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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을’인가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정-옥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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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들 대부분 일상이 핸드폰이라는 작은 화면 속에 들어와 있다. 그 안에서 서로 안부를 건네고 뉴스를 읽고 마음을 메모한다. 사고파는 일도 한 뼘의 화면 속에서 마무리한다. 핸드폰이 잠시 안 보이면 어미 잃은 새끼같이 불안해지니, 가끔은 조그만 방 속에 갇혀 사는 새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제는 ‘핸드폰으로 사용할 수 있는 7가지 AI 기능’에 관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핸드폰에 있는 은행 앱에서 다른 사람에게 송금하려고 할 때, 상대의 계좌번호를 한 번에 외우는 일이 차츰 쉽지 않다. 지난 세월만큼 숫자가 멀어져 갔나. 대충 외운 숫자는 금세 흐릿해져서, 앞 화면으로 돌아가 다시 짚어본다. 그러다 결국에는 번호를 따로 종이에 적어 두고, 한 자리씩 읽으며 송금하곤 했다.
AI를 이용한 영상에서는 원하는 번호를 지정하면, 다른 화면으로 바뀌어도 그 번호가 상단에 계속 떠 있어서, 보고 그대로 옮기는 일이 한 번에 이어진다. 떠 있는 숫자가 화면 위에서 나와 눈을 맞춘다.
나를 사로잡은 또 다른 기능 하나. 긴 문장 속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 표시하면 어디든 원하는 자리에 옮겨 놓을 수 있단다. 글을 쓸 때 생각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죽기 전까지 배움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바람이 밀치듯 전화 버튼을 눌렀다. 아침마다 멋진 영상을 한 개씩 보내주는 친구에게, 내가 방금 알게 된 소식을 급하게 전하고 싶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너 돈 송금할 때 계좌번호를 어떻게 외우지?”
“응, 종이에 써서 하나씩 보면서 보내.”
“내가 마법의 방법을 찾았어. 자, 종이에 받아 적어. 네 핸드폰의 톱니바퀴 모양 설정을 눌러, 그리고 디스플레이를 찾아∼.”
흥분이 넘치는 설명에 그녀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멈칫거렸다. 다음에 아들이 오면 물어보겠다고. 나는 영상을 보내고 그녀의 옷자락을 다시 잡았다.
“네 아들, 언제 집에 오지?”
“열흘 있다가 집에 행사가 있어서 올 거야.”
“아이고 열흘이나? 알았어. 내가 이번 주말에 내려갈게.”
조급함을 누르고 큰 숨을 쉬었다.
‘배우는 놈이 달려와야 할 판에, 가르쳐 주는 놈이 200리 먼 길을 먼저 달려가겠다니, 에구, 이놈의 오지랖은.’
사랑하는 관계도 갑과 을이 있다. 친구라고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더 사랑하는 쪽이 감정적으로 열세 상태가 되어 을이 될 수밖에 없다면, 오늘은 숫자에 취해 을이 되어야겠다.
사랑이나 우정 속의 갑과 을과는 상관없이, 세상의 인간관계는 예상했던 것보다 시린 듯하다. 어쩔 수 없이 갑과 을로 갈라지는 관계도 이 세상에는 흔하다. 살아남기 위해 갑과 을로 나뉘고, 을이 갑의 지배를 감내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분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갑의 역할이 계단처럼 이어진다. 청문회를 하는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은 장관에게 묻고 따지면서 권력을 확인하고, 장관은 돌아가서 국장에게 차례차례 파도를 탄다. 때론 놀라울 정도로 험한 고성이 들린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낮은 소리로 예리하게 질문할 때 그 사람의 인격이 돋보이는 건 상식인데.
예술 분야는 다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영화계에서 이름이 잘 알려진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더 나은 배역을 얻기 위해 제작자와 감독의 눈치를 살핀다. 엑스트라 배우는 작은 배역이라도 얻기 위해 소위 갑의 주변을 마음 졸이며 서성이지는 않는지. 문학계는 어떨까? 글쎄 텃세 같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좋은 작품이라는 것조차 결국은 주관적 영역일 텐데, 선택하는 자와 선택받는 자의 간극이 전혀 없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비이성적이리라.
보통 인간은 갑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 속에 살아간다. 그 관계는 사라지지 않고 그저 자리만 바뀔 뿐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사람들은 더 강한 갑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돈을 벌고 성공을 찾아 떠난다. 가치 있는 삶이 그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푯대였다면 이 사회는 더 맑아졌으리라.
어찌하든 우리 사회가 말하는 성공과 도덕이 누군가의 갑질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자아가 선선히 사라지면 좋겠다. 그러다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을이 스스로 지레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중의 가치 기준이 다른 것일까.’
그런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으면 무지나 오만의 경계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 인(人)’ 자는 서로 두 사람이 등을 대고 사는 모습을 닮았다. 그와 나는 서로 짐을 지듯이 기대고 있다. 내가 등을 맞대고 있는 자리를 비키면 그가 쓰러지겠지만, 결국 나 또한 쓰러지고 말 것이다. 맨발의 전도자 선다 싱(Sundar Singh)의 말처럼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 없을 때가 가장 위험할 순간이라면,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이 내가 힘들어도 버텨야 할 이유가 되리라.
한평생 등을 대고 사는 남편이, 허리를 짚으며 저녁 준비를 하는 아내에게 갑작스레 고성을 섞어 훈수를 둔다.
“여보, 상추 씻는데 물을 그렇게 세게 틀지? 우린 물 부족 국가라고!”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슴슴한 일상을 원하는 나에겐 옹이가 박힌 말투가 영 반갑지 않다.
‘저 양반이 주방에서도 호령이라니…, 존중이란 단어를 또 잊었구먼.’ 
나이가 들면서 얼굴 따라 마음에도 주름이 생기나 보다. 별일 아닌 듯 그냥 넘길까 하다가 마른 수건에 손을 천천히 닦고, 남편 고향 사투리로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말솜씨가 청문회 같구만요. 혹시 앞치마 찾습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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