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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소야곡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인종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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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세 나이를 산수(傘壽)라 하고, 여기에 한 살을 더하면 구십(九)을 바라본다고(望) 하여 망구라 한다. 할망구란 이런 연세의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덧 내 나그네 인생길이 산수의 언덕에 이르렀다. 돌아보면 실로 아득한 세월이다. 그날들을 채운 숱한 사연이 기억 속에 쌓여 있다. 그중에는 보석 같은 사연의 추억도 많이 있다. 가슴에 간직된 추억은 머릿속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기억이 현상을 찍은 사진이라면 추억은 삶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그냥 부르짖는 외침이 아니라 정감 어린 속삭임이기에 아름답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돈을 벌겠다며 고향 언덕을 넘던 날, 울면서 배웅한 어린 동생들의 눈물, 고달픈 그날에 타관에서 받아 읽은 어머니의 편지, 검은 태양이 불볕을 쏟던 날 배본할 월부책 뭉치를 양손에 들고 찾아간 시골 초등학교 마당, 펌프에서 퍼올린 냉수에 미숫가루 타 주신 그 학교 여선생님의 손길, 생일날에 타관 땅 밤길을 홀로 걸을 때 곁에서 동행해 준 친구가 들어올린 축배의 잔, 선생님 인기가 짱이라며 애교 떨던 여고생 제자의 쪽지편지 등…. 모두가 고된 삶을 환희와 감동으로 장식해준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추억은 이렇듯 봄날의 꽃처럼 향기롭고, 여름날 삼복의 태양과 맞서는 열정이다. 그것은 오솔길에 낙엽을 밟으며 나누는 다정한 대화요, 겨울 산을 하얗게 덮는 따스한 이불이기도 하다. 그런 추억이 하나라도 더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삶의 현상을 보지 말고 삶을 해석하라는 말을 새기며 평생 일기를 썼다. 개떡 같은 현상의 날을 찰떡으로 해석하여 일기를 쓰고 잠자리에 들면 귓가에 요란하던 소음이 잠잠해진다. 이렇게 기억이 아닌 추억의 일기를 쓴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고 고맙다.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라고 말해주는 제자의 찬사가 빈말이 아니라면 그건 추억의 일기를 쓴 덕분일 것이다.
바람결에 사라져 갈 기억에다 소중한 세월을 매어 사는 건 억울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추억이 아닌 기억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리움에 젖은 추억이 아닌 앙상하게 메마른 껍질을 그냥 헤집고 있었다. 불현듯 추억의 푸른 샘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조바심이 앞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내 생애 만추의 벌판을 향해 달렸다. 거기에 아직은 주워 모을 추억의 이삭이 남아 있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과연 퇴색된 시작노트에 가슴으로 쓴 시와 수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젊은 날의 노트를 하나씩 하나씩 간추렸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드려 『추억은 늙지 않는다』로 엮었다. 이 시와 수필은 오롯이 옛 벗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며, 반백년을 동행해준 아내에게 쓴 편지이다. 이제 이 편지를 곱게 접어서 추억의 우체통에 넣는다.

 

한가한 밤이면 옥상에 올라 추억의 소야곡을 즐겨 부른다. 애수의 소야곡은 다만 슬픈 애가가 아닌 그리움의 노래이다. 아픈 기억은 세월과 함께 흘려보내고 사랑이 메아리치는 추억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

 

늙는 세월을 막아낼 장사는 없다.
그래도 ‘추억은 늙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추억은 늙음의 방패요, 불로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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