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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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념일이다. 전국 곳곳에서 기념식이 열리지만, 내게 오늘은 각별한 날이다. 남편의 4주기 추모일이다. 차는 서울을 벗어나 자유로에 접어들었지만,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더디게 흘러간다.
경기 파주시 탄현면 ‘하늘나라공원’이다. 해는 그 얼굴을 감추었지만, 바람 한 점 없고 고인의 성품처럼 온화한 날씨다. 바다를 날아온 제주 아들 내외와 서울의 딸네 등 일곱 식구가 산소 앞에서 추모예배를 드린다. 기도문은 일상의 보고까지 담긴 긴 글이지만 위령기도로 예배를 마친 뒤, 생전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기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당신은 우리 지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듯싶다. 어느 가을 아침, 감청색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당신 뒤에서 보면 아직도 연애하고 싶다는 여인이 있을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직장에서 돌아온 당신이 물었다.
“젊은 선생들이 착복식 하라고 놀리는데, 이 양복 몇 년쯤 된 거지?”
속주머니엔 헝겊을 대어 깁고, 소맷부리와 바짓단은 조금씩 접어 올리고, 바지 밑은 닳고 닳아 재봉틀로 누비고, 단춧구멍은 두 번씩이나 감친 양복이었다. 돋보기 쓰고 수선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만 덜 넣었어도 주머니 입구가 이렇게까지 닳진 않았을 것이라며 중얼거리기도 했었지.
“젊은 아내라면 아직 돋보기도 쓰지 않고 바느질도 더 이쁘게 했을 텐데.”
당신은 돌아서며 지그시 대꾸했지.
“아마 젊은 아내였으면 이 양복 진즉 버렸을걸.”
그날 당신은 멋지고 늠름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엉덩이가 찢어진 양복 사건으로 큰딸이 다른 바지를 들고 학교로 달려가던 촌극도 있었다. 그 기억은 아마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
1970년대 초, 여름방학 때다. 2기통 신진 퍼블리카를 타고 설악산으로 떠난 첫 여행이었다. 결혼 10여 년 만에 처음 떠난 우리만의 여행이라 설레고 한편 두려웠다.
휴게소에서 안내받기도 하고 지도를 보면서 신나게 달렸다. 마침내 양양에서 한계령 정상 휴게소까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한 고갯길에 이르렀다. 승용차는 굽잇길이 무서웠는지, 그예 갓길에 멈추고 말았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두렵고 초조하기 그지없지만, 나만이라도 태연한 척 냉정했다.
차들이 휙휙 지나갔지만, 다행히 큰 승용차가 옆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냉각수가 부족하다며 젊은 운전자는 자기 차의 물을 들고 와서 주입해 주고 떠났다.
“여기까지 무사히 오셨으니 천천히 올라가세요.”
어찌나 고마운지 나는 떠나는 차에다 절을 하고 또 했다. 세상에는 구세주가 가까이 있음을 배웠다. 내가 옹졸해서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어렵사리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경비원이 화등잔만큼 큰 눈으로 다가왔다. 자기가 근무한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작은 차가 한계령을 넘어온 것은 처음이란다. 초보운전 기사 내외는 패기와 열정이 누구 못지않았던 시절이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해도 3월 중순이었다. 조촐한 금혼식 자리였다. 막내딸네 쌍둥이 손녀가 남편과 내 가슴에 꽃을 달아주며 축하연의 막이 올랐다. 아들의 인사말 뒤 남편의 답사가 이어졌다. 긴장되고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을 때다.
“Only one, 단 하나, 단 한 사람을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오직 그 한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내 곁의 이 사람을.”
그 말은 충격이었다. 당신의 사랑은 늘 한결같고 5월의 호심(湖心)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남편의 그 외골수가 긴장, 인내, 구속, 배려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는 언제쯤 꽉 쥔 고삐를 풀 수 있을지 나도 모르지만, 수줍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리 없는 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쳤다.
며느리는 나의 수필 「축제」를 낭독하고 ‘50년’의 영상이 배경음악 가운데 10여 분 남짓 상영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시작으로 4남매의 성장 과정과 손주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발가벗고 물장구치는 모습, 허겁지겁 짜장면 먹으며 피카소 그림을 그린 얼굴, 눈사람 옆에서 V자를 만드는 개구쟁이 형제, 열아홉 식구가 비좁은 듯 꼭꼭 끼어 찍은 가족사진 등, 고스란히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었다.
큰사위는 안내장을 준비하고 총연출은 둘째 내외가, 훤칠한 막냇사위는 사회자였다. 40여 년간 한 직장에 묵묵히 몸담았던 당신의 삶이 있었기에, 이 뜻깊은 행사가 가능했다. 내가 컴퓨터 앞에 머물 수 있었던 것도 당신 덕분이 아닌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내쉰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나를 살펴주며 보호자였던 사람, 때론 친구요 스승이었던 사람. 당신은 든든한 버팀목이요, 삶의 동반자였다.
남편의 4주기 추모식을 맞아 비로소 묘 앞에 무릎 꿇고 털어놓는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서려 있던 삶의 흔적이다. 바람 몰아치는 산봉우리 바위틈에 홀로 선 구부정히 휘어진 한 그루 소나무, 나만 남겨둔 채 당신의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던가요.
하지만 어제 한 송이 꽃은 지고 오늘 한 송이 꽃이 핀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이, 그 누구인가. 그대 사랑 아름답기만 하여라.
영원한 그대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