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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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여백(如白)서원 문학기행 때 분홍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성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를 만나면 나는 노신(魯迅)이 생각난다. 수필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데 중국 작가 노신을 좋아한다. 이곳저곳에 내가 쓴 노신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았노라 연락하면 마음이 뿌듯했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를 함께 좋아하는 그녀가 동지처럼 느꼈다.
“저의 꿈은 상해 노신공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상해는 중국의 주요 도시이다. 북경이 정치 중심 도시라면 상해는 경제 중심 도시이다. 상해는 황포강이나 외탄(外灘) 등 중요 관광지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상해를 좋아하는 이유는 노신공원이 있고 노신기념관이 있고 노신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상해에 갔을 때, 노신이 허광평과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하였던 상해의 옛집을 방문했었다. 노신의 서재와 침실 등을 둘러보고, 벽에 걸려 있는 노신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역사의 어둠 속에서 민족정신의 계몽을 위하여 끝없이 투쟁한 투사의 얼굴이 너무 온화한 모습이었다. 상해 옛집은 노신 문학의 귀착지이다. 그곳을 나와 노신공원으로 향했다.
노신공원은 정문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노신이 한 손에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동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노신 묘라는 글씨가 보였다. 노신의 옛집에서 노신공원으로 가며 혼란했던 역사와 시대를 등에 지고 민족정신의 계몽을 위해 걸었던 그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노신이 타계한 것은 1936년 10월 19일 새벽이었다. 그의 관은 하얀 천으로 덮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민족혼(民族魂)’이라 적혀 있었다. 중국 민족이 노신에게 주는 칭호였다.
노신은 나의 일생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나는 너무 어려워서 도중에 진로를 변경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노신 문학 강의를 듣고 ‘중국 민족의 정신 개조’라는 그의 문학적 동기를 통하여, 중국 문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상해에 가면 노신공원을 찾는 이유도 동일하다. 그의 동상 앞에서 문학이라는 산을 다시 오르리라는 다짐을 하였던 그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다시 내 마음을 묶어두기 위하여.
노신공원의 노신 동상 앞에서 분홍 베레모를 쓴 성 선생님이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 광경이 그려졌다. 노신도 그림을 좋아했다. 특히 판화를 좋아했다. 성 선생님은 현직 약사이다. 노신이 의학에서 문학으로 길을 바꾸었듯이 그녀도 약학에서 문학을 선택하고 있다.
노신은 선진의학을 공부해서 국민들을 질병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에 유학한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의 필름에서 중국인들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진로를 의학에서 문학으로 바꾼다. 중국인에게는 몸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병든 정신을 개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민족의 정신 개조’라는 문학의 동기가 확실하다. 성 선생님에게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여백서원에서 점심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성 선생님과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노신 선생님 팬이세요?”
“그럼요. 노신 선생님은 나의 이상형이에요.”
나중에 헤어지는데, 그녀가 한마디 더 했다.
“지금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난 그분과 결혼했을 거예요.”
나는 성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났다. 그녀와 나는 연적 사이인 것이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에 수업을 듣던 학생이 노신의 초상화를 선물하였다. 연구실 탁자 위에 초상화를 세워두고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쳐다보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보았다. 당시 오전에는 「아큐정전」 강독을 하고 오후에는 ‘노신문학 세미나’를 강의했다. 강의하는 데 힘을 얻고자 노신의 사진을 간직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옆방 교수님이 연구실을 방문했다. 탁자 위에 있는 노신 사진을 보더니 “남편이에요?” 하고 물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젊은 날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