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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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만큼 올곧은 사람은, 나는 보지 못하였다. 머리부터가 절세의 수재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식하셨다. 스님은 아홉 살 적에 한문에 문리가 나서 원전을 해득하였고, 10대에 들어 사서삼경이며 노장(老莊) 사상까지 회통한 기호학파의 마지막 선비였다. 출가 이전에 이미 동양철학의 석학이었다.
탄허(呑虛)는 허공을 삼킨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 해석으로 참뜻을 풀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유와 말 이전의 본디 자리, 시공을 넘어선 경지에서 일컫는 법어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은 당대의 대표적 선승 방한암(方漢岩) 선사가 맏상좌인 탄허 스님에게 지어준 법호이다. 이 법호에는 참선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으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고 들었다.
탄허 스님은 한암 선사와 3년에 걸친 교신으로 깨달음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출가하셨다. 학식만으로는 생사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본 까닭이었다 한다. 그래서 온갖 욕망과 인연으로 얽힌 멍에를 내려놓고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책이나 몇 권 더 보기 위하여 1기 인생을 걸 수는 없었다”고 단언하셨다. 그래서 스님은 곧바로 오대산 상원사에서 은사인 한암 선사의 지도로 참선 정진에 몰입하셨다. 그것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용맹 정진이었다. 묵언 정진만 3년, 15년 동안 동구 밖에도 나오지 않으실 정도로 강행하셨다. 스님은 여기에서 허공을 허물어트리는 경계(境界)를 보고, 오도송(悟道頌)을 읊기도 하셨다.
그 후 1950년 전후기에 이르러, 탄허 스님은 큰 전환기를 맞는다. 그간의 참선 정진으로 얻은 밝은 안목을 활용하여 인재를 길러내고, 경전을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월정사로 내려오게 된다. 월정사에서는 오대산 수도원을 열어서 승속의 지도자급 인재들을 교육시키는 데 집중하셨다. 그리고 8만 대장경 속의 주요 경전과 노자 도덕경(道德經), 장자 남화경(南華經), 주역(周易) 등을 번역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어려운 한자로 박물관에 갇혀 있는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고, 후학들의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용맹 정진이었다.
탄허 스님은 아홉 살에 문리가 나서 원전을 만화책 보듯 해득할 수 있는 문해력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 참선 정진을 통하여 대승 경전의 핵심 종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도 갖추셨다. 더욱이 역경 불사에 자기 몸을 사를 수 있는 원력까지 갖추셨다. 그래서 스님은 금생의 마지막 불사로 이 대역사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선 것이다. 그것은 5세기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역한 것에 버금가는 절세의 대업이었다.
탄허 스님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한 역경은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기간만도 30여 년에 걸쳐 모두 23종 340권에 이르고, 원고 매수도 9만 매가 넘는다. 그중에서 스님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화엄경이었다. 화엄경은 17년에 걸쳐 초록까지 모두 260권을 다 번역하여 47권의 책으로 엮어서 편찬하셨다. 화엄경의 원고 매수는 6만 3천 매가 넘고, 교정만도 5년이 넘게 걸렸다. 나는 교정 전문가를 대여섯 명씩 소개하였고, 방산굴과 서울 대원암에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역경 원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참선하고, 곧바로 번역에 매달리셨다. 거의 매일 8시간부터 10시간까지, 어떤 때는 15시간 동안 작업하기도 하셨다. 서울 대원암에서 번역하실 때는 어깨에 침을 꽂은 채 작업한 적도 있었다. 스님은 이러한 무리한 작업으로 소화 불량이 와서 위장병이 심해졌고, 어깨와 팔목의 통증에 시달리셨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떨어져서 몸져누우실 때가 많았다. 스님에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탄허 스님은 신념으로 뭉친 강골이었다. 그래서 몸가짐이 반듯하고, 인간적인 욕망에서 오는 허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순진한 데가 있고, 솔직하고 소탈하셨다. 그래도 타고난 습성과 성격에서 온 허점은 갖고 계셨다. 그 허점을 숨기려 하거나 위장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도인이나 예언가 행세를 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참선하려고 중 되었는데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나는 스님이 인간적인 허점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이 좋아서 정이 들었다. 스님이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위선과 허영심으로 찌든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교훈이었다.
1959년이었던가, 나는 사촌형 운학 스님을 만나기 위하여 월정사에 갔다가 탄허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그때부터 스님이 입적하신 1983년까지 4반세기 가깝게 모셨다. 내가 자주 월정사로 찾아갔고, 스님이 서울 나오시면 거의 만나 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하여 휴가를 내고, 스님의 거처였던 방산굴에서 100여 일 동안 함께 산 적도 있었다. 그때 내 소임은 스님을 모시고 산책하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을 부처님처럼 모셨고, 스님은 자식이라 부르셨다. 스님은 내 인생의 길잡이셨다. 나는 스님의 당부대로 반평생 동안 참선 흉내를 내어, 지금은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83년 초, 나는 스님을 한양 대학 병원에 입원하시도록 주선하였다. 입원해 계실 때 마지막으로 “허공은 삼키셨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스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얼굴에서는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었다. 그리고 한참 후 오대산의 허공이 소멸하였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스님은 인간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가셨다. 당신의 신념에 따라 참선에 용맹 정진하여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그 등불로 후학들의 길잡이를 마련해 주고 떠나셨다. 역사는 머리가 좋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도 후진들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자기 희생만을 고집한 사례로 기록할 것이다.
나는 지금 창공을 바라보고 있다.