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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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 하나가 가을을 알리고 서쪽 하늘로 저녁놀이 곱게 물들면 나는 가끔씩 눈물을 흘린다. 정서가 그렇듯 일출보다 일몰에 더 마음이 움직인다.
해가 지면 3병동은 소란스러워진다. 알츠하이머 치매로 인한 섬망 증상으로 평소엔 조용한 환자가 해 저물녘이면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일으킨다. 옆 환우들의 항의와 불만으로 환자는 밤마다 격리되고 있다. 빈 병실에 홀로 두고 나오며 마음은 늘 짠하다.
토요일 오후 큰딸이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주치의는 환자의 여명(餘命)에 대하여 면담을 했다. 어려운 살림에 해외 유학까지 보내며 키웠지만 바쁜 자식들은 어머니를 자주 찾지 못하고 있다.
세 딸들이 의기투합하여 어머니를 직접 간병하겠다고 나섰다. 1인실로 모셨다. 병실을 옮긴 첫날 환자는 큰딸 곁에서 아이처럼 잘 주무셨다. 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섬망도 사라지는 등 딸조차 못 알아보던 중증 알츠하이머 치매인데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딸들이 어머니 간병에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진정 아름답다는 말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가족끼리 마주 앉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보고팠던 지인들을 불러 작별을 하였다. 두 달 후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환자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사랑의 향기가 언제까지 병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말기 간경화 환자의 특징은 복수다. 배가 막달의 임산부처럼 보였다. 숨소리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곤 했다. 환자는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해 이순도 되기 전에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 부인조차 곁을 떠났는데 착해 보이는 얼굴의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쯤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들이 다녀가면 제약회사의 음료수 박스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환자는 아들이 찾아와도 표정을 풀지 못하는, 아예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자목련이 흐드러지고 복숭아꽃이 화사한 봄을 이루고 있다. 환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음료수 병을 손에 들고 있다. ‘꽃향기는 맘껏 드셔도, 음료는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주의를 드렸다. 복수가 발생하면 물조차 기록하며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라운딩 중에 환자의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살짝 풍겼다. 병원에선 흔한 내음이라 무심히 지나쳤다.
이튿날 오후, 잠들어 있는 창백한 환자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인기척에 눈을 뜬 환자가 크게 놀란다. 돌아서려다 문득 머리맡에 있는 음료수 병을 집어 들었다. 아뿔싸! 그것은 술이었다. 노루 꼬리만큼 남은 아버지 생에 아들은 박○○ 병에 소주를 담아와 마시게 한 것이다. 환자는 약을 먹듯 매일 술을 마셨다고 고백했다.
정년퇴직을 한 여동생과 아름다운 노을을 만나러 신화와 유적의 나라 그리스로 출발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을 실감한다. 에게해에 발을 담근 이튿날 카페리호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지는 해가 아름다운 산토리니섬, 코발트색 지붕과 새하얀 건물들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섬이다. 해 저물녘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난히 붉은 저녁놀이 하늘을 물들이고 유럽 영화의 주인공을 닮은 잘생긴 조르바들과 어울렸다. 곱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며 소원도 빌었다. 달처럼 둥근 해가 에게해 서쪽 바다로 서서히 기울고 모두의 시선이 지는 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붉은 해가 지평선 위에 맞닿아 천천히 수몰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울던 다홍빛 해가 그만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탄식 같은 비명 소리가 바다 위로 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불타고 사그라지는 황혼이 얼마만큼 처절한가?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도 저렇듯이 허무하게 가겠지. 먼 나라에 와서 짙은 우울이 에게해의 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것은 저녁놀처럼 찾아온다. 생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이야기하랴.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없다. 그것은 소란스럽지 않게 묵묵히 다가온다. 많은 죽음을 통해 내가 본 것은 삶이었다.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또 죽음은 무엇인가? 임상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내며 그것은 고해고 화두였다.
혼자 떠나는 길이다. 누구도 함께하지 못한다. 또 죽음은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늘 마주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흔히 죽음은 생의 끝이라 말하지만 늘 삶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다. ‘생기사귀(生寄死歸)’, 삶은 잠시 머무르는 것. 죽음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의 유한함과 죽음을 뒤돌아본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내게 다가오면 내 차례구나 생각하며 여행을 가듯 떠나야 한다. 성찰하며 본집을 향해 당당히 떠나야 한다. 인생 노을에 서서 삶의 옷을 벗고 바람 속의 삶이요. 햇볕에 녹아듦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