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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와 희망봉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재숙(은곡)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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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야 갈 수 있는 그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남쪽 끝 반도에 있다.
처음에 갔을 때, 이름에 걸맞은 압도적인 봉우리일 것이라 상상했던 것과 달리 낮은 돌산에 가까워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하리라는 짐작과 달라서 느낀 첫인상에 불과했다. 밝고 선명한 청록색의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황토색 암석이 햇살에 반짝이며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자연이 빚어낸 바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그 몽환적인 분위기는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고, 설렘으로 달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슴 구석구석이 다시금 희망으로 채워지는 기분. 그 벅찬 감동은 우연이 아니었다. 몇 해 만에 다시 찾은 두 번째 방문에서도, 변함없는 빛깔과 생동감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기 때문이다.
희망봉은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 지역 근해에서 거센 폭풍을 만난 뒤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라 불렀다. 이후 그의 항해를 지원했던 포르투갈 왕이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항해하기 험난한 곳이지만, 인도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항해사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자갈돌이 깔린 바닷가에 ‘Cape of Good Hope’라는 팻말이 없다면 이곳은 여느 해변과 다르지 않다.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서일까.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줄에 고단함이 어른거렸다. 그럼에도 그 뒤에서 포즈를 취하는 이들의 머리가 바람에 봉두난발되어도 올라가는 입꼬리마다 생기가 돌았다. 확연히 달라진 표정에서 새 희망이 보였다.
희망봉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케이프 포인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한 등대는 대항해 시대에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의 중요한 이정표였지만, 지금은 전망대 역할만 하고 있다. ‘폭풍의 곶’ 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등대로 올라갔다. 오르막길이라 힘들 법도 했지만, 오히려 바람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곳은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이라 바람이 유난히 거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임에도 파도가 부서지며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렸다.
그때, 배 한 척이 바람에 출렁이며 지나자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오래전 우리가 살던 거제도 대계마을은 차가 다니지 않아 육지를 오가는 길에 배편을 이용해야 했다. 충무에서 거제까지 다리가 놓였지만 멀리 둘러가야 하고 대중교통마저 자주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도 마산항에서 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우리 가족이 탄 여객선이 한참을 달리다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출항 전 너울성 파도가 있으나 괜찮다는 말에 안도하며 승선했는데, 갑작스레 불어닥친 풍랑에 배가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바람은 점점 거세졌고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덮쳤다. 이어 선객들의 비명으로 선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네 살 난 아들이 “엄마, 바이킹 탄 것 같아 신나요”라고 말해 주변의 눈총을 받았다.
죽음이 성난 파도를 타고 달려드는 환영에 지나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참회의 기도와 함께 뜨거운 눈물이 부둥켜안은 남매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얼굴 위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하얀 마스크팩처럼 덮였다.
마침내 배가 좌초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 되자 선장이 “여러분 중에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방송했다. 절규에 가까운 호소에 한 사람이 뛰쳐나갔다. 그는 그 부근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로, 물살과 바다 지형을 잘 안다고 했다. 노련한 그의 조언에 따라 조심스럽게 운항한 끝에 우리는 큰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비록 정기 항로를 벗어나 멀리 돌아가야 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객들은 거의 초주검의 몰골로 하선하면서도, 길잡이가 되어 준 어부에게만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넙죽넙죽 인사했다. 그 어부야말로 우리 배의 진정한 희망봉이었다.
희망봉 근해는 유럽에서 인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항로였다. 그러기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렸지만, 항해사들은 반드시 그 길을 지나야 했다. 더욱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만난 거친 풍랑은 죽음도 불사해야 할 만큼 어려운 고비였을 게다. 그 힘든 순간, 언덕 위 등대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또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으리라.
삶의 여정에도 세파의 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칠 때가 있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위기에서라도 희망만 잃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서 끝내 그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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