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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정녕 살아 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중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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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향해 가는 비포장 도로! 그 길은 옛날 내 어렸을 적 다니던 신작로길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면서 지나가는 소 달구지와 그것을 모는 조선족을 눈여겨봅니다. 나는 나와 내 아버지가 달구지를 타고 바로 저 모습인 채로 이곳 연길 시골길을 오갔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간도로 떠나신 아버지를 찾아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이곳에 왔겠지요.
이렇게 시작된 생각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나를 끝없는 상념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연변이라 해도 좋고 중국이라 해도 좋고 간도라 해도 좋을 곳! 아니, 민족의 한숨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차라리 우리 땅이라고 해야 좋을 곳. 누구 하나 맞이하는 사람 없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이조차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배를 채우며 아리랑을 부르던 곳, 누가 이 땅에 조선족을 심었으며 한숨을 불어넣어 주었는가!
별안간 아버지와 증조부가 다투는 모습이 환영으로 다가옵니다.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학교 가려고 삽작문을 막 나서는 순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던 증조부한테 들켰습니다. 나에게는 증조부님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조부님이셨지요. 학교 가는 것을 눈치챈 증조부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니 지금 어디 가노? 왜놈 될래?”
이 한마디로 아버지의 옆구리에 채워져 있던 책보는 통째로 아궁이에 집어 던져지고 그 길로 아버지는 만주로 내뺐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으며 풀길 없는 한을 가슴에 품고 이 간도 땅에 왔기에 아직도 곳곳에 그들의 한숨이 살아 숨 쉬는가? 일제(日帝) 주구(走狗)들의 꼬임에 빠져 왔건, 등을 떠밀려 왔건, 아버지처럼 살길을 찾아 도망을 왔건, 간도 땅에 와서 봇짐을 풀고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들의 유민(遺民)이었습니다. 독립군에 대한 뒷바라지는 모두 이곳에 사는 동포들의 몫이었습니다. 은신처는 따로 없었지요. 인근 들판에 심어 놓은 수수밭 모두가 숨을 곳이었으니까요.
해방되기 1년 전, 나는 아버지 손끝에 매달려 발 디딜 틈도 없이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기차역 대합실에서 어머니에게 건네어진 뒤 나는 만주에서 경북 문경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되돌아왔습니다. 영영 조선족이 되고야 마는가 하고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아버지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셨고, 그때부터 나는 조선족이 아니라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중국 내의 소수 민족인 조선족. 조선족으로 남아 있을 뻔했다는 생각을 끝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깨어나게 된 것은 백두산을 오르는 승용차의 아슬아슬한 곡예 때문이었습니다. 긴장된 순간들을 헤치고 백두산정에 하차하는 순간 내 몸은 알 수 없는 자력에 끌리는 듯 휘청거리면서 공중에 뜨는 듯하였습니다.
세찬 바람은 어느새 내 머리에 얹어졌던 모자를 날려 보냈고 앞서 걸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은 벌써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녹두알만큼이나 큰 모래알들이 수도 없이 내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천지를 향해 걸으려 해도 걸음이 제대로 걸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몸은 계속 바람 타고 떠밀려 가는 듯했습니다.
산에 오르기 전, 평지에서는 그렇게 맑게 보였던 하늘이었는데 산 정상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침착하게 천지를 향해 발길을 옮겼습니다.
천지 가까이 갔습니다. 천지는 온통 구름에 가려 보이질 않고 바람만이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어댔습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 먹고 발앞에 솟아 있는 작은 바위 하나를 붙들고 앉아서 천지 쪽을 향해 목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아,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일시에 구름이 걷히고 천지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천길 낭떠러지 밑에 옥색보다도 더 진한 색깔의 천지가 한꺼번에 그리고 선명하게 그 알몸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저 멀리 조선 땅으로부터 시작된 검푸른 물이 중국 쪽으로 오면서 색깔은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진한 남색에서 연두색으로 코발트색으로! 언제인가 하늘에서 내려다본 카리브해의 신비스러운 색깔의 물을 이 천지에서 다시 보는 듯했습니다.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빨려 들어갈 듯한 유혹을 잠시 느끼는 순간 천지는 다시 저 아래 물 위에서 안개를 피워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지가 가쁜 숨을 내뿜는 듯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을 뿜어내는 듯도 하였습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한을 마치 알아 달라는 듯이 한바탕의 춤사위를 하고 저 멀리 구름과 함께 뒤엉켜 사라져 갔습니다.
용솟음친 안개는 구름과 함께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하더니 이제는 천지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망스러운 생각으로 몸을 추슬러 꼭 붙잡고 있던 바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아! 그게 아니었습니다. 천지는 다시 새롭게 단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구름과 안개 사이로 강렬하게 내려꽂히는 태양빛 사이로 온 전신의 알몸을 또다시 드러내 보이는 천지는 이제 천지(天池)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신령스러운 영지(靈池)로서 내 몸에 와 닿았습니다.
바람과 구름과 비와 안개가 천길 낭떠러지 위로 솟아오르려는 용틀임이 아득한 천지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천지는 우리 민족의 영지입니다. 그 속에는 민족의 한숨이 바람과 함께 남아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한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비구름과 함께 역사의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민족의 장엄한 웅지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 백두산, 백두산은 정녕 살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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