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34
0
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외관은 비슷해 보였지만 지붕 색이며 예쁘게 가꿔 놓은 정원까지 다른 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몇 해 전 아버지는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셨다가 쓰러지셨다. 가족들이 달려갔을 때 6·25참전전우회 회장님이 곁을 지키고 계셨다. 그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아 외사촌에게 서둘러 집을 팔고 부산으로 모시고 내려왔다. 집주인이 바뀌었으니 집이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오랜만에 옛집에 들렀으나 어색함에 여기저기 자꾸 두리번거린다.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띈다. 쇠죽솥이다. 보일러를 새로 다 깔았을 텐데 아직 방 하나는 구들장을 그대로 쓰는 모양인지 아궁이와 가마솥이 남아 있다. 가까이 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오래 전부터 불을 때지 않은 듯 아궁이는 깨끗했다. 몇 년째 불맛을 못 봤는지 가마솥은 검다 못해 야위고 창백해 보였다. 아무래도 시골집 분위기를 내려고 그냥 남겨둔 모양이다. 아버지는 어디서 주워오셨는지 긴 나무작대기로 아궁이 바닥을 긁어 보신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뽀얀 먼지 사이로 아련한 추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엔 가마솥 없는 집이 없었다. 어떤 집은 두 개 이상 가진 집도 있었다. 부엌에서 밥 짓는 솥도 있고 외양간이 가까운 사랑채에 연결되어 여물을 끓여 내던 쇠죽솥도 있었다. 우리 집에도 큰 쇠죽솥이 있었는데 솥은 하루도 쉬지 않고 쇠죽을 끓였다. 여름엔 소들이 들판에서 풀을 뜯는 날이 많아 여물을 따로 끓여주지 않았지만 가을 이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는 아침저녁으로 끓여야 했다. 매일 하루 두 번씩 쇠죽을 끓이는 일 외에도 솥은 할 일이 많았다.
설이 다가오면 부모님께서는 두부를 만드셨다. 두 양반이 멧돌을 돌려 불린 콩을 갈아서 새벽부터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 쇠죽솥이 한몫했다. 솥은 아궁이 가득 불을 물고서 무거운 무쇠 뚜껑이 들썩일 때까지 참았다가 사방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눈물이 흐르면 한소끔 끓은 뒤라 솥 안에 든 모든 것들은 다 익어 있었다.
더군다나 무쇠는 한번 열을 받으면 쉽게 식지 않아 무언가를 끓여낸 뒤에도 다른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두부를 다 만들고 난 뒤에는 솥을 깨끗이 씻어낸 후 찬물을 부어 놓았다. 솥은 금방 다시 따뜻한 물을 만들어 놓는다. 엄마는 손을 넣어 적당한 온도를 가늠해 보신 후 널빤지를 솥 안에 넣고 우리 남매를 부르셨다. 오빠와 나는 설을 앞두고 때를 밀 참이다. 청송의 일월은 살을 에일 정도로 추운 날씨였으므로 우리는 냉큼 가마솥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따뜻하고 공기는 차가웠다. 엄마가 아무리 아프게 때를 밀어도 절대로 솥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콩이 여물 시기가 되면 아버지는 햇콩을 뿌리째 뽑아 흙을 털어내고 쇠죽을 끓일 때 위에 올려서 함께 삶아 주셨다. 솥이 언제 눈물을 흘리나 기다리다가 지치면 솥단지 옆을 팡팡 치며 “울어라∼ 울어라∼”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오일장에서 간고등어라도 사 온 날은 아궁이 앞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참새 같은 자식들은 물론이요 고양이와 개까지 몰려와 아버지 손끝만 바라보았다. 자글자글 석쇠에서 고등어 굽는 소리가 나고 고소한 냄새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따끈한 부뚜막에 앉아 아버지가 떼어 주시는 고등어 속살을 맛있게 먹고 있노라면 솥은 덩달아 신이 난 증기기관차처럼 칙칙폭폭 수증기를 내뿜었다.
솥뚜껑을 힘겹게 열어 보신다. 수십 년을 열고 닫았던 그 익숙한 무게가 손끝에 느껴지리라. 솥 안엔 아무것도 없다. 솥은 몇 년째 일을 접은 모양이다. 솥도 아버지 나이만큼 되었으려나.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가열차게 지펴왔던 불은 이제 꺼지고 없다. 아이들은 다 제짝을 만나 그곳을 떠났다. 늙은 부부는 그러고도 몇 해를 더 불을 지피고 살았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더 이상 불을 때지 않으셨다.
실로 몇 해 만에 두 전우가 조우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함께 조석(朝夕)으로 희망의 불꽃을 피워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끈끈한 전우가 이제 백전노장이 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아버지는 어쩌면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힘겨워하며 쇠죽솥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안으로 삼킨 울음은 검은 아궁이 저 안에서 다시 따스한 온기가 되어 구들을 덥혔을 것이다.
아버지는 먼지 쌓인 솥뚜껑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고생 많았데이. 니도 인자 푹 쉬라.”
팔순을 훌쩍 넘긴 노인의 한숨이 솥 안에서 메아리쳐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