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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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의 병은 불면증과 더불어 왔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어떤 조짐 같은 것들이 없지 않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든지 공연히 화를 벌컥 낸다든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명순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했다. 무엇보다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걸핏하면 죽여야 돼. 죽이고 말 테야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명순이 그렇게 물으면 개 같은 새끼들이 말이야. 개 같은 새끼들이라고 하는 식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아주 오래전의 어떤 기억을 향해서 욕질을 해대는 것 같기도 했고 최근의 노동판에서의 모욕당한 일을 기억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명순은 노동자들의 면면을 대개 알고 있었다. 노동판에서 일하는 남편이 안타까워서 때로는 점심 도시락을 챙겨서 가져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막일꾼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야, 윤식이. 색시 하나는 잘 두었다. 제법 미인인데. 불량기가 있는 자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허, 그 여자 색 쓰게 생겼는데. 임마, 너 같은 약골로는 당하지 못하겠다. 내게 한 번만 빌려주라. 명순은 그들이 워낙 그런 바닥의 사람들이라 싶어서 아예 들은 척도 않았지만 윤식은 울그락불그락했다. 이런 데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는 그렇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어쩌다 그가 도시락도 없이 일하러 가게 되면 마음이 아팠다. 종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판에 점심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여서야 되겠느냐 싶었다. 그래서 남편이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시락을 챙겨 가게 되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부들의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어떤 날은 술참 때 마신 술로 얼큰해진 일꾼들이 술김을 빌어서 그녀를 희롱하려 들기도 했다. 아주머니, 이놈이 사내구실은 제대로 합니까? 명순이 변색해서 쏘아붙였다.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요. 아, 죄송합니다. 그들은 느물느물 웃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그들의 농짓거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젠장, 목소리까지 나긋나긋하네요.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요. 젠장, 그럼 어디에서 나와야 말이 되는고?
그런 날은 윤식의 귀가를 기다리는 게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윤식은 으레 술에 푹 절어 있었다. 내가 뭐랬어. 오지 말라고 했잖아? 하고 으르렁거렸다. 막노동하는 사람이 점심까지 굶어서야 되겠어요 하고 명순은 항변하지만 윤식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굶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는 그렇게 고함치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윤식은 느닷없이 묻곤 했다. 당신, 저 소리가 안 들려? 무슨 소리요? 아니, 저놈들이…. 야, 이 새끼들아!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새끼들이 여기까지 따라왔어.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명순의 말에 그는 당황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단 말이지? 그는 그렇게 반문하고는 의심스런 눈으로 둘레를 몇 번이나 휘돌아보았다. 그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듯했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듯했다.
공사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고 명순이 다그쳐 물으니까 윤식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개새끼가 말이야…. 윤가 새끼가 말이야. 명순은 불량기가 있어 보이던 윤가를 떠올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말이야. 당신 배꼽 밑에 틀림없이 점이 두 개 있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야. 명순은 저도 몰래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런 망칙한 소리 하는 놈을 그냥 뒀어요?
아마도 싸움의 발단은 그런 음담패설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녀석이 직접 더듬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야. 그곳에 터럭이 세 올이라느니 하면서 말이야. 당신 내일부터 당장 그곳을 그만둬요. 당장 그만둬야겠어. 윤식은 그렇게 말했다. 당장 그만둬야겠어. 그러나 막상 다음 날이 되자 그는 그곳으로 다시 나갔다. 일꾼들은 몇 명씩 팀이 되어서 일했다. 그렇게 차례가 되었기 때문에 팀에 끼지 않으면 일거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환청을 듣기 시작하고부터는 비슷한 일이 자주 되풀이되었다. 아니 저 새끼가? 윤식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저 발자국 소리가 정말 들리지 않는다고? 윤식은 의심스런 눈으로 명순을 흘켜보았다. 무슨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요? 잘 들어 보라고? 윤식은 명순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살금살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옷 채로 문께로 살그머니 다가서더니 갑자기 문을 와락 열어젖히고 후닥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참이 지나서 윤식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들어왔다. 네년이 기침을 했지? 달아나라고 신호를 보낸 거야? 네년이 기침을 하는 순간 후닥닥 달아난 거라고. 윤식의 의심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는 아내를 의심하고 아이들을 의심했다. 동료들을 의심하고 이웃들을 의심했다. 그 자신을 따돌리기 위해서 모두들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한낮인데도 일터에서 일거리를 팽개치고 불쑥 집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죠? 명순이 놀라서 물으니 윤식은 의심스럽게 그녀를 살피는 것이다. 애들은 없나? 윤식은 그렇게 물었다. 놀러 나갔어요. 그럼. 혼자겠군? 그는 방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공연히 옷장의 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이리 와. 윤식의 눈빛이 이상했다. 이리 오라니까? 명순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방바닥에 누워야 했다. 옷이 벗겨졌다. 점이 있긴 있군. 두 개가 아니고 세 개나 되는군.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점이 세 개라고 했어. 못 할 말을 했나? 명순은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서 그는 서둘러 옷을 걸쳤다. 어서 가봐야 돼. 일하다가 온 건가요? 모두들 찾을 거야. 그냥 왔으니까. 명순은 어이가 없었다. 또, 윤간가가 한마디 한 모양이군요? 어떻게 알았지? 윤식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알긴요? 당신 행동이 이상해서 물어본 거죠. 개 같은 새끼들이 말이야. 한두 놈만도 아니라고. 모두들 작당을 해서 말이야. 나만 보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리거든.
윤식은 어떤 피해의식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래서 그걸 알고 있는 동료들이 그를 놀렸다. 임마, 네 여편네가 말이다. 지금쯤은 한참 재미를 보고 있단 말이다. 그러면 윤식은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집엔 사내놈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를 눕혀 놓고 확인하는 것이다. 남의 여자를 간음한 사내녀석의 체취를 맡아내기 위해서 큼큼거렸다. 여자의 질속에 흥건히 넘치는 정액의 흔적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연놈들이 너무나 치밀해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늘 한발 늦게 달려온 자신만이 병신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그 직장 그만둬요. 정 굶게 되면 내가 벌지요. 명순은 그렇게 말했다. 심약한 남편이 더 이상 그런 자들과 상종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윤식은 다음 날이면 전날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듯이 다시 일터로 나갔다. 그리곤 술에 푹 절어서 돌아왔다. 개 같은 새끼들이 말이야. 내 뒤를 염탐하면서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당신이 뭐라고 염탐하겠어요? 내가 알 게 뭐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천장을 우두커니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상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는 홀로 떠도는 섬이 되었다. 외로운 섬이었다. 그래서 자신만의 저 깊은 내면으로 침잠했다.
윤식의 병은 점점 깊어 갔다. 이 새끼들아. 그는 그렇게 소리 질렀다. 이리 나오지 못해. 내가 잡으러 간다. 윤식은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내달릴 기세였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명순이 말리자 버럭 화를 내었다. 이년아, 이렇게 똑똑히 정신 차리고 있다. 그러니 네년이 목사놈과 붙어먹은 것까지도 안단 말이다. 윤식은 자주 교회에 들락거리는 명순을 그런 식으로 타박했다. 그러나 명순이로서는 교회밖에 위로받을 데가 없었다. 교회가 바로 이웃이라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목사님의 도움을 청하곤 했던 것이다. 죄받을 소리 하지도 말아요. 명순이 그렇게 항변해도 막무가내였다. 죄는 네년이 받을 게다, 이년.
그렇게 투정을 부리던 윤식이 갑자기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잠속으로 빠져든 모양이었다. 명순도 설핏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윤식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윤식이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 가려워. 가렵단 말이다. 네년이 내 몸에다 옴벌레를 뿌린 거야. 이 죽일 년, 이 옴벌레를 보라고.
윤식은 자신의 몸을 박박 긁었다. 그러다 옷을 벗고 옷자락을 활활 털었다. 나중에는 이불과 요까지 활활 털었다. 윤식은 벗은 자신의 알몸을 사정없이 긁었다. 손톱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견딜 수 없는지 긁은 자리를 긁고 또 긁었다.
그러던 윤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년아, 어서 물을 끓이란 말이야. 물을 끓여. 물은 왜요? 옴벌레를 죽이려면 끓는 물로 소독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 물어. 어서 물을 끓이란 말이야. 명순은 급히 생나무를 구해다 불을 지펴야 했다.
그런 난리를 부리는 중에 걱정이 되었던지 목사님이 찾아왔다. 박 여사, 어찌 되었소? 옴벌레가 온몸으로 기어 다닌다며 소동을 부리고 있어요. 명순이 울먹이며 말하자 목사님이 혀를 찼다. 안 되겠소. 어서 병원으로 보내요. 명순은 주저했다. 저러다 진정되지 않을까요? 목사님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기 전에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그러는 거요. 명순은 마침내 목사님의 건의를 따르기로 했다. 목사님이 주선한 교인들이 몰려와서 윤식을 강제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 병원으로 끌고 갔다.
의사는 윤식을 진찰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콜중독입니다. 술 체질이 아닌 사람이 무리하게 술을 마시다 보니 중독 증세가 나타난 거요. 의사는 덧붙여 말했다. 술 취한 망각 상태가 지속되면서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거요. 그러니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바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또 자신이 문득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도 바로 현실로 착각하게 되는 거지요. 그가 몸이 가렵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 되고 그가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바로 현실이 된다 그 말이요. 그래서 몸이 가렵기도 하고 온갖 환청을 듣기도 하는 거요. 아내를 의심하는 병도 그래서 생긴 거지요. 한 번 의심하면 그게 의심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체험처럼 느껴진단 말이요. 그러니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지요.
윤식은 입원 중에 그런 증세를 더욱 뚜렷이 보였다. 저놈들 좀 봐라. 영구차에 50명이나 매달려서 어쩌겠다는 게야. 임마, 작대기를 짚는 게 아니라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어야지. 아니 그 새끼가 왜 죽었냐? 콘크리트 차에 깔려 죽었다고? 야, 윤가야. 네가 떠밀었지. 개새끼. 그렇게 재난 칠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다고. 윤식은 횡설수설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의사가 윤식에게 물었다. 윤가가 누구요? 같이 일하던 사람이요. 그하고 친했소? 내가 미쳤다고 그런 새끼와 친해요. 별이 셋이나 되는 놈이요.
의사는 다른 식으로 질문을 계속했다. 결혼은 언제 했소? 어느 결혼 말이요? 어느 결혼이라니요? 의사가 의아해서 반문했다. 나는 두 번 결혼했소. 윤식의 기억력은 비교적 정확했다. 첫번 여자는 장군의 딸입니다. 여자는 여군 간호장교이고, 그녀의 아비는 장군이었지요.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에게 정조를 바치고 바람이 나서 군대에 들어온 여자요. 만나게 된 동기 같은 것은 기억나오? 그 계집년이 먼저 꼬리를 쳤지요. 나는 그때 군병원 정문 초소를 지키는 일등병 신세였지요. 그년이 어이 김 일병 이리 와서 커피 한잔 해요, 어쩌고 하면서 나를 꼬신 겁니다. 계집년이 먼저 꼬리를 치는데 사내자식이 안 넘어가요? 그러다 꽉 잡히고 만 거지요.
의사는 긴가민가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래서 결혼을 하셨군요? 결혼이고 뭐고 그냥 같이 살았지요. 그러다 딸애 하나가 태어나니까 어쩔 수 없이 결혼 신고도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그 애비가 말이요. 현역 장군이지요. 내 신원을 조사했다 그 말입니다. 그 바람에 나는 보안사에 불려가서 찍 싸게 얻어맞았소.
그 딸이 좋아서 한 결혼인데 왜 조사를 받았지요? 의사는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니 개좇 같은 놈들이지요. 조사관이 처음엔 귀쌈을 후려갈깁디다. 이 새끼야. 이 빨갱이 새끼야. 니 애비 할애비가 다 빨갱이인 주제에 누구 신세를 망치자고 감히 그런 짓을 했어? 하고 말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한 겁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들인데. 아무튼 그 좆 같은 애비인지 할애비인지는 일찌감치 북쪽으로 넘어가서 잘 처먹고 잘 사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씨팔 나는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생선장수로 겨우 연명하는 홀어미와 살았지요.
의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과거의 부역 문제는 지금에 와서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모두들 그렇게들 알지요. 윤식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엔 다른 새끼가 와서 구둣발로 정갱이를 걷어찼지요. 이 새끼야. 네놈은 전라도 놈도 아닌데 광주 사태 어쩌고 하며 데모나 한 놈 아냐? 하고 악을 쓰면서 말이요. 학생 때 데모에 앞장을 섰던 모양이지요? 앞장이고 뒷장이고 있어요. 그때 그 시절엔 누구나 그런데 끼곤 했지요. 물론 나도 돌팔매질 깨나 했수다. 저들이 먼저 최루탄을 쏘아대는데 어쩌란 말이요.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질밖에요. 그러다 누군가가 하나 다친 모양인데. 그때 붙들린 자들은 모두 강제로 입영당했소.
그렇게 해서 윤식은 강제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새끼가 볼펜과 종이를 들이대며 자술서를 쓰라고 했지요. 장군의 딸을 꼬실 때는 무슨 원대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고 말이요. 남파 간첩놈들의 지령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이요. 그래서 어찌했소? 뭘 어찌해요. 매 맞다 죽는 것보단 쓰란 대로 쓰는 게 낫지요. 그런 것 쓰고 감옥살이하다 세월 지나니 내보내 줍디다. 감옥엔 몇 년이나 있었소? 알 게 뭐요. 그때부터 세월을 잊었으니까.
의사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물었다. 두 번째 여자는 어떻게 만났소? 공장에서지요. 봉제공장인데 그곳에서 그 여자는 경리를 보았지요. 아주 청순해 보였어요. 순진해 보이기도 했고요. 알고 보니 순 화냥년입니다.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착각이라고요? 웃기지 마시오. 사내들이 말이요. 암내 맡은 수캐들같이 몰려오지요. 목사님도 있고 말이요. 택시기사들은 한 두름도 넘소. 나하고 노동판에 같이 다니는 놈치고 그 여자 맛을 안 본 놈이 없다 그 말이요.
의사는 참을성 있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병이란 건 생각해 보았소? 그런 여자하고 사는 놈치고 병이 안 나면 이상하지요. 통 잠을 잘 수 없어요. 사내놈들이 냄새를 풍기며 몰려드는데 말이요. 의사가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은 알콜중독입니다. 그래서 그런 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환상에 젖기도 하고 환청을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흥, 당신도 벌써 그 여자에게 세뇌를 당했군. 외모보다 물건이 더 좋소. 한 번 겪어 보시오. 젠장. 이미 겪어 보았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미주알고주알 캐묻는 거지.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매우 중증이었다.
병원 치료가 효험이 없자 명순은 윤식을 퇴원시키고 매일같이 남편과 더불어 소문난 기도원을 찾았다. 오늘은 <다락방기도원>엘 갑시다. 그곳은 북악터널 옆의 산자락에 있는 기도원이었다. 윤식은 군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감람산기도원>도 용하다는 소문이데요. 그들은 도봉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한 기도원을 찾기도 했다. 기도원은 여러 곳에 있었다. 용하다고 소문난 곳도 여러 곳이나 있었다. 여러 교파가 제각기 기도원을 경영하고 있어서 안수의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이렇게 정성껏 헤매다 보면 어느 곳에선가 효험을 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오늘은 <천마산기도원>입니다. 명순이 그렇게 말하고 외출 채비를 하는데 윤식이 머리를 흔들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래 처음으로 보인 거부 반응이었다. 왜 그래요? 소용없는 일이야. 내 병과 마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그럼 무엇과 상관이 있어요? 무엇과도 상관이 없어. 윤식은 더 이상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명순은 이런 윤식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뚜렷한 자기 견해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병이 호전된 양상으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기도원을 기피한다는 점에서는 마귀의 힘이 더 강렬하게 작용하는 징조라는 의심도 갔기 때문이었다. 명순은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남편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이제부턴 제가 직장에 나가도 돼요? 명순은 남편의 퇴원 이후로 파출부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윤식의 의중을 타진했다. 윤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명순이 다시 파출부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윤식이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신 어쩐 일이지요.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시기로 맹서했잖아요? 윤식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술 치워요. 그녀가 술병을 잡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둔중한 주먹이 그녀의 면상을 갈겼다. 명순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격에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이년, 이 화냥년.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더불어 그는 들고 있던 상자곽을 그녀의 얼굴 위로 뒤집어엎었다. 상자곽 속에 있던 편지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 명순은 그제야 그것이 춘식이 오빠가 보내온 편지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개 같은 년. 이러고도 나를 미쳤다고? 그의 무지막지한 발길이 그녀를 짓밟았다. 제년 좋으라고 나를 정신병원에 가두었지. 이년?
하얀 갈매기들이 날갯짓 치기 시작했다. 동해의 해변에서 노닐던 갈매기들이었다. 그녀의 고향 바다에서 날갯짓 치던 하얀 갈매기. 순아, 네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들도 둘이나 두었다지? 나는 차마 네게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이곳에 평생 머물러 살 작정을 했다. 네 꿈을 꿀 때가 많다. 네 꿈이 꾸어지지 않으면 나는 바닷가 바위틈에 숨어서 네 꿈을 만들어 꾼다. 바위틈에 숨어 사는 달랑게들이 보글보글 거품을 뿜어 올리듯 나는 언제든지 새로운 꿈을 만든다. 이젠 익숙해져서 원하는 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꿈들을 저 수평선을 날고 있는 갈매기의 날개에 실어서 네게로 보내곤 한다.
명순은 춘식이 오빠로부터 달아나서 숨고자 했다. 춘식이 오빠는 그녀와 이종사촌간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관철시키려고 약을 먹기도 했다. 그 일로 집안에서 그녀를 서울로 빼돌린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한때의 뜨거운 열망도 헛된 꿈으로 잊혀질 때쯤 되어서 어떻게 알았던지 춘식이 오빠로부터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순은 오랜 꿈의 실체인 그 편지들을 몰래 상자곽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명순이 의식이 돌아왔을 때 윤식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옆방 현이 엄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의식을 잃은 여자를 그렇게 마구 짓밟다니 말예요. 명순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하얀 갈매기들이 다시 떼를 지어 날아왔다. 누구든 한때의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한때의 꿈도 있게 마련이다. 세월과 더불어 그런 사랑, 그런 꿈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실의 메마름, 사막 같은 현실에 헐떡이며 살게 마련이다. 명순인들 어쩌랴. 잘못 뽑은 제비인 것을.
명순이 파출부 일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서자 윤식은 큼큼하고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대뜸 빈 술병을 들고 그녀를 위협했다. 네년을 집까지 바래준 그놈은 누구야? 그놈이라니요? 몰라서 물어? 윤식의 눈동자가 다시 힐끗 돌아갔다. 아, 또 시작이구나. 명순은 대뜸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영영 가망이 없는 모양이라는 절망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눌렀다. 내가 뒤를 밟고 있은 걸 몰랐을 게야. 내가 뒤를 밟았다고. 당신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요. 누구의 뒤를 밟았다고 그래요? 옆집 현이 엄마한테 들었다고요. 이제는 연놈들이 짜고 나를 병신 만드는군. 나를 그렇게 만만히 보았다가는 큰코다칠걸. 암 큰코 다치고 말고.
명순은 윤식의 의심을 줄이기 위해서 파출부 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저예요. 당신. 아무 일 없죠? 무슨 일이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궁금하지 않아요? 그건 왜? 새삼스럽게. 지금 내게 전화해 봐요. 명순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윤식으로 하여금 전화를 하게 했다. 틀림없죠? 내가 몇 시면 집에 도착할 것 같아요?
명순은 그렇게 자신의 행선지를 수시로 확인하게 했다. 나는 남편을 구하고 말 테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명순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기셨다. 이 시련을 맡기신 큰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맡긴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제 극복하리라. 극복해 보이리라.
그런 노력의 결실로 한때는 잠잠해 보이던 윤식의 증세가 또다시 의심병의 형태로 폭발하려고 하는 것이다.
깊은 밤. 명순이 잠 깨어 화장실에 갔다가 방으로 들어오려는데 갑자기 문뒤에서 불쑥 윤식이 나타났다. 손에 식칼이 쥐어 있었다. 그놈은 어디 있어? 윤식의 핏발 선 눈이 그녀를 다그쳤다. 그놈이라니요? 개 같은 년. 방금 그놈 말이얏! 아니? 이 양반이…. 화장실 갔다 오는 사람 보고. 화장실 핑계 댄다고 내가 모를 줄 알고. 헛. 헛. 헛. 그는 이상한 억양으로 웃었다. 네년이 나를 속여 넘기려고 온갖 아양을 떨었지? 나를 속여 넘기겠다고? 나를 말이야. 내가 벼르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겠지. 그놈을 어디에 숨겼어?
명순은 교활한 눈으로 고양이같이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만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도저히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을. 안 되는 일도…. 어서 말해? 설마 화장실 속에 숨겨 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화장실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칼날을 곧추세우고 화장실 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명순은 후닥닥 내뛰었다. 골목길을 지나자 큰길이 나왔다. 깊은 밤중이라 큰길엔 한 대의 차도 다니지 않았다. 뒤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년아. 멈춰라, 멈춰. 명순은 혼신의 힘으로 뛰었다. 두려워서 뛰는 게 아닙니다. 명순은 울부짖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마침 커브길을 도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보였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다음 순간 명순은 한 마리의 날파리처럼 불빛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