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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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그해 봄은 내 생애 못내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신춘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근 8년간 근무하던 중등계 공립 학교를 사직하곤 직장 연수 차 해외로 떠난 남편을 따라 네덜란드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엔 군부 치하, 공무원의 기강이 매우 강화되던 시기라 해외 체류 시 공무원의 휴직이 절대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귀국하니 모든 것이 제자리를 못 잡아 세상만사가 허랑하기만 했다.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교직을 핑계로 가사며 육아며 매사를 다 도우미의 손을 빌려 해결해 왔던 터라, 귀국 후 당장 발등에 떨어진 전업주부의 역할이 도무지 내 것이 아닌 양 힘들고 버겁기만 했다. 두 아이의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며 보내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힘에 부쳤다.
그런 중에도 교사 시절부터 지속된 문예지 『현대문학』 『문학사상』 등의 구독과, 서점을 기웃거리며 맘에 드는 책을 골라 구매하는 일만은 내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여일한 기쁨이었다. 명색이 영어교사였으나 해외 체류 시 영어 정통에의 갈급을 절실히 느꼈고 귀국하면 기필코 영어를 완전 마스터하리라 결심했었다. 어느 봄, 마침내 모 신문사 문화 센터 원어민 회화반에 등록할 결심을 하곤 집을 나섰다. 지독한 귀차니스트라 매사 대체로 실천이 느리고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내겐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러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순간의 선택은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곤 저만치로 뒷걸음질쳐 사라져 버렸다. 신문사 문화센터의 수많은 클래스 중 원어민 영어를 수강하려던 애초의 내 굳은 결심은 정작 등록을 하는 순간 엉뚱하게도 그만 소설실기반 쪽으로 쏠리고 마는, 가히 기막힌 운명적 선택을 하고 말았던 것이니….
내 나이 서른 중반의 어느 봄, 그런 연유를 거쳐 난 마침내 소설 습작이라는 걸 시도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일기 쓰기는 계속해 왔던 터라 쓴다는 일이 그리 어설프지만은 않았던 것도 한몫을 했던 것일까. 원어민 영어보다는 글쓰기가 훨씬 더 부담 없고 친숙하게 다가온 것도 선택을 용이하게 한 원인이었으니. 어쨌든 나의 소설 습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신문사 문화센터 소설실기반엔 여남은 명의 수강생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 소설 습작 이론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실제로 각자 소설을 한 편씩 써오는 것이 과제였다. 늘 『현대문학』 『문학사상』 등의 잡지를 끼고 살아와 소설이란 장르가 그닥 생소하진 않았으나, 정작 소설을 읽고 감상하는 것과 직접 쓴다는 것의 차이란 맛있는 요리를 먹고 즐긴 경우와 그 요리를 직접 만드는 것만큼의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과정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고 재미가 있다는 건 꽤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이 쓴 글을 직접 낭독한 후, 작품에 대한 합평을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설프고 미흡한 나의 첫 습작품이 주위의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도 자못 흥미롭기만 했다. 수강생들 중엔 더러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도 있어 치유의 한 과정으로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과제물의 내용은 참으로 각양각색 다양하기만 했다. 어느 날 외모가 빼어나게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 수강생이 과제로 준비해 온 자신의 습작품을 읽어 가는데 느낌이 좀 이상하여 유심히 듣다 보니, 당시에 내가 인상 깊게 읽은 한 유명 작가의 단편임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근 6개월의 수강 끝에 수강생들의 습작품을 묶어 동인지를 내게 되었다. 미흡하나마 나의 첫 작품이 실린 첫 동인지인 셈이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어느 여류작가가 겨우 습작의 그 첫발을 내딛는 우리 동인지의 작품 중 일부를 고스란히 표절, 어느 월간지에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초유의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었으니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 작품의 몇 문장, 거의 한 단락을 도용했고, 또 다른 이의 소재와 문장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기에 좀체 믿을 수가 없었으나 그건 부인할 길 없는 사실이었다.
동인들이 모두 모여 숙의한 결과, 제아무리 관대하게 용서한다 해도 도저히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사자를 만나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야만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잡지사에 연락하여 그 작가의 표절 사실을 알리고 문단에서 제명 수순을 밟게 해야만 한다는 애초의 강경한 입장에서, 결국 한 발 뒤로 물러섰음은, 주위 많은 선배 작가들의 간곡한 설득의 결과이긴 했으나 내심은 뭔가 못내 석연치 않은 기분임을 씻어낼 길이 없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베이지색 바바리에 빨간 바지, 연둣빛 구두를 신은 여류작가가 결국 우리 동인들 모임에 나타나 표절에 대해 정중히 사과를 했다. 몇 번인가 매스컴을 통해 본 적이 있는 화려한 모습 그대로인데 미처 등단도 못한 햇내기들 앞에서 울먹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도 어이없고 기막혀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대저 문학이 뭐길래 남의 작품을 표절해서까지 그 이름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인지, 순간 문단에 대해 그 어떤 실의와 환멸이 몰려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등단 후에도 언젠가 다시 또 그분과 해외에 체류하는 어느 여류작가 간에 다시금 표절 시비가 일어난 걸 보면 표절이란 도저히 완치가 쉽지 않은 불치의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좀체 씁쓸함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의 외롭고 지난한 습작기가 이어졌다. 어언 가까운 동인들은 하나둘씩 문예지를 통해 등단이란 걸 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슬슬 소외와 초조감을 느끼게 되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 그 말을 증명함일까. 대범하게도 유수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덜컥 투고하는 무모함을 저지르고야 말았으니, 그건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대박으로 이어질 줄은! 문운. 그것도 실로 한꺼번에 와르륵 터져 나온 잭팟과도 같은 문운이었다.
가장 오래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일보에 단편 「골고다의 길」이 당선되는 행운에 이어, 유서 깊은 문예지 신춘문예에 단편 「출모(黜母)」 당선, 또한 연이어 『현대문학』에도 단편 「어둠, 그 통로」로 신인상에 당선되는 3관왕의 영광이 잇달아 몰려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졸지에 닥쳐온 3관왕의 행운, 더없이 화려한 등단이었다.
그러나 그 후 쇄도하는 원고 청탁을 메꾸는 일이 더없는 곤혹이며 난관임을 깨닫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등단과 동시에 여러 매체를 통해 그간 짬짬이 써 놓은 몇 편의 작품들을 거의 다 소진한 터라 더 이상은 충당이 안 되는 딱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아이들 건사와 집안일에 쫓기며 죽어라 원고지 칸을 메워 갔으나 역부족. 결국엔 점차 원고 청탁을 뒤로 미루고 거절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종내는 원고 청탁 자체가 뜸해져 버리는 시기가 닥쳐왔다.
그저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일상을 열심히 사는 일로 그렇게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어언 등단 10년이 지나도록 창작집 한 권도 제대로 못 내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문학이란 참으로 녹록잖은 것임을, 무모히 덤벼들어 쉽게 정복할 대상이 아님을 절감하고 또 절감하며 한동안 끝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늦어도, 너무 늦어도 계속 쓴다는 행위를 계속해야만 함이 결국 내 자신을 구원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서야 확연히 알았다. 정작 등단 매체란 단지 문단에 나오기 위한 하나의 관문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중요한 건 등단 이후의 성실하고도 꾸준한 집필 활동임을 알았다. 그렇담 지금 현재 작가로서 나의 위치는 과연 어떠한가. 등단의 그 요란함에 비해 진정 그 값에 제대로 답하고 있는 것일까. 불현듯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아직도 심한 자괴심과 부끄러움에 마음이 적이 무거워짐은 피할 길이 없다.
다만 이제 남은 세월이라도 새로이 태어날 한 작품 한 작품을 옥같이 다듬어 조금이라도 등단의 그 영광에 갚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부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