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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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병풍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다가 우리 집에 남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가 결혼할 때 외갓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엄마는 원래 집에 있던 것보다는 외갓집에서 가져온 병풍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병풍은 황토색 누빔으로 된 싸개 안에서 엄마의 장롱 옆에 서 있었습니다. 자랑스럽게 서서 늘 편히 쉬었습니다.
그날은 할아버지 제사였습니다.
아빠가 베란다 구석에 세워진 여덟 폭 병풍을 꺼내 들고 거실에 들어왔습니다. 병풍의 귀퉁이가 너덜너덜 누렇게 낡아 보였습니다. 아빠는 그 병풍을 제사상이 놓일 뒤쪽에 세웁니다.
“아빠, 오늘은 새 병풍 한 번 구경해 봐요.”
아빠는 코를 찡긋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너희 엄마가 싫어하시잖니. 더러워진다고.”
딩동.
친척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고모가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고모, 어서 오세요.”
부엌에서 나물을 만들던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네요.”
엄마가 바쁘게 대답했습니다.
“곧 오시겠지요.”
엄마의 앞치마에서는 참기름 냄새가 새어 나왔습니다.
하루 종일 부엌에서 엄마는 할아버지 제사 음식 준비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전을 부치고 생선을 찜통에 찌고.
거실 의자에 앉은 고모의 눈빛이 병풍에 멎었습니다. 고모는 귀퉁이가 찢어져 떨어져 나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고모가 언짢게 한마디 했습니다.
“저 병풍을 너무 함부로 굴리시네요.”
“…….”
“곧 쓰레기 취급 받겠어요.”
고모의 지적에 아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여덟 폭 병풍을 펼쳤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아니 고조할아버지 적부터 내려온 병풍이었습니다. 은은한 먹물로 그린 모란과 꽃 옆에 써진 글씨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림과 글씨들은 마치 옛날 과거시험을 보러 간 선비들처럼 점잖게 느껴졌습니다.
고모가 나를 불렀습니다.
“동수야!”
“예.”
“저 병풍을 너라도 관리 잘 해야지.”
“예.”
“고모가 어렸을 적에 들었어. 병풍의 그림과 글씨를 쓰신 분이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분이셨대.”
“그렇군요.”
“앞으로 너는 제사 같은 것은 간단히. 뭐든지 간단하게 하렴.”
“그럴게요. 아마 로봇이 대신해서 지낼지도 모르지요.”
마침내 삼촌들과 막내 고모까지 도착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제사가 끝난 후 제사상 뒤에 서 있던 병풍은 다시 베란다 구석으로 갔습니다. 늦게 떠오른 가을 달이 허술한 병풍을 환히 비추었습니다.
이따금 나는 고모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병풍을 너라도 잘 관리해야지.’
갑자기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병풍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병풍에는 어떤 그림들이 들어 있을까?
어느 날 방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장롱 옆을 가리켰습니다.
“엄마, 저기 세워진 엄마 병풍 좀 펴 봐요.”
“왜?”
“한 번 구경해 보게요.”
“그럴까?”
나는 엄마의 병풍을 한 번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병풍의 크기나 그 속에 담긴 내용도 모릅니다. 다만 병풍에 들어 있는 그림이 엄마 친구가 그렸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엄마가 병풍을 가져와 덮개를 풀었습니다.
“아직도 새것 그대로지?”
“예. 베란다에 있는 병풍은 너무 헌 것인데.”
“그건 좀 더 쓰다가 앞으로 버릴 거야.”
엄마가 여덟 폭 병풍을 천천히 펼쳤습니다.
빨강,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이 진하게 튀었습니다.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거북, 사슴들이 각자의 얼굴로 병풍을 꾸몄습니다.
“동수야, 엄마 친구가 잘 그렸지?”
엄마가 친구 자랑을 했습니다.
“사슴들이 예쁘네요.”
“나는 붉은 해나 산이 좋아.”
엄마는 다시 병풍에 덮개를 씌운 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어요.
나는 물건을 사러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습니다. 엄마는 화장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필요한 기초 화장품을 구해 가지고 오다가 길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허연 머리칼에 긴 수염을 뽐낸 할아버지는 신선처럼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건물 담벼락 아래에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뿐 아니라 올망졸망한 옛날 물건들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나이 든 낯선 아저씨가 붓글씨와 그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들은 얼마나 받을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전혀 살 가치가 없습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물었습니다.
“동수야, 우리 베란다 구석에 세워진 병풍도 저 할아버지한테 가지고 가볼까?”
“팔게요?”
“응, 할아버지가 원하면.”
“아빠한테 알리지도 않고요?”
“뭐 어쩌겠냐? 다 낡았는데 뭘.”
나도 베란다 구석에 세워진 우리 집 병풍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엄마와 나는 집에 들러 병풍을 들고 나왔습니다. 병풍의 무게는 내가 혼자 들고 가도 될 만큼 가벼웠습니다.
할아버지 앞에 다가간 내가 병풍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이 병풍은 어때요?”
“…….”
할아버지는 잠자코 병풍을 펼쳤습니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안경까지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이걸 팔려고?”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예,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쯧쯧쯧. 이 귀한 보물이 이런 꼴을 하고 있다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혀를 찼습니다. 할아버지는 병풍을 엄마에게 다시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꾸중하듯 말했습니다.
“그냥 내가 모르는 척 사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비싸고 귀한 그림이오. 다시 가지고 가서 귀퉁이도 깁고, 수선해서 잘 보관하시오.”
그 말을 들은 엄마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부로 베란다에 세워졌던 병풍은 새로운 단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와 엄마의 병풍과 나란히 서서 귀한 대접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