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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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를 수 없는 육신의 노쇠 때문인지 올해 날씨는 유난히 춥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조차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봄날의 꽃구름, 가을 단풍을 선사하던 벚나무 가로수와 뒷산의 온갖 활엽수는 나목이 되어, 후려치는 칼바람과 맞서 싸우느라 귀신울음 같은 비명을 허공으로 흩뿌리는 동지섣달 엄동설한. 사철 푸른 소나무도 재선충이라는 희소병에 백약이 무효인지 누렇게 집단 고사 중이다.
그러나 우리 집 베란다에는 연두, 노랑, 붉은 꽃들로 가득하다. 한겨울에 온실 아닌 서민 아파트 베란다에 갖가지 꽃들로 가득하다면 누가 믿을까만, 우리 집 베란다에는 겨울을 건너뛰고 봄이 한창이다.
이 꽃이 우리 집 화분에 어떻게 왔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근 십 년을 함께했던 염좌나무가 너무 덩치를 키운 데다가 게으른 주인을 만난 탓에 밑둥치부터 썩어 넘어지는 바람에 정리를 하고, 빈 화분으로 두었었다. 작년에는 어떻게 찾아왔는지 나팔꽃이 화분의 주인이 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름 내내 이른 아침마다 나날이 새로운 꽃을 피워 늦잠 자는 주인의 버릇을 고쳐 주고, 씨앗까지 충실하게 익혀서 한살이를 끝냈다.
바싹 마른 나팔꽃 덩굴을 정리하고 빈 화분으로 두었더니 머잖아 화분에는 온갖 풀들이 싹을 틔웠다. 그중에 한 놈의 기세가 유독 튀었다. 어릴 적 따 먹었던 까만 열매, 까마중 같았다. 어차피 주인 없는 화분이니 케세라세라.
다른 화분에 물을 줄 때 잡풀 화분에도 여분의 물을 뿌려주었을 뿐인데, 어느 날부터 하얀 꽃을 피우더니 며칠 지나 씨방에는 좁쌀만 한 연둣빛 열매까지 달았다. 머잖아 까맣게 익은 까마중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눈맞춤을 하게 되면서 여분의 물이 아니라 충분한 몫을 주었다.
까마중은 자라면서 잭의 콩나무가 되어 갔다. 키만 아니라 열매도 까마중이라기보다 고추를 닮아 갔다. 맞아, 화초고추! 그런데 우리 집 베란다에서 이십 년을 함께했던 화분에서 어떻게 화초고추가 싹을 틔웠을까? 나는 화초고추를 키운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능성은 화분갈이할 때, 보충한 흙에 고추 씨앗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결론을 낼 수밖에 달리 인연이 없다. 노랑, 연두, 붉은 고추들이 오종종히 하늘 바라기를 하고 있다. 작고 여린 연둣빛 고추가 나날이 몸피를 키우던 어느 날, 진짜 고추인가 싶어 한 알 따서 씹었다가 지옥 맛을 보았다. 내 평생 처음 맛본 매운맛!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맛을 느끼기도 전에 입 안은 화통으로 변하여 몇 사발의 물로 수십 번 헹궈내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몇 년 만의 강추위라는 엄동설한에도 우리 집 베란다에는 태어난 순서대로 연노랑과 연두, 붉게 익은 고추와 빨갛게 여문 군자란 열매가 꽃처럼 이쁘다. 그런데 어제부터 나의 시선과 마음까지 사로잡은 진짜 이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와는 지난해 어느 봄날, 나무시장 한 귀퉁이에 펼쳐 놓은 노점에서 만났다. 같이 간 지인이 선물한 오천 원짜리 플라스틱 화분이다. 베란다 한 귀퉁이에서 주인의 눈길도 받지 못하고 어쩌다 남은 물로 뿌려준 것으로 생명의 끈을 잡고 있던 철쭉은 가지 끝마다 봄을 물고 있다. 세어 보니 일곱 개 아기 입술!
봄이 왔어요∼, 봄! 군자란도 작년의 꽃대 두 대에 아직 붉은 열매를 달고 있음에도 한가운데 새로운 꽃대를 튼실하게 밀어 올려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 기세에 플라스틱 화분은 세로 금이 툭툭 터진다. 사람 힘으로도 화분을 찢기란 쉽지 않을 터, 억누를 수 없는 새 생명의 힘이다! 꽃과 열매는 만나지 못한다더니, 우리 집 군자란은 미어터진 화분에서 사이좋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혀 간다. 그러나 결심의 시간이 왔다. 장강의 앞물결도 뒷물결을 거스를 수 없는 법! 군자란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작년의 꽃대를 가차 없이 잘랐다. 마침 봄비가 내려 촉촉한 아파트 화단과 야산 언덕배기에 열두 개 잘 익은 군자란 열매와 잘 익어 쪼글쪼글해진 화초고추도 몇 군데 묻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인연(四大因緣) 화합으로 우리 집 베란다를 장식했던 봄의 화신이여! 범사(凡事)에 소중함과 감사함을 일깨웠던 나의 천사들! 그대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방생하노니 널리 중생들과 더불어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