앙에 서 있는 건 분명 나의 시계탑이었어요. 이제야 내 모습과 이름을 찾았어요.
“야호, 난 시계탑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