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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치솟는 서울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한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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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개천을 두고 분지에 도시가 정착했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기준으로 남쪽 목멱산(남산)과 동쪽 낙산, 서쪽의 인왕산을 연결하여 도성을 쌓았다. 중앙에 경복궁, 좌우에 종묘와 사직단이 들어서고 광화문 앞을 관청의 거리로 육조가 자리 잡았다. 각종 국가 기관과 군영도 도성 내 자리를 같이했다. 운종가(종로)는 시전이 펼쳤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과 육조 거리를 근거리에 두고 고관들의 주거지인 북촌이 형성되어 조선 최고 주택지가 들어섰다. 인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상촌은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이곳은 관청과 육조 거리를 근거리에 두고 서리, 녹사 등 하위직 아전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 계층의 문학 활동이 활발했던 창작의 무대였다.
도성 내는 궁궐과 관청, 군영, 양반들의 가옥들이 점유했으니 백성들이 거주할 토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양은 인구 10만의 계획 도시로 시작했지만, 조선 후기에 도성 인구 증가와 지방 유입 인구가 모여 20만 명에 육박했다. 부족한 주택난은 불 보듯 뻔하게 번져 갔다. 서민들은 집을 구하지 못해 산기슭이나 하천 변에 천막이나 움막으로 대처하고 생활을 이어 나갔다.
지방 선비들이 한양 벼슬길에 올랐지만, 주거를 마련하지 못해 도성을 헤맸다. 조선 전기 문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또 조선 중기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도 육조에서 호령을 쳤지만, 집 없는 설움을 한시(漢詩)로 풀어냈다. 선비의 체통은 허름한 집에서는 거주할 수 없어 전셋집을 전전했다.
조선시대 지방의 집값은 1천 냥이 넘는 집이 아주 드물게 있는데, 한양의 비싼 집은 2만 냥을 웃돌며 거래될 정도로 한양과 지방의 집값 차이가 컸다. 현재 서울과 지방 아파트를 비교해 봐도 큰 격차를 알 수 있다.
사례를 살펴보면, 경북 내륙 공업 도시 구미시 금호동 A아파트 국민 평형 방 3개(전용 84.84㎡)는 2025년 11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3억 5,200만 원으로 거래되었다. 또 전북도청 인근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H아파트도 같은 평형(전용 84.96㎡)은 2025년 11월 국토교통부 신고가 2억 6,000만 원에 성사되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R아파트의 같은 평형(전용 84.98㎡)은 2025년 3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56억 원의 최고가 찍고도 상승 여지를 남겼다.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 강남구 삼성동 P아파트 같은 평형(전용 84.23㎡)은 2025년 11월 국토교통부 신고가 36억에 체결됐다. 주상 복합 대형 아파트는 호가 100억 대에 초호화 주택이 속속 등장하면서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과의 집값 격차는 20배, 현재 서울과 지방 도시 구미, 전주 등 같은 평형대의 집값 차이는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20배의 격차를 훌쩍 넘겼다. 한양 집은 기와값이고 핫한 서울 집값은 자갈과 시멘트가 굳은 콘크리트 값이다.
한양의 집값이 상승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문헌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성 내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급증하고 새로 집을 지을 부지는 이미 관청이나 양반 가옥으로 들어차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매매 명문(明文)을 보면 양반 저택이 많은 북촌의 가옥 거래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궁궐 가까이 자리 잡은 선비들이 국정과 학문에 치중하여 부동산에는 등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통방이나 운종가 시전 지역의 가옥 매매는 시전의 상품처럼 활발하게 거래되었음을 거간꾼(조선시대 부동산 중개업자)의 계약서로 남겨 놓았다. 남대문이나 서대문에서 한강 나루로 이어지는 용산, 마포 지역에 초가가 들어서는 이유는 도성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장안에 택지가 부족하여 집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성저십리(면적 235k㎡, 도성 14배)로 촌락이 커지는 모습은 현재 서울의 신도시를 건설한 격이다.
조선 전기 세조의 실세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변 야산 언덕에 정자를 짓고 세도가로 장안의 눈총을 샀지만, 시멘트로 덮은 압구정(狎鷗亭) 한강 전망의 입지는 지금도 부인할 수 없는 명당 아파트군이다. 조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들에게 한양을 떠나지 말라는 편지는 ‘서울은 권력이 살아 숨 쉬고 성균관 같은 교육 기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중앙 무대를 일깨워 준 교훈이다.
조선시대에도 신도시 건설이 작동했다. 한양 성민이 이주하지는 않았지만, 정조(正祖, 조선 제22대 임금)가 축조한 화성(華城)이 그렇다. 한양 도성(면적 16.5k㎡, 여의도 면적 5.6배)은 택지 공간이 좁아 집을 구하지 못한 성민들이 많았다. 주택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한 현상이다. 서울의 주택난도 이와 같다. 뜨거운 서울 집값은 한양과 마찬가지로 택지 부족으로 주택을 지을 수 없어 수급 불균형에서 봐야 한다.
서울은 호락호락한 집이 없다. 그 많은 집들이 들어섰지만 내 집의 꿈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곳이 서울이다. 상경은 누구나 하지만 서민의 터전인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주거난의 도시다. 조선시대 한양에서도 내 집의 소유는 지금처럼 어려웠다. 한양도 서울도 만원이다. 서울은 집들이 다 들어찼으니 신도시를 넓혀도 서울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좋은 직장과 미래가 보장되는 학군, 과학화된 의료 기술, 문화 환경이 발달한 서울에서 사람을 붙잡고 끌어들이고 있다.
면적이 좁은 서울의 주택 시장은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건설하지도 못하고, 마냥 외곽으로 신도시를 늘려도 서울과 멀어지고 일부 구간에 GTX(수도권 광역 급행 열차) 노선이 개통되어 직주(職住) 시간은 짧아졌지만, 서울 집값은 요지부동이다. 그렇다고 주택을 지하로 건설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한양은 성저십리를 넓혔고 서울은 성저백리의 신도시를 건설했지만, 한정된 토지에 주택을 늘리는 대안은 고층으로 올리는 공법 외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규제는 규제를 낳을 뿐 집값만 부추기며 공급이 없는 주거 안정은 백해무익이다.
교통은 지하를 뚫고 아파트는 하늘로 치솟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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