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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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무엇이든 기계가 대신해주는 시대다. 글의 교정도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금세 해결되는 세상에서, 한 어른의 시조집 교정을 부탁받았을 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잘 모르는 분인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문협 회장님의 간곡한 청에 마음 한켠이 움직였다.
그날, 카페 창가에 앉아 처음 마주한 분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조심스레 내민 원고에는 한글과 한자가 뒤섞여 있었고, 문장 곳곳에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는 한 자 한 자를 살피며 맞춤법을 바로잡고 표기법을 다듬었다. 옛스런 표현과 한자를 섞어서 쓴 문체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의 향기가 아니라 한 인생이 흘려보낸 시간의 결이었다.
시조 한 수마다 겸손과 사랑, 고요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아내를 향한 애틋한 회고,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향한 따스한 손길, 신앙이 빚은 인내의 노래. 그 모든 것이 평생을 다해 쌓아올린 삶의 시편처럼 느껴졌다. 시조집의 제목은 ‘음치의 노래’였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세상의 화려한 합창 속에서 묵묵히 자기 노래를 부른 사람, 남 앞에 서기보다는 자신을 낮추어 한 음으로 살아낸 사람, 그 이름 안에 담긴 겸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교정을 마치던 날, 그는 근처 빵집에 들러서 갓 구운 단팥빵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 내게 건네셨다.
“엄마가 귀가하실 때는 그냥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봉지에서 피어오르는 단내가 따뜻했다. 그것은 단지 빵의 향이 아니라 마음의 온기였다.
며칠 뒤, 수정본 교정을 다시 맡았을 때 그는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식사 후, 만두 한 보따리를 내주며 웃으셨다.
“또 그냥 가면 안 되죠. 집에는 먹을 걸 챙겨가야 해요.”
그의 인심은 오래된 정겨움으로 반짝였다. 단팥빵과 만두, 두 번의 작은 선물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의 깊은 인품을 배웠다.
시조집이 완성되고,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사회를 맡아 그분의 약력을 소개해야 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분은 바로 ‘봉천동 슈바이처’라 불리던 의사였다. 평생을 무의도(의사가 없는 섬)를 돌며 무료진료를 하고, 노후엔 자신이 경영하던 병원을 팔아 전 재산을 모교에 기부한 분. 서울시민대상 제1호와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이 땅의 진정한 봉사자였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이력에도 그는 시조집의 제목을 ‘음치의 노래’라고 정했다. 자신을 낮추고, 이름보다 마음으로 노래하는 삶. 그것이 그분의 방식이었다. 그의 시조들은 그의 말씀대로 세상의 멜로디에 맞추지 못한 ‘음치의 소리’로 절대 들릴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 안에 누구보다 순수한 진심과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문득 단팥빵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그분의 미소를 떠올린다. 참척의 고통을 견뎌낸 그의 삶은 달콤하지 않았으나, 끝내 식지 않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조용히 낮은 음으로 살아낸 날들, 그 겸손한 노래가 시조집 곳곳에 스며 있다.
『음치의 노래』, 그 제목은 이제 나에게 ‘겸손의 노래’이며 ‘사람의 노래’다. 세상이 바쁘게 흘려보낸 말들, 정과 배려와 사랑이 그 노래 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리고 그 음치는 오늘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크지 않게 그러나 오래도록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