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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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했어요. 목련도 영산홍도 다 떨어지고, 아파트 담장에 장미가 많이 피었네요. 오늘은 아빠랑 모처럼 집 근처 일봉산 공원에 가기로 했어요. 진우는 그 공원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주 넓고 놀이기구도 많거든요.
한동안 아빠는 늘 바쁘다고 했어요. 휴일에도 일하러 나가거나, 누굴 만나러 갔습니다. 오늘은 엄마가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아빠랑만 나섰습니다.
아빠는 새도 잘 알고, 나무랑 풀도 잘 압니다. 진우가 궁금한 건 뭐든 알려줍니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 그렇다나 봐요.
길 건너 일봉산 공원 쪽으로 들어섰습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뭉실뭉실 퍼져 갑니다. 연둣빛 나뭇잎들이 어느새 아주 짙어졌어요. 일봉산 등산로 편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초록 잎을 뽐내고 있네요. 사람들도 아주 많이 나왔어요. 까치 두 마리가 일봉산 쪽으로 빠르게 날아갑니다. 뾰르 뾰르르 쪽쪽 쏘르르르르 작은 새들 지저귀는 소리도 들려오고요.
진우네 아파트는 일봉산이 가까워 그런지 새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한 추위라고 했어요. 너무 춥다고 엄마가 계속 밖에 못 나가게 한 적도 있었어요. 진우네 베란다 앞 대추나무엔 가을에 떨어지지 않은 마른 대추가 많이 달려 있었어요. 그런데 추위가 너무 계속되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었어요.
“아빠, 새들이 대추를 다 쪼아 먹었나 봐요.”
진우는 신기해서 말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두 개 마른 채로 남아 있었거든요.
“너무 추워 먹이가 없나 보다.”
그때부터 아빠는 오래된 땅콩이나 사과 속 같은 걸 잘라서 베란다 창가 화분대 위 그릇에 놓아줬어요. 가끔 묵은쌀도 한 움큼 놓아주고요. 아빠는 외국에 잠깐 갔을 때 얘기도 한 적이 있어요. 너무 추울 때, 빵이나 치즈 부스러기를 주려고 창문을 열면 먼 데서부터 새들이 날아왔다고 했어요.
겨우내 진우네 창가는 새들의 사랑방이 됐습니다. 먹이를 주려 베란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아왔지요. 까치, 산비둘기, 직박구리, 참새 그리고 이따금 산새도 왔어요. 새들은 먹이를 주려 아빠가 베란다 문 여는 소리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먹이 놓고 문을 닫으면 새들이 금방 날아듭니다. 그날 먹이에 따라 까치는 그냥 왔다 가는 날도 있어요. 큰 부리로 쪼아 먹기가 어려워 그런지도 몰라요.
까치가 물러나면 얼른 직박구리가 찾아옵니다. 찌르르륵 찌르찌르르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부부인지 꼭 두 마리가 와요. 한 마리는 대추나무에서 망을 보고, 다른 한 마리는 먹이를 재빨리 먹습니다. 그렇게 서로 교대를 하면서요. 안 오는 날도 있기는 합니다.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오는 새는 산비둘기 두 마리입니다. 걔네들은 먹이를 먹고도 아예 먹이 그릇 옆에서 꼼짝 안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자기 구역이라는 듯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킵니다. 참새들이 비켜 달라고 주위를 빙빙 돌아도 꼼짝 않습니다. 진우는 두 마리 산비둘기가 웃기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베란다 창으로 다가가도 빤히 진우 쪽을 바라보며 날아가지도 않았어요.
“아빠, 먹이 더 달라는 거 아니에요?”
“자기들도 우리 집 식구로 여기는가 보다. 피하지도 않는 걸 보면. 허허 우스운 녀석들이네.”
어느 날이었습니다. 산비둘기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진우는 앙상한 대추나무에 앉은 조그맣고 하얀 새들을 발견했어요. 한 번도 못 본 예쁜 새들이었어요.
“아빠, 저건 어떤 새예요?”
“오목눈이가 왔구나. 흰머리오목눈이.”
아빠도 무척 반가운 표정입니다. 눈송이 속에 검은 점이 찍힌 듯, 작고 예쁜 눈이 보였어요. 오목눈이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근데 산비둘기는 계속 그릇에 부리를 대고 비켜줄 생각이 없습니다.
“비둘기야, 이제 좀 비켜줘. 오목눈이도 좀 먹게.”
진우는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도 산비둘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에이, 욕심쟁이 산비둘기.”
진우가 창가로 다가가 툭툭 치니 그제야 흠칫 놀란 산비둘기는 멀리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그릇을 싹싹 비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오목눈이도 먹이가 없는 걸 알아챘는지 아니면 소리 때문인지 호르륵 날아가 버렸습니다.
“욕심 많은 산비둘기 땜에 오목눈이가 먹지도 못했잖아요.”
“하하, 할 수 없지 뭐. 다음에 또 오겠지.”
아빠가 괜찮다고 했지만 진우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귀여운 오목눈이들이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요. 찬찬히 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후루룩 날아가 버려 너무 아쉬웠어요. 그 후로 오목눈이는 한 번도 볼 수 없었어요. 산비둘기 두 마리는 꼭꼭 와서 진을 치고 먹이를 놓은 접시를 싹싹 비우는 청소부 노릇을 했습니다.
‘에이 심술쟁이.’
진우는 점점 더 산비둘기가 얄미워졌어요. 오목눈이를 그렇게 쫓아냈으니 말이지요. 거기다가 까치가 먹지 못하고 남긴 먹이를 전부 다 먹어치우는 것만 같았거든요.
오목눈이는 기다려도 끝내 안 나타났어요. 매일매일 진을 치고 오래 와 있는 산비둘기들을 진우는 점점 더 미워하게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베란다에 있다가 자세히 보니 산비둘기 날개가 좀 이상했습니다. 진갈색 둥근 무늬가 어디에 찍힌 듯이 패여 있었어요.
“아빠, 비둘기 털이 이상해요.”
아빠도 와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상처 입었나 보다. 동물한테 찍혔나?”
진우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친 줄도 모르고 그렇게 미워했나 싶었어요. 그래서 한참씩 앉아 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우는 다음날 산비둘기가 오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날이 좀 풀려 그런지 산비둘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빠도 이제는 날이 따뜻해졌으니까 새들 스스로 먹이를 찾을 거라고 했습니다.
공원엔 제법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운동하는 어른들도 많고요. 훌라후프 돌리는 형들도 있습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더 커져 있었어요. 아빠는 운동기구들 있는 데로 갔습니다. 진우는 놀이기구에 가서 그네도 타고 정글짐도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일봉산 등산로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직박구리들이 찌르르르 꺼억 꺽 소리를 내며 지나갔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입니다. 진우는 갑자기 겨울날이 떠올랐어요. ‘우리 집에 오던 그 직박구리 맞니?’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어요.
아빠는 여전히 기구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우는 나무들이 많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어요. 그때 아빠도 다가왔습니다.
“아빠, 아까 직박구리 봤어요. 우리 집 왔던 그 직박구리 맞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흐흐.”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아요.”
진우는 크게 소리쳤어요. 그때 작은 나무 옆 잔디밭에 산비둘기가 보였습니다. 먹이를 찾는지 구구거리며 천천히 왔다 갔다 합니다. 얼른 가까이 가 보았어요.
“앗, 그 산비둘기다.”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외치곤 얼른 입을 막았어요, 날아갈까 봐서. 아빠도 다가왔어요. 한쪽 깃털 위 적갈색 무늬가 패인 그 산비둘기가 틀림없었어요. 그래도 이제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 나은 것 같다.”
아빠도 기쁜 얼굴이었어요. 산비둘기 두 마리는 마치 안다는 듯 아빠와 진우 주변을 이리저리 맴돕니다. 가까이 가도 피하지도 않았어요.
“산비둘기야 미안해. 다친 걸 몰랐었어.”
구구거리며 신기하게 진우 신발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너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빠도 이상하다는 듯 웃습니다. 걷기 운동하는 사람들 여럿이 다가옵니다. 산비둘기들은 그제야 휙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조금 뒤 씩씩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일봉산 쪽으로 재빨리 날아갔습니다.
“진짜 다 나았나 봐요, 아빠.”
진우는 정말 기뻤어요. 겨울에 그렇게 미워한 걸 후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그래, 잘 됐지?”
구름이 다시 양 떼처럼 몽글거리며 퍼져 가기 시작했어요.
“아빠, 이번 겨울엔 과일 껍질도 잘 모아서 줘야겠어요.”
“이제 진우가 식당 주인이 되겠는걸.”
진우는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더 가벼웠습니다. 참새들 쏙닥거리는 소리도 즐겁게 들립니다. 다음 겨울엔 산비둘기도 오목눈이처럼 똑같이 예뻐해 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올겨울엔 내가 먹이를 더 잘 챙겨줘야지. 산비둘기야, 꼭 우리 베란다 식당에 놀러 와야 돼.’
멀리 구름 아래로도 새들이 지나가는 게 작게 보입니다. 진우는 건널목을 건너기 전에 산비둘기가 날아간 일봉산을 한 번 더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