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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歸鄕)

한국문인협회 로고 현종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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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우리가 젊은 날에 좋아했던 ‘유로 댄스(Euro-dance)’를 크게 틀어놓고 차를 몰아가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하는 나들이였다. 달리다 보면 멈추고, 달리는구나 싶으면 또 서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겹도록 이어지던 연휴 차량 행렬에서 드디어 벗어나는가 싶었다. 한적해진 차도 옆 저쪽 들판 끝에서 기차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가며 극도로 긴장하였던 탓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꾸역꾸역 샛길로 접어들었다. 햇살이 싱그럽게 흩뿌려진 기찻길을 따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선 길을 가는 동안 철모르고 어울리던 어린 시절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길가에 수줍게 피어난 동백꽃 향기 아직 은은하고 햇살 가득한 황 부자네 고가(古家)를 지나갈 땐 매화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잊었던 내 고향의 냄새였다. 친숙하고, 한없이 정겹고, 역함이 전혀 없는 내 고향의 익숙한 냄새. 도회의 잡음에 갇혀서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내 고향의 그윽한 향기.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온 앙금마저도 꽃향기에 녹아서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갑자기 뛰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시골길의 간드러진 풍류에 취해 웃음을 한가득 입에 물고 좀 더 가다 보니 시나브로 고향 마을이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다시 콩닥거렸다. 눈앞에 쫙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이 문자의 형용을 거부할 만큼 몽환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아빠가 살던 꽃동네다, 서아야. 지아도 그만 자고 일어나. 아빠 고향이야.”
아내가 뒷자리에 앉아서 시종 꾸벅꾸벅 졸고 있는 둘째 지아를 흔들어 깨웠다. 잔잔한 호수가 운무에 휩싸인 청산을 끼고 아득히 돌아나간 풍광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자락 계곡 옆에 바둑돌처럼 옹기종기 모여든 기와집들과 동떨어져 기찻길 옆에 통나무로 검소하게 지은 집이 곧 나의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벌써 나와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어서 오거라. 굳이 안 와도 되는데, 뭘 또 이렇게 찾아와. 멀리서 오느라고 힘들었지. 어서 들어가자.”
아내가 막내를 품에 안고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동안 안녕히 지내셨어요, 어머니?” 
“잘 지냈지, 그럼. 우리 애들은?”
엄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아이들부터 먼저 찾았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서 세월이 얼핏 느껴졌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힘들긴요.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났지 뭐예요. 좋은 경치 실컷 구경하고, 맑은 공기만 잔뜩 마시면서 왔다니까요.”
“그래. 잘 왔다. 애들 많이 배고프겠다. 어서 들어가자.”

 

엄마의 손맛이 더해진 돼지김치찌개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밥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뚝딱 비우고 나서 한 공기를 냉큼 더 퍼오더니 아내는 구수한 맛 일품인 냉이된장국이며 콩자반이며 취나물무침까지 맛없는 음식이 도대체 하나도 없다며 엄마를 잔뜩 치켜세웠다. 흡족한 웃음을 엄마는 연방 지었다. 다산(多産)에 먹성까지 좋은 교사 며느리가 엄마는 아주 기특한 모양이었다.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참나물 반찬을 입에 문 채로 아내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머니는 요즘도 귀가 잘 안 들리세요?”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안 들리긴… 요즘은 또 제대로 잘 들린다.”
나는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기찻길 옆에 오래 사셔서 그런 거라니까.”

 

극성맞기 짝이 없는 내 자식들이 엄마는 그래도 기특한 모양이었다. 그 신 귤을 벌써 몇 개나 까먹어가며 집 안을 어지럽히고, 숨바꼭질한다고 떠들어대며 아이들이 뛰어노느라 거실이 한참 시끄러웠다.
매년 이맘때면 틀어주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빠삐용(Papillon)>을 혼자서만 감상하면서 흡연 욕구를 애써 잠재우는데, 설거지하던 아내가 돌아서더니,
“지붕에서 또 물이 새나 봐요.”
하며 깊은 한숨을 두어 번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세월의 더께 앉은 엄마네 집 싱크대 위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한숨 한 번 길게 뽑아내고 나서 내가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괜찮아. 장비 다 잘 챙겨왔다니까.”
“다행이다. 이참에 어머님 댁 좀 제대로 고쳐드리고 가자고요.” 
다짐하듯 내가 말했다.
“그래야지.”

 

문밖에 나와 아이들 피하여 연기 한껏 삼키고, 오래도록 잊었던 추억을 찾아서 타박타박 그때 그 길을 좀 걸어보았다. 첩첩산중 산골을 연상시키는 풍경은 하나 변함이 없는데, 풀 내음에 젖어 철새들이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저 ‘무욕(無慾)’의 땅 어딘가로 홀연히 날아가는 철새들. 철새들은 날아가고, 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양쪽 뺨이 몹시 쓰렸다. 오락가락하는 연안의 날씨 못지않게 변덕스러운 이곳 날씨였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 종잡을 수 없는 세상. 쓴웃음이 나왔다. 찬바람 휘몰아치는 길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내가 처량해져서 되레 잔잔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니, 날씨 뺨치게 오락가락하는 인간의 변덕이었다.
종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의 서슬은 무자비하고도 얼얼했다. 살얼음조각을 사정없이 날리며 겨울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식겁하게 매서웠지만 나는 그러나 허기가 느껴질 때까지 궁핍하고 남루했던 지난 시절도 돌아볼 겸 시내까지 걸어서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난설헌의 시를 속으로 읊조리며 타박거리는 동안 내 고향이 낳았고 내 고향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하나씩 떠올랐다. 비운에 스러져간 천재 허난설헌의 애잔한 삶이 다른 무엇보다 나는 더 안타까웠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한문으로 지어낸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문자향(問字香)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슬픔이 밀려왔다. 명(明)나라가 극찬하고 왜(倭)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장가. 당파와 얽혀져 관찰사로 만족해야 했던 아버지 허엽(許曄), 오빠 허봉(許), 그리고 동생 허균(許筠).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아, 시대를 좀 잘 만났더라면 세상에 큰 족적 남겼을 허 씨 문장가들. 천품을 타고난 문재(文才) 다 못 펼치고 끝내 요절한 천재 문인 난설헌. 세월은 가고, 시대도 가고, 세상 또한 변했으나 그녀의 필력만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자갈과 진흙으로 오래 다져져 여전히 우툴두툴한 추억의 흙길을 걸어볼 수 있는 지금이 그나마 내겐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다리에 꾸준히 힘 줘가며 나는 꾸준히 걸었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가끔 슬며시 몸에 감겨오는 갯바람이 짭짤해서 좋았다. 바람의 끝자락에 알게 모르게 실려 오는 온기가 여기 사람들은 서럽도록 고마울 것이었다. 봄날이 머지않았음을 나는 살갗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어미를 삥 둘러싸고 아슬아슬 호수에서 자맥질하는 물오리들이 깜찍했다. 꾸불꾸불 이어진 마을 길에서 이제 막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산자락에 우뚝 선 아파트 단지가 흉물처럼 다가섰다. 상전벽해였다. 고마운 고향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객실 안 갖가지 표정의 얼굴들이 빠르게 스쳤다. 물음표를 달고 어딘가로 떠나가는 사람들. 나는 떠나는 그들에게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중심을 잃고 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엄마네 집에서 재 너머 시내까지 그 먼 길을 한 번 쉬지 않고 걸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이승에 한이 있어 밤마다 찾아오는 여귀(女鬼)’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찬바람이 허공 저편에서부터 몰아쳐서 얼어붙은 거리를 연방 할퀴고 지나갔다. 추억을 먹으러 작심하고 찾아간 식당은 그때처럼 썰렁했다. 
“짬뽕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식당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사뭇 공손히 내 주문을 받아갔다. 여자에게서 지나온 세월이 느껴졌다. 수정처럼 맑기만 하던 하늘이 갑자기 빽빽해졌다. 종잡을 수 없는 하늘이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와 내가 찾아왔던 날에도 눈이 퍼부었었다. 지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어느새 빽빽해진 하늘이 눈을 뿌려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함박눈이 꽤 많이 퍼붓던 날, 궁색한 우리 집 살림에, 아버지마저 자리보전하여 누워 끙끙 앓고 계셔서 도시락 한 번을 제대로 챙겨서 학교에 가는 일이 없을 때였다. 마지막 국어 시간이었다.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담임 겸 국어 선생님께서 별안간 나를 부르셨다.
“이현종이, 넌 가방 싸서 먼저 집에 가도 돼.”
영문을 몰라 나는 갸웃거렸고, 선생님은 이유를 말씀하시며 끄떡이셨다.
“어머님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어서 가 봐.”

 

펑펑 퍼붓던 눈이 차츰 그쳐가고 있었다. 엄마가 눈을 머리에 옴팡 뒤집어쓴 채 교문 앞에서 덜덜덜 떨고 있었다.
“우산이라도 쓰고 오지. 혼자서도 집에 잘 갈 수 있는데… 집에서 그냥 기다리면 되지…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대체 왜 오는 거냐고….”
“혹시라도 눈길 너 혼자 걸어오다가 넘어지면 어쩌나 불안해서….” 
무장공비들이 권총으로 죽어간 산에서 가까운 내 중학교였으니 엄마의 불안과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가 물었다.
“왜 자꾸 다리를 절뚝거려, 엄마?”
“…….”
“오다가 눈길에서 넘어진 거야? 여기 오다가 진짜 넘어진 거 아냐?”
“…….”
“왜 자꾸 절뚝거리는 거냐고…?”
“…….”
“…….”

 

머리 풀어헤친 광녀(狂女)처럼 연달아 휘몰아치는 찬바람에 갈대밭이 휘청거렸다. 호의를 극구 사양하기만 하던 엄마는 기어이 아들의 등에 업혀 길을 가며 연방 웃음꽃을 피웠다. 허리 휘어지는 밭농사에, 의사마저 손을 놓아버린 아버지 수발에다 모텔방 청소에, 자식 건사까지 갖은 고생 다 하는 내 어머니였다. 그런 내 고마운 어머니를 등에 업고 눈길을 가는 기분이 나는 내심 뿌듯했었다.
“엄마!”
“왜, 현종아!”
“나 이번에 3학년 전체 1등 먹었어.”
“…….”
“지금 듣고 있는 거야?”
“…….”
“…….”

 

나는 자랑스럽게 떠벌였고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우는 거야, 엄마?”
“울기는… 네가 이번에도 전체 1등을 했다고 하면 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실 거다. 어서 가자… 집으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난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배고파, 엄마!”
“우리 아들 뭐 먹고 싶은데? 짜장면?”
“…….”
엄마가 다시 물었다.
“짜장면?”
“아니, 난 짬뽕. 그럼… 엄마는? 엄만 볶음밥?”
“아니.”
“그럼… 엄마도 짬뽕?”
“아니, 엄마는 아까 집에서 아버지 드실 때 아버지랑 같이 밥 많이 먹었어.”
“그래도….”
엄마와 함께 늦은 시간에 찾아간 식당은 썰렁했다. 엄마는 메뉴판을 쳐다보며 한참 뜸을 들이다가 짬뽕 한 그릇을 기어이 시켰다. 눈치를 살피며 내가 말했다.
“엄마도 지금 배고프잖아. 같이 먹자, 엄마.”
엄마가 빙긋 웃었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정말 괜찮다니까.”
게 눈 감추듯 후루룩후루룩 나는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그날 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난 시절을 씁쓸히 돌아보며 짬뽕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소주로 회포를 풀었다. 감흥에 젖어 소주 한 병을 깡그리 비웠더니 갑자기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물상들이 자꾸 흔들리며 다가오고, 무릉도원이 얼핏얼핏 느껴졌다. 기분은 알딸딸한데, 무언가 허전했다. 흐려진 눈으로 주인아줌마를 불렀다. 소주에 탕수육 소자 하나를 추가로 시켰다. 그리고 주방 쪽을 연신 힐끗거리며 아줌마에게 물었다.
“주인아저씨는…?”
“저세상으로 작년 이맘때 갔어요.”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구나 싶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옛날에 엄마랑 둘이서 왔었는데, 아저씨께서 그때 짬뽕에다 밥까지 덤으로 그냥 더 주셔서 엄마랑 둘이 정말 맛있게 나눠 먹었거든요. 그때 여기서 드셨던 그 짬뽕 맛을 엄마는 아직도 잊지 못하시겠답니다.”
그때 그 소년이 어느덧 자라서 이젠 한창 잘 나가는 건설회사 전무가 됐다는 말을 듣더니 주인아줌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좋아하는 게 아닌가.

 

“이런 걸 또 왜….”
탁자 위에 슬며시 올려진 접시를 내려다보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물었다.
“아저씨가 착한 학생에게 드리는 서비스 안주예요. 부담 갖지 마시고….”

 

소주 석 잔을 목구멍으로 더 넘겼다. 눈물이 핑 돌았다.
“탕수육 대자 하나에 튀김 만두 3인분만 더 만들어 주세요. 포장해 갈 겁니다.”
“탕수육은 식으면 맛이 덜해지는데….”
“집에 가서 어머니랑 같이 먹을 거예요. 탕수육은 데워 먹을 거니까 염려 마시고….”
포만감에 식당 밖을 나섰다. 쌓였던 눈이 아직은 얼지 않아서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좋았다. 보름달이 슬며시 떠올라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이 비단처럼 고운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기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막내 로아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잠잠해질 만하면 기차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가 울어대는 통에 도대체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내가 젖을 물려도 소용이 없었다. 막내가 우는 소리에 섞여 골반협착증을 앓고 있는 엄마가 옆방에서 끙끙 앓는 신음이 자꾸 귓전을 아득하게 울려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는 무턱대고 밖으로 나갔다.
영롱한 별들 사이로 은하수가 곱게 흘러가고, 휘영청 밝은 달이 흘리는 푸른빛에서 몽환의 세상이 언뜻언뜻 느껴졌다. 영순네 기와집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모처럼 만난 가족이 이어가는 술자리가 아직도 파하지 않은 듯 왁자지껄한 함성과 웃음이 조용해질 만하면 터져 나왔다.
여러 번 그르친 끝에 겨우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숙이 밀어 넣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아버지 산소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양이가 아버지 산소의 어둠 속으로 꽁무니 빠지게 달아났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버지 산소 앞에 앉아서 엄마가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허리가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자겠어요. 무릎도 아프고, 머리도 지근거리고, 온몸 구석구석 다 쑤시고, 어떨 땐 사람들이 하는 말도 전혀 알아듣지 못해요. 오늘따라 당신이 무지 보고 싶네요. 하나뿐인 기특한 우리 아들 현종이도 남부럽지 않게 회사에서 잘 지내고, 며느리도 기특하고, 손녀딸들까지 모두 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엄마가 눈시울을 닦았다.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집 안을 한 번 휙 둘러보고 지붕까지 꼼꼼히 다시 살펴보고 나서 철물점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순이를 만났다. 분홍빛 생명력 넘치던 얼굴에 치떠서 흘기는 눈길이 인상적이었던 아이. 한 떨기 장미처럼 곱디곱던 얼굴이었는데, 그동안 고생깨나 한 모양이었다. 이지러진 그녀의 몰골에선 소담스럽던 이미지를 찾아낼 길이 없었다.
“어렸을 때, 오빠 정말 좋아했었는데….”
말끝을 흐리며 영순이가 얼굴을 붉혔다. 싱긋 웃어 가며 내가 말했다. 
“나도 너 많이 좋아했었다.”
“그럼… 진작 말해줬어야지….”
고개를 떨구고 내게서 또각또각 멀어져 가는 듯싶었는데, 영순이가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행복하게 잘 살아, 오빠!”
“영순이 너도 잘 살아라… 행복하게….”

 

사정없이 지붕에 쏟아져 가루가 돼버리는 햇빛에 자꾸 눈이 부셨다. 햇빛이 이젠 봄날처럼 따사롭기까지 하다니,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잠시 뜸 들이다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려는 나를 아내가 극구 말렸다.
“눈도 아직 다 안 녹았는데,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절대 올라가지 마시라고요.”
눈물 어린 아내의 간절한 호소였다. 진한 감동이 확 밀려왔다.
‘이래서 내가 이 여자와 결혼을 했구나….’
마음이 가는 대로 부실한 지붕을 뜯어내 그럴싸하게 새로 단장하고, 방수 공사까지 온전히 끝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확 달라진 지붕을 올려다보면서 엄마가 무척 좋아했다. 보일러도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괘방산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엄마가 새 보일러를 쓰다듬으면서 자꾸 눈을 껌뻑거렸다.

 

어느새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보쌈김치다. 떨어지면 언제든 다시 와 가져가거라.” 
엄마가 손수 챙겨준 김치 한 보따리를 들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보따리가 묵직했다.
스피커에서 베토벤의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영순네 기와집을 지나며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가 동백꽃처럼 웃었다. 엄마가 룸미러 안에 들어왔다. 꾸부정한 그 몸으로, 그녀가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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