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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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지붕의 언덕 위 하얀 집들이 보이는 마을 어귀에 택시는 멈추었다. 담양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여기가 맞나요? 재차 확인하면서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건널목 큰 안내판에 숙소 이름들이 적혀 있다. 담양프로방스팬션, 메종드프로방스, 생폴드방스팬션 등 열 개쯤 나열된 상호들이 프랑스 휴양지에 온 듯하다. 폰의 앱에서 ‘메타세콰이어 길 인근’을 찾아 예약해 둔 ‘S호텔’은 안내판 아래 칸에 적혀 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을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온 우리에게 총총 들어앉은 유럽풍의 집들이 이국적이다.
빨강 창틀 옆에 그려진 소년 캐릭터 간판이 손짓한다. 커피숍이 호텔 라운지를 겸하고 있다. 터미널에서 위치를 묻는 내 전화를 받은 듯한 남자가 반기며 체크인을 한다. 안내인을 따라 샛문으로 나가니 넓은 정원이다.
초가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나뭇잎마다 금빛으로 흐르고 있다. 마당은 야외 미술관처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배가 불쑥 나온 신사가 돌기둥 꼭대기에 서 있는 여섯 개의 작품이 어디서 본 듯하다. 아, 남프랑스 여행 때 마세나 광장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람이 공중에 매달린 형상이라 신기했는데 그 축소판을 옮겨 놓은 듯하다. 돌의자에는 에나멜로 된 자매 모형의 두 소녀가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 마을이 특화된 ‘담양의 프로방스 마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엘리베이터 없이 외부로 난 철계단을 오르면서 심심찮게 꾸며진 뜰의 풍경을 감상한다.
우리가 예약한 4인용 객실은 3층이다. 부드러운 갈색 톤의 꽤 넓은 거실이 차분한 분위기이다. 두 개의 더블 침대는 간이벽을 사이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선택한 객실이 기대 이상이라 만족스럽다. 각자 짐을 풀어 자기 공간을 확보한다.
오십여 년 지기인 우리는 남편의 고교 동기 부인들이다. 결혼을 통해 자연스레 맺어진 우정은 같은 도시에서 함께 늙어온 공통점이 있다. 아이들 이름인 누구 엄마로 호칭하다가 쉰 살 이후로 서로의 본명을 찾아 이름을 불러 주고 있다.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오며 때때로 우리만의 여행길에 오른다. 남이섬, 태백, 하회마을, 대구, 여수, 통영 등이 기억에 남는 곳이다.
이번 여행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팔순을 맞이하는 영희 형을 축하하기 위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나선 것이다. 당사자는 ‘팔순 축하’란 말에 펄쩍 뛴다. ‘팔순’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서늘하고 우울하다”라는 것이다. 그렇기도 할 것 같았다. 이후 그녀의 팔순을 ‘46년생 생일’로 수정했다.
해가 지기 전에 주위를 산책하기로 했다. 여행의 묘미는 해가 질 무렵과 해가 뜰 무렵의 정서를 누리는 것이다. 모임의 행동책을 맡고 있는 나는 당일치기 여행을 사양한다. 밤을 공유하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사색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주어져야 여행하는 맛이 난다. 우리는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 왔다.
거실 테이블에 생일상이 차려졌다. 케이크에 꽂은 여덟 개 촛불이 어둠을 밝힌다. 손뼉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한다. 선물한 빨강 니트 가디건을 걸친 46년생은 새댁처럼 홍조 띤 얼굴로 수줍게 웃는다. 강원도 태생인 그녀는 감자바위 같은 기질로 굳건하면서 온유한 성품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는 참지 못하는 용기도 있다. 서로의 삶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보며 살아온지라 우리는 그녀의 산증인이다. 생일파티는 조촐하지만 멋지게 진행되었다. 많이 웃고 담소하는 사이 밤은 깊어 간다.
이불 한 채를 더 주문하여 의자를 밀치고 바닥에 내 자리를 깔았다. 커튼을 살짝 밀치니 푸른 어둠에 달빛이 교교히 흐른다. 여행지의 밤하늘이 아름답다.
이른 아침,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로 산책에 나선다. 인적은 드물고 가게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브런치 카페 건물 회갈색 벽을 돌아서니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연못가에는 노란 부리의 중대백로가 먹이를 찾고 있다. 마을 파수꾼인 왜가리도 유유히 사방을 둘러본다. 물그림자가 얼렁거리는 습지에는 쇠오리 떼가 날개 치며 우루루 비상한다. 하루의 삶이 시작되는 아침 풍경은 활기차고 진지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울창한 가로수 길을 걷는다. 나무 향기와 청량한 바람이 오감을 깨운다. 흙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뇌를 자극한다. 세상 시름을 잠시 잊은 우리는 벤치에 앉아 아침의 고요함을 누린다.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며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서로에게 저장된 옛 기억이 지난날들을 소환한다. 문득,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사잇길에 ‘담양 메타세콰이아 랜드’ 예쁜 초록 표지판이 있다. 뭔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길손이, 아직 개장 시간 전이라 무료 입장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뜻밖의 볼거리에 좋아서 총총 안으로 들어선다. 두 개의 풍차에 벌써 마음이 동하여 잰걸음으로 걷는다. 야외 전시관, 생태기념관 등 팻말이 방향을 가리키지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 촉박하여 그곳으로 갈 수가 없다. 보여지는 것만 보기로 한다.
수문장처럼 여섯 개의 장승들이 잔디밭에 서 있다. 뻐덩니를 드러내고 혀를 길게 내민 형형색색의 얼굴들이 재미있다. 토속적인 형태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둔다. 해가 중천에 솟았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메타세콰이어 숲이 있는 마을, 하룻밤을 머물렀을 뿐인데 몇 날을 있는 듯 이곳 풍경이 정겹다.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선다. 숲에서 스며든 초록 향기가 은은하고 싱그럽다.
봄이 오면,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는 그 숲으로 다시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