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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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통상 수필이라고 일컫는 미셀러니는 일반적으로 글쓴이 개인의 신변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적은 사념의 글이다. 이를테면 일기나 편지, 문장으로 된 시가나 산문, 논문집에 수록된 여러 글의 평가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미셀러니가 이렇게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건 분명하지만, 생활의 패턴이나 생각의 범주가 한 사람이 살면서 특별한 변고를 겪지 않는 한 경험하고 생각하는 시간적, 공간적, 체험적인 한계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미셀러니는 독자에게 주는 감동의 영역이 글쓴이의 생활 일부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 한계가 제한적이어서 필자 자신에게는 처음 접해 보는 자신의 글이겠지만, 읽는 독자는 이미 각양각색의 필자에 의해 같은 주제 다른 작가들의 글을 쉽게 접한 경험에 익숙하다.
미셀러니의 영역이 이렇게 생활 주변에 머물러 있다 보니 천의 필자가 주는 경험적인 생각과 만의 독자가 받아들이는 동일한 주제의 상이점이 많지가 않다. 이 말은 특별한 주제가 아닌 한 독자가 생활 속에 있는 동일한 주제의 비슷한 감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필자가 그 주제를 놓지 못하고 글을 쓰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 필자에게는 본인의 글이 절대적 진실성, 현실성을 요구하는 자신만의 참신한 글이기 때문에 새로운 안목으로 주제를 바꿀 수가 없어서다.
수필의 필자나 독자는 글을 쓰거나 읽을 때 살아온 여정의 한계성 때문에 비슷한 주제에 늘 부딪치게 된다. 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에세이다. 에세이의 범위는 미셀러니의 생활 범주에서 멀리 벗어난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자유로운 생각도 수용하는 폭넓은 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미셀러니에서 에세이로 글의 방향을 바꾸면 생각의 영역이 생활의 범위를 벗어나 생활과 문화, 철학과 역사, 교육과 문학의 장에서도 얼마든지 사고의 영역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에세이는 독자에게 던지는 생각의 선물이라는 대전제가 주어진다. 이 말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광범위한 산문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신변잡사의 정서적이고 비논리적인 미셀러니를 주제 확장시킴으로써 생각을 확산시켜 에세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생활 주변의 주제를 필자의 색다름과 낯설음으로 더 깊게, 폭넓게, 펼쳐 놓을 수가 있다. 에세이는 진실되면서 긍정적 논지가 전개되어야 하고, 그것을 읽는 독자의 사고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양하게 생각을 할 수 있는 품넓은 여유를 주는 것이 절대적 필수 요건이다.
에세이는 글의 소재와 논제를 확장시키면서 생각에 논점을 가지는 주제의 글이면 훌륭한 글감이 될 수 있다. 에세이의 영역을 무제한으로 확장시키면 생각의 색다름을 필자와 독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장으로 바꿀 수 있다. 의견을 개진한 논의나 쓰여진 글에 대한 평론, 글의 양식에 관한 이론, 각종 영상물, AI(인공지능)도 필자의 생각을 서술하면 에세이로 전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신문, 잡지, 방송 등 주변에서 많이 읽혀지는 문화 영역들도 필자의 생각을 포함시키면 얼마든지 에세이의 영역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 따라서 필자와 독자는 글을 보면서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범수필을 접하게 된다. 이것이 생각하는 에세이를 창조한다.
필자에게서 떠난 글은 이미 독자의 글이다. 필자가 자신의 글을 지상에 공개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던져 주는 것이다. 그 글 속에 있는 표현의 보물은 필자가 독자에게 주는 글의 향기와 글 속에 숨어 있는 감동의 여운과 삶의 철학적 맥락이다. 그러므로 그 글은 필자와 독자 서로의 철학적 관점일 수도 있고, 미적 추구일 수도 있으며, 도덕적 공감대일 수도 있다. 이렇게 에세이는 필자의 숨겨 놓은 생각을 독자가 찾으므로 해서 상호 교감이 이루어진다.
에세이 서술의 중요한 포인트는 글을 전개함에 있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백해야 한다. 양념이 과하면 맛있는 요리가 되지 않듯이 과한 장식, 치렁거리는 수식어, 장식적인 미문은 수필 본연의 본성을 잃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순수한 생각을 맛보기가 어렵다. 문장에서 뜻하는 바를 독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형용사나 부사, 관형사 등은 그 명확성으로 인해 독자의 생각할 여지가 오히려 줄어드는 특성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독자는 글을 읽는 묘미를 덜 느낄 우려가 있다. 글에서 미완의 여운을 두는 것은 필자의 미숙함이 아니라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수필에서만 볼 수 있는 상상력과 글의 재미를 위한 필자의 배려이다.
독자가 글을 읽고 받은 선물은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감동의 여운일 수도 있고, 글의 향기일 수도 있다. 필자는 글 속의 낯설음에서 오는 색다름이 머리끝의 감동으로 와서 가슴에 닿은 뒤 긍정의 전율로 되돌아오게 한다. 그것은 에세이가 자신의 신변을 독자에게 알리는 여러 장르로 파생되면서 문학의 격을 제고하는 자양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글 내면의 정감을 독자가 끄집어내어 상상을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에세이는 미완의 여운이 필요한 글이다. 여기에는 글 속에 생각이 필요한 여운의 울림, 색다름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생각의 선물을 독자가 받음으로써 에세이는 종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에세이가 품고 있는 생각의 범위가 깊고 넓어질수록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다른 사람의 사고나 인지 과정, 삶의 우주적인 가치가 독자와 필자의 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에세이는 삶의 진실함을 밝혀 주는 감동이 밑거름이 되어 필자의 어떤 생각이든 수용할 수 있는 전천후 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