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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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루아가 이 세상에 오면서 나에게 할머니 자격증을 안겨 주었다. 운전면허증, 교사자격증, 다문화지도자격증 등 많은 자격증이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 할머니 자격증이 가장 자랑스럽다.
예전에 나의 큰아들이 첫 선물로 왔을 때 내 부모님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셨다. 이북에서 홀로 월남해 분신 같은 딸을 첫 선물로 받았는데 그 딸이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 그땐 나도 그 기쁨을 잘 몰랐다. 첫 손녀로부터 할머니 자격증을 받고 나서야 부모님 마음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들만 둘이라 딸 있는 집을 늘 부러워했다. 어떤 이는 며느리를 딸이라 여기라지만 며느리와 딸이 어찌 같겠는가! 내가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면 며느리도 나를 친정엄마처럼 대해 주기를 바라는 보상 심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며느리는 ‘내가 못다 키운 아들하고 같이 살아주는 고마운 짝’으로 생각하려니 끝내 나에겐 딸이 있을 수 없다. 딸이 없어 허전했던 마음에 몇 천 배 더 큰 기쁨으로 손녀가 왔다. 할머니 자격증도 저절로 왔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딸과 손녀는 차원이 다르다. 내 딸이 비단이라면 손녀는 비단 위에 얹힌 꽃이 아닐까? 그냥 사랑이고 기쁨이다. 손녀가 까르르 웃으면 정신이 아뜩해진다. 뭘 해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울거나 웃는 일만 하던 손녀가 옹알옹알하더니 어느 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시(詩)였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함머니, 꽃이 어브브브 투어요”, 열대어가 어항 수풀에 숨으면 “무꼬기가 부끄더어요”, 어설픈 발음이 더 아름다운 시가 된다.
두 돌이 지난 어느 날 그 손녀가 언니가 되었다. 며느리가 조리원에 있는 두 달 동안 큰손녀와 지내게 되었다. 큰손녀를 품에 안은 나는 옛날이야기부터 이 세상 모든 이야기와 동요에 이르기까지 24시간 작동되는 기쁨조 할머니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평소에 동화구연가 활동을 해오면서 복지관이나 SOS마을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지만 손녀와 지낸 그 시간이야말로 내 생애 가장 진실한 봉사활동의 시간이었다.
“함머니, 호당이 이야기 또 해도요.”
자기가 호랑이 띠인 걸 알지도 못하는 손녀는 호랑이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다. 호랑이 이야기가 바닥이 나면 다시 꼬부랑 할머니 목소리로 바꾸어서 해주곤 했다. 그러면 또 깔깔깔 웃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기뻐했다. 유아교육학과 실습 과정도 이보다 더 실감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모든 지력과 능력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찹쌀궁합으로 잘 지내던 어느 날 심각한 소통의 문제가 생겼다. “나바께!”를 계속 외쳐대는 손녀에게 “지금 깜깜해서 밖에 못 나가” 하고 달랬다. 손녀는 “아니! 나바께!”를 계속 외쳐댔다.
“할머니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어떡하지?”
나는 쩔쩔맸다. 그러자 손녀는 방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더니 자기 베개를 들고 나왔다. 베개에 누워서 잠자리 동화(Bedtime Story)를 들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또 호랑이 이야기를 해달란다. 지금도 “나바께”라고 하며 둘이 부둥켜안고 배꼽 빠지게 웃는다.
이제 그 손녀 키가 내 키까지 바짝 따라왔다. 내가 소중하게 신는 이태리제 부츠도 손녀 발에 딱 맞다. 수제 폰 가방, 예쁜 꽃을 수놓은 머리핀 등 귀하고 비싼 것일수록 손녀에게 주고 싶다.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노래는 나를 보며 지었을 것 같다.
손주 사랑은 짝사랑이라 하지만 짝사랑이 진짜 사랑 아닌가. 언젠가는 이 예쁜 손녀도 제 짝을 찾아 떠날 테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어느 날 외국에서 사 온 기념품을 보고 “와, 예쁘다!” 하며 감탄하기에 “이거 나중에 다 너 줄 거야” 했다. 손녀는 천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값의 수천 배를 받았다.
하루는 주말에 집에 오고 싶다 해서 마중을 나갔다. 캐리어를 들고 나타난 꼬마 숙녀에게 나는 홀랑 반해 버렸다. 동화책 주인공 표지 인물 같이 예뻤다. 지하철역에서 엄마와 손을 흔들며 약간 주저하더니 금방 재잘거리며 신나게 걸어 나왔다.
빗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손녀와 비옷을 입고 곧장 아파트 숲속 둘레길로 향했다. 아카시아꽃이 반기고 작은 새들도 빠른 날갯짓으로 고운 노래를 불렀다. 손녀와 함께 듣는 노래는 다른 날의 노래가 아니었다. 바들바들 떨며 징검다리를 함께 건널 때는 더할 수 없이 뜨거운 감정이 솟았다. 말만 통해도 신통하던 손녀가 이제는 내 말에 “맞아요! 지금 딱 그 느낌이에요” 이 같은 성숙함도 보여준다. 나의 팬 중 손녀 팬이 누구보다 좋다.
하늘이 보내준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은 생각할 것도 없이 손주라는 선물이다. 훗날 이 둘레길에서 손녀가 내 손을 이끌고 가는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천국 가는 날도 가장 슬픈 눈물로 나를 배웅해 줄 것이다. 천국 고운 숲길을 함께 걷자고 미리 약속해 두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인 ‘할머니 자격증’을 보여 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