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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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바람도 포근하고 따뜻해서인지 비가 내린다. 봄비 같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한바탕 꽃들이 피어날 듯하다. 연한 봄빛을 쫓아 목을 길게 빼고 창가를 서성이다가 우산을 들고 나섰다.
빗속을 걸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제법 경쾌하게 들렸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줄기를 받아보았다. 부드럽게 젖어든다. 차도를 벗어나 공원에 이르니 채 녹지 않은 잔설이 빗물에 녹아들고 있다. 운동장을 도는 사람도 없고 공을 차는 사람도 없는 텅 빈 공원. 그런데 운동장 울타리에 어머나! 꽃이 피어 있다. 한두 송이 개나리가 며칠 따뜻했던 햇볕의 속삭임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비바람에 젖어 떨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라도 서서 우산을 같이 쓰고 내 온기로 감싸주었다. 그렇게 서 있는 운동화 속으로 빗물이 젖어 들고 양말이 축축해져 왔다.
그러니까 지난 시절 나의 삶 속에 봄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이런 봄이면 홀로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노래도 작사 작곡해서 불렀다. 그 시절 톱 가수였던 조용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가 라디오, TV, 거리마다 온 세상에 울려 퍼졌던 때가 있었다. 나도 따라 부르고 성인이 되면 노래를 만들어서 유명한 가수들에게 주고픈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이루지 않았지만, 작사가 뭔지 작곡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동화책과 교과서 어떤 책이든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아마도 나의 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되었던 것 아닐까 싶다. 국어 시간에 썼던 시가 잘 썼다고 교단에 나가 읽고 칭찬을 받았을 때였던 것 같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학기별 학년 올라갈 때마다 학교에서 주는 교과서를 음악책까지 다 읽고 공부할 문제 요점정리도 다 했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요점정리를 하면 내가 해 놓은 대로 맞고 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모든 교과서의 다음 페이지는 어떤 글들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4학년 때 도서관이 딸린 교실에서 공부를 했던 것도 한몫을 했었을 터. 방과 후 도서관에서 사서도 하고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도서실에서 살았다. 그때 가장 감명 깊게 읽고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막연히 작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해찰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쉬지 않고 연마하며 활짝 꽃피울 날을 꿈꾸어 왔다. 묵묵히 자신의 꽃대를 밀어 올리듯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어왔다. 때론 눈멀고 귀먹어 삶의 지표가 되었던 문학! 봄날 따뜻한 햇볕 같기도 여름날 화살촉 같기도 가을날 황금 들녘 같기도 겨울날 북풍한설로 다가왔던 문학은 내 삶의 그늘 뒤란에 찬란한 빛과 같았다. 장인이 한 작품을 위해 그의 삶을 녹여내듯 나의 시간을 졸여낸 지도 어언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가끔은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생각에 잠길 때면 윤동주의 시 「쉽게 씌어진 시」가 생각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봄이면 산에는 진달래가 연분홍 꽃망울을 터트리며 분분히 번져 온 산하를 물들인다. 담장 위에는 노란 개나리가 치렁치렁 치마폭으로 담장을 넘는 봄의 눈부심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사계절 중 유독 봄을 좋아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노랗고 연분홍의 황홀한 세상을 마냥 좋아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삶을 살면서 화려한 봄날보다 회색빛 겨울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암담했던 어둠이 엄습해오고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쫓기듯 동동거리며 살았다. 옆도 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긴 그림자를 끌며 안절부절못했다. 때로는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해 걷다가 쏜살같이 뛰어 꽃들의 경계 밖으로 달아나야 했다. 수시로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불안감에 시달리고 귀에서는 삐이이 기계 소음 소리와 매미 울음소리가 났다. 이명과 얼굴이 달아오르며 병명 없이 온몸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나를 옭아매었던 그 곡절은 성장통이었다.
어느 해 봄날 열망해오던 그 꿈은 반세기를 넘긴 어른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중단했었던 학업도 다시 시작을 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망했던, 한국영농신문 수필 부분 문학상과 한국농어촌공사 주관 문학상을 받고, 시집도 냈다. 그 찬란한 봄빛을 더욱더 빛나게 함은 지난 계절의 폭설과 송곳날처럼 내리꽂던 폭염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가늠할 수 없는 그늘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절실한 열망이 용광로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으니까. 가고 싶은 길이 있었으니까.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시간을 뒤돌려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하나 떠올려 눈 맞추어본다. 모든 순간순간 고통스러웠던 날까지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니 꼭 필요했던 나의 일부였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과의 인연이 한 장면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거기에 스며 있다. 나의 시간이 누구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아프지만 기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시간이 단단하기를.
그렇게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도 저만치 꽁무니를 빼고 있다. 지난 계절이 암담하고 아픈 구석도 많았지만 봄은 어김없이 오고 또 오듯이 내 성장통 또한 앞으로도 반복을 더해 갈 것이다. 아무리 그 그늘이 짙다고 해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막막하지만은 않다. 나는 꿋꿋이 삶의 봄을 찾고 또 찾는 끝없는 그리움으로 이 봄을 찬찬히 읽어 나가리라. 봄의 생동은 기다림에 바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