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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한국문인협회 로고 마미성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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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_ 한복일(68세)|오미자(64세)|주민센터 복지과 직원(45세, 목소리) 
때_ 늦가을
곳_ 허름한 단독 주택. 거실과 단칸방
무대_ 낡은 주택. 거실 중앙에 유일하게 빛이 드는 작은 여닫이 창호문이 달려 있다. 비가 들친 듯 누런 창호지가 헤어져 나불거린다. 낡은 비닐로 막긴 막았으나 역부족이다. 그 앞 중앙에 무대 쪽을 향해 낡은 철제 침대가 놓여 있다. 침대 위에는 백발을 풀어 헤친 미자가 누워 신음하고 있다. 낡은 책상 위에 홑이불이 개켜져 있다. 그 오른쪽은 부엌과 한쪽 경첩이 떨어져 나가 덜컹거리는 출입문이 보인다. 그 옆으로 부엌은 무대 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천둥번개 요란히 치는 가운데 막이 오르면 백발의 한복일이 부엌에서 뭔가 준비를 하고 있다. 단칸 방문은 덜컹거린다. 오미자의 신음이 들린다. 고통을 애써 깨무는 소리다.

 

미자       (이를 악물고) 으으으….
복일       (단칸방 쪽을 보며) 알았어. 조금만 참아. 그런다고 예서 최후의 만찬 준비를 포기할 순 없잖아. 조금만 참아. 이 과정이 우리의 마지막 여정의 행복을 가져다줄 테니까!
미자       (아랑곳없이 문을 뒤틀며) 으으으….
복일       거참 안다니까! 그 지겨운 고통의 세기를….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배례도 무용지물이야. 지속성도 없어졌어. 점점 찰나가 되어 가고 있어. 게다가 이제 생존의 기본마저도 모두 바닥나 잠식돼 가는 시간일 뿐이야. 고로 모든 게….
미자       (아랑곳없이 문을 뒤틀며) 으으으….
복일       (머리를 내밀고 노려보며) 도대체 어쩌라고! 방금 말했잖아. 이제 우리의 선택지는 없다고! 게다가 나눌 수도 없잖아!
미자       (아랑곳없이 문을 뒤틀며) 으으으…. 죽고 싶어….
복일       (부엌에서 들어선다) 그게 뭔데?
미자       죽여줘!
복일       (마주 앉으며) 이거 왜 이래! 그건 서둘 일이 아니잖아! 어차피 우린 지금 그 언저리에 와 있어. 더 이상 미련도 없잖아. 나도 당신도….
미자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흐르지 않은 시간이 미치겠어.
복일       (눈물을 닦아 주며) 그래도 그 시간은 와…. 저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료함을 견디며 동행할 순간을 기다리는 녀석이 우릴 쏘아보고 있어. 배려하는 척 말이야.
미자       그딴 건 상관없어. 단 몇 초라도! 아니 찰나라도 이 고통을!
복일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야. 왜냐하면 그 시간은 잠깐으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의 마지막 게임은 다르지.
미자       소용없어.
복일       그러긴 해. 어차피 우리에게 소용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어.
미자       그, 그럼?
복일       순리대로 따라야지. 어차피 엉켜진 실타래일망정. 주어진 거니까. 그러다 보면 뭔가. 그 뭔가가 보이지 않을까….
미자       미쳐버리겠어.
복일       그럴 복이라도 있을까?
미자       부탁이야. 순간이라도 맛보고 싶어.
복일       그러니까 만찬 준비까지만 참으라고…. 그때는 몽땅….
미자       그때는 소용없잖아. 어차피 끝나니까….
복일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어차피 남겨봐야 소용없으니까. (두리번거리다 머리맡의 책상 서랍을 열어 주사기와 약병을 꺼낸다.)
미자       (어이없다는 표정) 엎디면 코 닿을 데 있었군.
복일       맞아. 모든 건 가까이에 있어. 단지 손에 안 잡힐 뿐이지. (약병에 주사기를 꽂아 약물을 담는다.)
미자       그게 다야?
복일       그러면?
미자       아, 아냐. 어차피 끝일 테니까….

 

복일, 말없이 미자의 팔을 걷은 다음 노랑 고무줄을 감아 핏줄을 찾는다.

 

미자       또 숨었어?
복일       끝까지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봐?
미자       손에 힘을 줘 볼까?
복일       그런다고 본색을 나타내지는 않아.
미자       그럼?
복일       흔적에 맞춰야지.
미자       지금껏?
복일       그렇지 뭐. 따끔할 거야?
미자       그런 것도 있었나?

 

복일, 미자의 마른 팔에 말없이 주사를 놓는다. 미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복일, 주사를 뺀 다음 약솜을 들어 주사 부위에 놓고 미자를 쳐다본다.

 

미자       (약솜을 버리며) 어차피 피도 말랐어.
복일       저녁 먹을까?
미자       만찬을 서두르자는 건가? 그전에 어제의 결단을 되새겨 보는 게 어때?
복일       복기(復棋)라? 여전히 가물거린다는 건가?
미자       상태를 알잖아.
복일       하긴, 못할 것도 없지. 그렇다면 어제 저녁을 거슬러 보지.

 

복일, 책상 위에 개켜져 있는 홑이불을 바닥에 깐 다음 그 위에 앉아 미자를 쳐다본다.

 

복일       방금처럼 주사를 맞은 다음이었어. 당신이 모처럼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어.

 

주위 점점 어두워졌다 밝아지면 미자, 복일을 본다.

 

미자       옆에 눕지, 그래?
복일       비좁지 않아.
미자       어차피 비좁은 곳으로 갈 텐데.
복일       (옆자리에 누우며) 그땐 모든 게 공평해….
미자       (한숨을 내뱉고) 무료한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복일       무슨 말이야?
미자       이거 왜 이래. 얼마 남지 않았으면서도 개기고 있잖아.
복일       그런다고?
미자       부질없는 짓이야. 당신에게도 못 할 짓이고….
복일       그렇진 않아. 함께라는 게 안심돼….
미자       그것도 머지않았는데?
복일       아냐. 그건 누구든 일방적이어서는 안 돼.
미자       그럼 동반 자살이라도….
복일       혼자라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미자       재산 탕진의 후회인가?
복일       미안할 뿐이야. 좀 더 있었더라면 좀 더 해 봤을걸….
미자       결과는 변하지 않은데….
복일       그래도 포기하고 싶진 않아.
미자       이젠 막바지까지 왔는데….
복일       기다란 질주에서 하이라이트는 테이프를 끊었을 때야.
미자       그래서 요는 뭔데?
복일       제안을 하고 싶어.
미자       뭘?
복일       최후의 만찬….
미자       쫑파티라도 하자는 건가?
복일       응. 일방적이라 미안한데, 모든 걸 정리했어.
미자       정리할 게 아직도 남았어.
복일       이 집 보증금. 백만 원.
미자       원래 백오십 아니었나.
복일       두 달 밀려서 오십은….
미자       그것마저 찾아 버리면 어떻게 해?
복일       어차피 막바지까지 왔어.
미자       그건 무슨 말이야. 3년 동안 소식이 없던 재개발이 시행된다는 말이야?
복일       당신이 걱정할까 말 안 했는데. 시공사가 정해져서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어. 우린 십 년이 되지 않아 겨우 소액의 이사비 수준이지만….
미자       뭐야? 그럼 어떡해?
복일       순리에 따라야지.
미자       당장 거처가 문젠데
복일       어차피 우리에게 거처는 정해져 있지 않았어.
미자       그래서?
복일       함께 소비하고 싶어. 그토록 부러워했던 억만장자처럼….
미자       난 도무지…. 결국에는 동반 자살이라도….
복일       아냐. 마지막 희망은 둘 거야?
미자       희망이라니?
복일       복권을 사는 거야.
미자       마지막까지 요행에 걸자고?
복일       그럼 덜 억울할 것 같아…. 막바지라도 운이 따른다면….
미자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복일       물론이지. 한이라도 없잖아.
미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복일       아직도 미련이 남아?
미자       그, 그렇다기보다는….
복일       묵묵히 내 의견에 따라 줘. 마지막 부탁이야….

 

미자,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본다.

 

복일       마. 마지막 부탁이야….
미자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복일       (바로 앉으며) 그럼, 지금부터 버킷리스트를 짜는 거야. 백만 원 한도 내에서….
미자       꼭 그래야 해?
복일       응. 서글픈 소원이었지만….
미자       그럼 드라마 보면서 소원했던 유명 호텔 바에서 고급 케이크에 팥빙수 먹을까?
복일       좋지. 그럼, 나머지 오십으로 뭐 하지?
미자       뭐야? 그렇게나 비싸?
복일       나도 은근히 생각나 고급 호텔에 전화로 알아봤는데…. 메뉴당 25만 원이래!
미자       뭐야! 그렇게 비싸?
복일       비싼 것 아니라던데…. 그것도 예약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대…. 주문할까?
미자       미쳤어! 난 그걸 먹는 순간 경기가 일 것 같아 싫어.
복일       그럼 뭐로 하지?
미자       슈퍼에서 2천5백 원짜리 팥빙수에 케이크 대신 코리아 피자 부침개로 하지.
복일       그래도 괜찮겠어?
미자       응.
복일       하긴 배설하면 마찬가지니까? 그건 그렇고 다른 거 없어. 당신 소원이 명품 하나 갖는 거였잖아.
미자       그렇긴 한데. 그러면 우리 예산에 맞는 것이 있을까?
복일       작은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
미자       그럼, 삼각팬티 같은 거로 할까?
복일       그럴까…. 대출을 받아야 하긴 하는데….
미자       그 정도야.
복일       이태리제가 이백오십이래. 그것도 세일해서….
미자       뭐야! 뭔 팬티가 그렇게 비싸? 그것은 똥오줌 묻지 않는데?
복일       그러니까 말이야.
미자       그냥 만 원에 5장 하는 덤빙 팬티 사 입지.
복일       하긴 일단은 부담 없으니까. 다음은 뭐로 하지….
미자       그. 글쎄….
복일       그럼, 열대 과일은 어때? 당신 동남아시아 여행 소개 프로그램 보면서 두리안, 망고스틴, 아보카도, 람부탄이 먹고 싶다고 했잖아.
미자       그러긴 하지만 그것들도 비싸잖아.
복일       아냐! 요즘은 과잉 수입으로 싸졌대. 20만 원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아.
미자       그럼 종류별로 1개씩 사서 맛보기로 하고 나머진 가성비에 맞춰 하얀 트레이닝복을 사도록 하자고….
복일       그건 뭐 하게…?
미자       깨끗하게 보이고 싶어….
복일       수의 대신에….
미자       우리들이야 모두 시신 기증 서약했으니까. 병원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은 청결해 보이고 싶어….
복일       나도 그런 생각이었어…. 그리고 한 오만 원 정도 남겨서 복권을 살 거야. 그것도 1등 당첨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미자       그리고?
복일       커튼콜을 하는 거지. 우리들의 마지막 만찬과 함께…. 어때 그런대로 쏠쏠하지?
미자       그건 그렇고 만약에 당첨되면 어떡하지?
복일       그런 복을 타고났다면 이렇게 궁지에까지 몰리진 않았어.
미자       그럼, 왜?
복일       마지막 발악이랄까? 그래, 어떤 변명거리라도 만들고 싶어….
미자       슬픈 희망이네요.
복일       어차피 인간은 슬픈 존재야.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결국에는 바둥대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니까.
미자       마지막 희망이 당첨되면….
복일       객기를 부리는 거지. 펑펑 쓸 거야.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미국 아니 더한 나라라도 찾아가서 바둥대 보는 거지.
미자       부질없는 짓이 아닐까?
복일       어차피 인생은 그거야. 도 아니면 모…. (윗몸을 일으키며) 이것으로 복기는 끝인데 이해가 돼? 이게 어제 우리가 공모한 최후의 만찬이야. (침대에서 내려와 보조 의자에 앉는다.)
미자       서글픈 놀이였구먼.
복일       그러기엔 처절하다는 것이 맞아. 그걸 실행에 옮기고 있으니까.
미자       그럼, 최후의 만찬 운운한 것도?
복일       맞아. 거의 준비를 맞춰 가. 오늘 토요일, 막바지에 치닫고 있는 거지. 곧 있을 8시 30분에 운명의 주사위를 기다리면서….
미자       그럼, 우린 이것으로….
복일       미련이 남아?
미자       아, 아니. 당신이 좀….
복일       억울해할 거 없어. 어차피 막장인걸….
미자       (한숨 쉬며) 막장이라….

 

부엌에서 전기밥솥의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

 

미자       밥을 새로 한 거야.
복일       약밥을 좀 해봤어. 물론 몸에 좋은 현미도 넣고….
미자       무슨 필욘가?
복일       어차피 우린 헛발질 속에 살았어.
미자       으으으.
복일       또 지겨운 발악의 신호인가?
미자       아직은. 참을 만해….
복일       그럴 필요 없어. 서글픈 연장이 필요해? 당신이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아끼면 똥이 된다고….
미자       그. 그래도 이건.
복일       됐어. (약병을 꺼내 주사기에 채운 다음 미자의 팔에 놓는다.)
미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푸….
복일       한숨 자….
미자       자신 없어요. 아니 두려워…. 이대로 끝이 아니나 싶어서….
복일       무슨 소리. 계 탄 거지. 화장실 가다가 미국 놈 지갑 주운 거지.
미자       당신을 어떻게 하고….
복일       나? 그 순간 끝나는 거야. 당신 속에 난 그저 흔적일 뿐이야.
미자       그건….
복일       그래. 궤변일지 모르지만 난 모든 게 허상이라고 봐….
미자       그래서 수시로 날 만져 봤던 거야?
복일       유일한 확인 방법이니까.
미자       우리가 같이 한 지도 벌써 40년이네.
복일       오래도 버텼군.
미자       그 말은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복일       아냐! 아냐! 위태로웠던 세상 속에서 용케도 그랬단 거지.
미자       그렇다면 한 가지 물을게? 당신에게 있어서 난 뭐였어?
복일       그. 글쎄. 길동무랄까?
미자       그럼, 사랑이 전혀 없는 타인 같은…. 오직 목적만 같이 하는….
복일       아냐! 아냐! 사랑해! 사랑한다고! 하늘만큼 땅만큼 됐어!
미자       영혼이 없는 것 같은데?
복일       영혼이 뭔데? 혼불이라도 놓으라는 거야?
미자       됐어. 내 생각과 같지 않았다면 오늘까지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난 선택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데 당신이 날 선택한 이유는?
복일       어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선택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아.
미자       그 이유는?
복일       어차피 결과는 같다는 거지.
미자       난 이해가 안 되는데?
복일       다시 말하면 난 누군가를 선택하든 후회하지 않을 거고 끝까지 갈 심산이었으니까.
미자       그건 어폐가 있는데? 그게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기도 하잖아?
복일       그러나저러나 운명은 이미 결정지어졌다고 봐. 다시 말하면 당신과 난 운명에 의해서 맺어진 거라는 거지.
미자       운명적 사랑이라는 건가?
복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겠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뭐지?
미자       망상 같다는 착각으로 이어지는 엔도르핀이랄까?
복일       그럼, 환각적이라는 건가?
미자       아무튼 난 그래 그 순간만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봐.
복일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도 그랬나?
미자       다, 당연히….
복일       망설이고 있군.
미자       다그치니까 그렇지.
복일       아무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껏 함께하고 있다는 거야.
미자       나의 첫인상은 어땠어?
복일       은근히 전투적으로 보였어.
미자       투사 같은?
복일       아니, 저 정도면 어려움을 헤쳐 나갈…. 당신은?
미자       무난하다랄까? 아니지 게다가 성실성과 의리도….
복일       성실성은 이해가 되는데 의리는?
미자       계약에 대한 의무감 같은 거….
복일       쉽게 말하면 딴눈 팔 짓은 안 할 거라는?
미자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
복일       정확히 봤군. 난 가톨릭 모태 신앙으로 수도사 같은 삶으로 길들였으니까.
미자       그럼, 아예 이성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는 거야?
복일       그렇지는 않아. 나의 생체 시계도 여느 사내와 같이 어김없이 작동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우리의 시작은 파란만장 자체였지?
미자       의도치는 않았는데 그렇게 됐던 것 같아.
복일       순전히 맨땅에 헤딩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리도 막막했을까. 둘 다 빈손뿐이었으니까.
미자       그래도 대단했던 것 같아.
복일       대단하다니?
미자       딴생각 없이 직진만 했잖아.
복일       하긴 그땐 비빌 언덕이 없는 삶이 고달프다는 걸 인지할 틈조차 없었으니까. 결국은 돌아보면 도로 그 자리인데도 말이야.
미자       당신 생각나 가난을 피해 무작정 상경했을 때 말이야.
복일       기억하다마다 결혼 패물 모두 팔아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지. 그리고 노숙을 거듭하며 발이 부르터지도록 걷고 걸어서 겨우 영등포 문래동 재개발 구역에 철거 대상 집을 구했지. 보증금 없이 3만 원에….
미자       그래요.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당겨, 재개발되려면 5년 이상은 걸린다고 해서 마음 놓고 들어갔는데 6개월 만에 창호지에 물 번져 오듯이 매정한 불도저의 이빨에 야금야금 먹혀 갔지.
복일       맞아. 아침에 눈을 뜨니 안방이 반이나 뜯겨 나갔지.
미자       더 기가 막힌 건 이사 비용조차 받지 못한 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 당신이 그렇게 말미를 달라고 사정했는데 말이야!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니까. 철거반장이란 놈이 되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사라지라고 했지. 그래도 당신은 물러서지 않았어.
복일       그. 그랬지. 살고 싶지 않으니까 죽여 달라고 맞섰지.
미자       (한숨 쉬며) 겨, 결국에는 늘씬 얻어맞고 되레 업무 방해죄로 경찰서에 넘겨져 철창 신세도 지고 말이야. 그때 왜 그랬어. 계란 들어 바위 치는 거라는 걸 몰랐어?
복일       최소한의 사람 대접을 받고 싶었어. 그들에게도 일면의 양심이 있다면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때 우린 사람이 아니었어. 그들의 손에 멱살이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니까 서장이란 작자가 그러더군. 허구한 날 쓰레기 처리군….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 쓰디쓴 눈물이 말이야.
미자       맞아. 그때부터 우리의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라 피 맛이 섞인 피눈물이었어. 그날 이후 당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철거 경비 초소 옆에 이불 한 채와 살림살이 보퉁이 하나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멀거니 보면서 말이야. 왜 그랬어.
복일       모르겠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도 그 방법도….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흐르길 바랄 뿐이었어. 그러다 보면 뭔가 결정이 날 것 같아서 말이야.
미자       나 역시 그랬던 거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기대도 일었어.
복일       뭘?
미자       드라마 같은 기적이…. 거 있잖아. 드라마 보면 건설사 대표의 왕자 같은 아들 전부가 발견하고 선의를 베푸는 거 말이야.
복일       그러기에는 우린 너무도 절어 있었어.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헤어진 여름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미자       그렇다면 더욱 가련해 보이지 않았을까?
복일       가련하기보다는 더 짓밟고 싶은 본능을 일깨울 수도 있는 몰골이었는지 몰라. 게다 주변에는 살벌한 철거 깡패들뿐이었어. 선의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데 말이야….
미자       그래서 입술을 깨물며 침묵으로 일관했던 거야?
복일       부인은 않겠어.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기대는 있었어.
미자       뭐?
복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미자       서글픈 소망. 맞아. 그런 셈이지. 놀랍게도 그들이 신천지를 제안해 트럭에 태워졌고. 황무지 벌판 폐건축물 집합장에 내동댕이쳐졌으니까.
복일       그래도 솟아날 하늘을 보았어.
미자       하긴 폐건축물을 모아 당신이 만든 임시 거처는 하늘이 뚫려 밤마다 별이 보였지.
복일       맞아! 난 그때처럼 확실하게 별을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우리는 주위에서 슬픈 별의 한숨을 들었지.
미자       하긴. 또 다른 이웃이 있었지. 우리를 또 닮은 인간들 말이야.
복일       순간,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더군. 다시 말하면 삶의 존재 이유를 말이야.
미자       그래서 그들과 함께 근처 건설 현장에 잡부로 취업한 거야?
복일       맞아. 무작정 한번 해 보자는 거였어.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모았지. 겨우 생라면과 물로 버티면서 말이야.
미자       너무 가슴이 아팠어. 저녁이면 피로에 젖어 움막 포대를 제치고 기어들어 오는 당신을 보면 말이야. 그래서 결심했어.
복일       종적을 감춘 거?
미자       나라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영등포 시장 식당에 일자리를 알아봤어. 근데 당신 말대로 하늘이 무너져도…. 우연히 고향 선배 언니를 만났어. 그리고 그 언니 배려로 언니 직장 사장 집 식모로 취직을 한 거야. 근데…. 사장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 볼 사람이 없다고 그날부터 근무를 시작한 거지.
복일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말이야?
미자       승낙하고 보니 당신이 있었어. 하지만 요즘처럼 휴대전화도 있는 게 아니어서…. 오로지 사장 내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지. 오해 많이 했지.
복일       아니, 처음에는 분노가 일다가 나중에는 다행이라 생각했어. 그 돈이라도 쥐여 주게 돼서 다행이라고….
미자       그럼, 내가 당신이 피땀 흘려 번 돈 가지고 야반도주를 했다고 생각한 거네?
복일       그렇다고밖에….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으니까.
미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냐. 연락 못 한 나의 잘못이 커. 하지만 서운한 것도 있었어. 사흘 만에 돌아갔을 때 당신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어. 애를 태우다 돌아온 나를 보고 말이야. 그래서 화가 치밀어 소리쳤지. 아주 사라져 줄 걸 그랬네! 그러자 당신이 맞장구쳤지.
복일       이 바보천치야! 그래야 사는 거야!
미자       순간 난 당신을 꼭 껴안고 통곡하며 말했지. 미안해! 미안해!
복일       그때 난 진정으로 가슴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꼈어. 이런 게 같이 사는 이유라는 걸…. 게다가 당신이 구들장 밑에 꼭꼭 숨겨 둔 검은 봉지의 돈을 쥐여 줬을 때 끝내 울음 터뜨리고 말았지…. 바보! 바보 바보… 하면서 말이야….
미자       그날 이후 우리의 삶은 서서히 기지개를 켰지…. 아주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복일       다. 당신 덕분이었지. 변두리긴 하지만 셋방을 얻었고. 게다가 당신 사장 덕분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설비 보조로 취직했지.
미자       그리고 25년 만에 우리의 집을 장만했지. 근데… 왜 기구한 운명은 끈질기기만 해. 10년 전에 난소암에 걸려 애를 포기하게 했으면 말지… 재발은 왜 해 이 모양이냐고…. 결국 또 궁지로…. 다 어리석은 당신 때문이야. 암담의 시작일 때 내 말대로 포기해야 했어.
복일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미자       그래도 남은 생이 안타깝잖아.
복일       몇 번 말해야 알겠어. 홀이 되면 짝수의 의미가 없는 거야.
미자       짝수로 만들면 되잖아?
복일       그런다고 그 지긋지긋한 운명의 화살을 비껴가지 않아. 고로 어디까지나 의미는 의미일 뿐이야. 다시 말하면 표적은 표적일 뿐이라고…. 해서 내 솔직히 말하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미자       당신, 바보 아냐?
복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냐? 그래서 천생연분이라는 거고….

 

부엌의 전기밥솥에서 취사 완료를 알린다.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했습니다. 주걱으로 잘 저어 주세요.”

 

복일       인제 그만 밥을 퍼야겠구먼.
미자       지금 밥이 문제야.
복일       그런다고 약속한 시각은 멈추지 않아. (일어나며) 잠시만 기다려 한 상 차려 올 테니까.
미자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복일       왜 그래. 미련은 깊이 생각할수록 뿌리만 깊어져.
미자       몰라! 몰라! 도무지 모르겠어.
복일       (어깨 도닥거리고) 그냥 모르는 척해…. (부엌으로 간다.)
미자       몰라! 몰라! (머리를 쥐어뜯는다.)

 

슬픈 음악과 함께 복일이 상 차린다. 미자,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는다. 상 차림을 마친 복일 상을 들고 들어온다. 알루미늄 작은 상에 밥과 국 그리고 열대 과일이 놓여 있다. 미자, 괴로운 듯 이불을 끌어다 얼굴까지 덮는다. 복일, 침대 앞에 상을 놓고 미자를 쳐다본다.

 

복일       준비됐어.
미자       …….
복일       그런다고 사정이 달라지진 않아. (시간을 보며) 8시 뉴스가 끝날 시간이야.
미자       …….
복일       또 통증이 몰려 와?
미자       …….
복일       한 방 더 놔 줄까?
미자       …….
복일       (낡은 상자 위에 놓여 있는 TV 스위치를 켠다.)

 

TV, 뉴스 종료 멘트에 이어 복권 추첨 멘트가 흘러나온다.

 

복일       국 식어….
미자       재촉하지 마!
복일       또 미련의 발동인가?
미자       아냐! 아냐! 나 미련 같은 거 몰라! 그냥 궁금해서 그래.
복일       뭐가?
미자       진짜로 하늘나라에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
복일       그야 모르지. 나도 아직 안 가봤으니까.
미자       당신 생각은 어때? 존재한다고 봐?
복일       솔직히 헷갈려. 오로지 하늘만 믿고 의지해 온 성직자들이 범죄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말이야.
미자       나도 그 생각이야. 만약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착하게 살아온 사람은 억울하잖아.
복일       그러면 뭐 해. 이미 끝장났는데…. 됐지…. 자, 그럼. (밥상을 가리키며) 앉아. 미련이 없다면….
미자       몇 번 말해야 알겠어. 난 고런 거 잊은 지 오래라니까! (밥상 곁에 앉는다.)
복일       그래, 최소한 당신은 그렇지 않으리라 봐. (마주 앉으며) 어때, 성의껏 차렸는데….
미자       뭐부터 먹어야지?
복일       입맛이 없을 텐데…. 국에 밥 한 숟갈 넣어 말아먹는 게 어때?
미자       (밥을 보며) 이건 뭐야? 도대체 뭘 넣은 거야?
복일       몸에 좋다는 알파미.
미자       그것뿐만 아닌데? 이건 흑미 아냐. 쥐눈콩에….
복일       뺄까?
미자       됐어. 밥은 생각이 없어.
복일       그럼, 열대 과일 줄까?
미자       내가 먹을게. (람부탄을 들고) 성게처럼 생긴 이건 뭐야?
복일       글쎄, 람 뭐라고 했는데. 람보, 하여튼 간에 그와 비슷한 이름이야.
미자       어떻게 먹는데?
복일       글쎄, 성게처럼 까서 먹지 않을까?
미자       (한숨을 내뱉고 아보카도를 들고) 이건?
복일       글쎄, 반으로 갈라 씨를 빼고 썰어 먹는 게 아닐까?
미자       사면서 먹는 법도 안 물어본 거야?
복일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미안해….
미자       아, 아냐. (복일의 시선을 외면하고 TV를 힐끗 보며) 곧 복권 추첨할 것 같은데? 진짜로 샀어?
복일       응. 1등 당첨점을 찾아다니며 샀어.
미자       뭘 그런 헛수고를 해. 다 1등 당첨점이라고 써 붙였을 텐데.
복일       하긴…. (위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바닥에 펼친다.)

 

MC멘트    그럼, 지금부터 본격 추첨을 하겠습니다. 당첨은 나오는 숫자 순서와 관계없이 숫자만 맞으면 되겠습니다. 황금손 씨! 버저를 눌러 주세요!

 

번호가 차례로 호명된다. 묵묵히 복권을 대조해 보던 복일과 미자, 묵묵히 일어나 하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다.

 

MC 멘트    이것으로 이번 주 복권 추첨을 마칩니다. 다음 주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복일과 미자, 상 위에 알약이 가득 담긴 소주컵을 든다. 잠시 한숨을 내쉰 다음 입에 털어 넣고 물병을 들어 벌컥 마신다.

 

암전.
사이. 노크 소리.

 

주민센터 직원    (소리) 한복일 선생님! 한복일 선생님! 지금 집 안에 계시죠? 주민센터 복지과에서 나왔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 선정돼서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에코 반복)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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